< 48. 파도 (3) >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김세진은 일단 길드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릴리아와 함께 마땅한 해결책을 생각해두었으니, 걱정하지 말란 말을 해두고서.
그렇게 텅 비어버린 회의실에 가만히 앉아 TV를 켰다.
영상 속에 비쳐지는 일상은 언제나와 같다.
마법채널은 새로이 마기서를 발매한 방배동 마법사의 일로 그득하고, 이른 시간에도 방영되는 예능은 험악한 시국임에도 오히려 그럴수록 대중을 즐겁게 해줘야한다는 사명감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뉴스는 그 예능의 대척점에 위치해 연일 심각한 소식만을 쏟아내었다.
역시, 일상은 일상인 것이다.
김세진은 한동안 멍하니 TV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의 거한 인사를 받으며 길드 사옥을 나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요즈음 몬스터 습격이 잦아졌기 때문인지 출근시간 임에도 도로는 텅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쾌속으로 달리며 한쪽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 맑은 바람이 차 안으로 나부낀다.
열린 차창 저편으로 구름 아래에 매달린 아침해가 보였다. 그 유명한 아침햇살의 광원 아래, 강물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계속 감상하고만 싶어서 운전대를 놓고 자동주행으로 설정했다.
아름답게 흘러가는 풍경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
인간도, 엘프도, 수인도 모두 함께 일상을 시작한다.
그는 그들의 면면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
김세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세정이는 아직도 잠에 푹 빠진 채였다. 그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눈을 게슴츠레 뜬 그녀는 환히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오늘은 휴일?“
"으응~ 어제 레이드 가가지고 오늘 휴일.“
"레이드? 그럼 들어온지 얼마 안됐겠네?“
"1시간 전에 왔는데, 상관 없어.“
'아직도' 자고 있었던 게 아니구나. 그가 괜히 미안해하고 있을 때, 세정이가 별안간 그의 뒷목을 껴안고 진하게 입을 맞춰왔다.
유달리 적극적이네.
세세한 말은 필요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옷가지를 천천히 벗겨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중한 하루를 시작했다.
* * * *
"······뭐?“
그 사단이 벌어지고 난 바로 이튿날. 바토리는 김세진이 찾아온 것만으로도 적잖이 놀라웠는데, 그가 한 말에는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 미쳤니?“
"어차피 상관 없잖아. 피가 닳는 것도 아니고. 대신 최고급 수혈팩 줄게. 기사들 걸로.“
바토리의 경멸어린 눈초리에도 세진은 능글맞게 웃었다. 그가 바토리에게 부탁한건 '혈액'었다.
"뱀파이어에게 피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니?"
"중요하겠지.“
"중요한 걸 넘어서 우리는 핏줄로 계급이 나뉜단다? 근데 그런 뱀파이어들에게 피를 달라고 하면, 그건 자살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지 않겠니?“
바토리의 미간이 짙게 패인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억지로라도 뺏는 수 밖에는.“
김세진은 짐짓 으르렁거리며 바토리를 노려보았다. 허나 그럴수록 바토리의 시선은 더욱 험악해져갈 뿐이었다.
"미친놈······."
"아 도와줘 그냥. 여제님 답게.“
"어디에다가 쓰려······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
"기왕 도와준 김에.“
"너 진짜 머리 심하게 다쳤니?“
세진은 그저 웃으며 핸드폰을 꺼넸다.
"대신, 선물을 줄게.“
그리고는 저장된 영상을 홀로그램으로 띄운다. 삐약삐약- 창공을 날아다니는 뱁새의 모습이었다. 그 귀여운 외견에 바토리가 멈칫했다.
"귀엽지? 생김새는 귀여운데 예상 외로 엄청 강한 놈이거든.“
"······뭐 어쩌겠다고?“
"네 애완동물로 줄게. 성격이 좀 지랄맞긴 하지만, 너라면 길들일 수 있을거야.“
바토리는 아주 잠시동안 흥미가 동한 듯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허나 필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거, 로드가 직접 만든거라더라.“
노스페라투를 통해 안 사실인데, 이 뱁새는 로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키메라다.상식적으로 몬스터가 그렇게 귀엽게 생길리 없지 않은가.
그 이유는, 바토리에게 선물하기 위해. 로드는 바토리의 조금은 묘한 취미를 이미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김세진은 너무 슬픈 이야기는 굳이 전하지 않기로 했다.
"······.“
그러나 굳이 잔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까닭을 짐작한 듯, 바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드라진 턱을 보아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한동안 침묵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럼 원래 내꺼 아니니? 이제······ 내가 로드가 되었는걸. "
강한척 하려는 그녀가 엿보인 촉촉한 물기를, 김세진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렇긴 한데, 날렵한 놈이라 아무리 너라도 잡기 힘들걸. 아마 사방팔방 날아다녀야 할거야."
"뭐? 그럼 내가 잡기 힘든 걸 너는 어떻게 잡을 건데?“
김세진은 씨익 웃었다.
"다 방법이 있지.“
바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세진은 긴장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숨막히는 시간이 흐른다. 분명 그녀는 허락을 할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긴장이 되네.
그러다 돌연 바토리가 새빨간 드레스의 어깨끈을 훌렁 내렸다. 새하얀 속살이 너무 갑작스레 드러나, 김세진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옮겼다.
"야야. 야. 너무 갑자기······"
"입 닥치고. 얼마 정도면 되겠니?“
* * *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러니 단 하루 조차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토리의 허락을 받은 바로 다음 날. 김세진은 '길드원 정기모임'을 제창했다. 매월 17일, 길드원끼리 모여서 친목을 다지자는 뜻으로.
가장 먼저 시간약속이 지나치게 철저한 김유린과 만났다. 약속시간 무려 한 시간 전에 나온 그녀의 안색은 다소 피폐했다. 속에 여러 고민과 번뇌가 뒤얽혀있는 것이겠지.
그런 그녀를, 김세진은 미식가라 자부하는 자신도 혀를 내둘렀던 5성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불과 10분 전에는 밥을 먹을 속이 아닙니다─ 라던 그녀는, 막상 스테이크가 나오자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입은 무지 바쁘면서도 여전히 풀죽어 있는 모습이 묘하게 웃기다.
"맛있어요?"
"예······.“
그렇게 그녀를 감상하는 와중에 또 다른 일행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하젤린이었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폐급의 안색이었지만, 김유린과 김세진을 발견하곤 아주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하젤린은 김유린의 옆에 앉을까, 김세진의 곁에 앉을까 고민하는 듯 식탁 끄트머리에서 주춤거렸다.
그때 뒤이어 들어온 유백송이 앗!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리더니, 김세진의 옆자리로 잽사게 몸을 날렸다. 어렵사리 김세진의 옆자리를 선택했던 하젤린이 기겁하며 유백송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야! 너 나와!“
"이게 어딜 잡아!"
그래봤자 힘에선 이기질 못하니 금세 역전당한다.
"놔, 놔라! 존댓말로 할 때 놔!“
하젤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꽉- 꽉-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로 단단한 헤드락이다.
"존댓말 해보시던가."
"아, 아아 아파!"
김세진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설핏 웃고는 말했다.
"하하······ 제 옆자리는 근데 이미 정해져 있는데.“
"예?"
"길드원 모임이잖아요. 곧 세정이도 올거예요."
그러자 유백송은 슬쩍 헤드락을 풀고, 김세진의 한 칸 옆자리로 비켰다.
"근데 나머지는 아직인가요? 신입 단원도 모이기로 했던 것 같은데.“
"곧 올 것 같습니다.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때마침 김선호가 등장했다. 그는 로스한델과 함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자신입 주오형과 브레틴이 딱딱히 굳은 자세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둘의 격렬한 인사가 끝나자 주지혁과 이혜린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노골적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걸 보니, 좋은 쪽으로 관계가 발전한 듯했다. 역시 위기는 사람을 이어주는 최고의 매개체라는 건가?
"저희 왔네요~"
"······흐흠.“
짐짓 발랄한 척 가장한 이혜린과, 복잡한 얼굴이지만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는 주지혁.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곧 이어서 세정이도 나왔다.
"주차하느라 늦었어요~ 아니, 주지혁 기사님. 어떻게 면허가 없어요? 혜린 기사님도.“
"하하.. 면허는 그··· 그리핀 밖에 없습니다."
주지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유세정은 환하게 웃으며 세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빠~"
그리고 보란듯이 꽉 껴안는다.
김유린은 하젤린을 힐끗 바라보았다. 하젤린도 김유린을 곁눈질했다. 우연찮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몸을 움찔 떤 하젤린은 짐짓 괜찮다는 듯 미소지으며 유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이제 다 모인건가요?“
김유린이 하젤린의 머리를 슬그머니 밀어내며 물었다.
"아뇨. 아직 한 명이 안 왔어요.“
"한 명이요?“
김유린은 식탁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끝이다.
아. 한 명 남아있긴 하다. 근데 그 여자는······
"설마.“
타이밍 좋게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레스토랑의 문이 유달리 스산하게 열리고, 오늘의 주인공 아닌 주인공이 등장했다.
'엘리 폰 바토리'
뱀파이어의 여제였다.
"어억.“
그녀의 출현에 모두가 기겁했다. 바토리가 누군지 모르는 유세정 만이 고개를 갸우뚱할 뿐.
그러는 사이 바토리는 어느새 식탁에 도래해 유백송의 옆자리에 앉았다. 바싹 굳은 유백송은 이번에야 말로 백호가 아니라 새하얀 고양이가 된 듯하다.
"······뭘 자꾸 꼬라보니? 나도 길드원인데, 혹시 불만이라도?“
바토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지긋한 시선을 보내는 주지혁에게 쏘아붙였다. 주지혁은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식탁에 시선을 처박았다.
"자. 이렇게 굳어있지 마시고.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이니까, 즐깁시다.“
김세진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박수를 짝짝 쳤다. 즉시 많은 웨이터들이 나타나 음식과 주류를 내왔다. 산해진미, 진수성찬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최고급들 뿐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 상찬이 얼마나 대단하든지 간에 바토리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앞 접시에 에너지 바 두 개가 덩그러니 놓이기 전까지는.
"얘. 너 혹시 자살하는거야?“
바토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음식을 내온 웨이터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교육을 받은 웨이터이는 잽싸게 도망쳤다.
"야. 저 새끼 데려와."
살짝 화난 듯 목뼈를 우두둑 풀며 손을 까딱한다. 김세진은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러지 말고 한번 먹어봐.“
"내가 이딴걸 왜먹어!“
허나 진정은커녕 바토리는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고, 순간 모임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흠.“
김세진은 말 없이 식탁을 툭툭 두드렸다.
"한번 만 먹어봐. 와인 맛이라 거부감은 없을 거야.“
그러자 바토리가 몸을 흠칫 떨었다.
와인. 인간들이 매번 마시던, 그러나 그녀는 마시지 못했던 술. 고향에서는 특히 와인이 유명했다. 얼마나 맛있길래 와인이 마을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큼 비쌀까- 어린 마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더랬지.
"······.“
바토리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쪽을 빤히 관찰하던 길드원들이 그제서야 허겁지겁 식탁에 집중한다. 일부러 대화도 재잘재잘거린다. 그러면서도 바토리 쪽은 연신 힐끗힐끗 바라보는 것이, 그녀가 먹을지 말지 꽤나 궁금하긴 한 듯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렀을 때.
눈치를 살핀 바토리가 슬그머니 에너지 바를 집어들었다. 소리도 안 나게 마나를 이용해서 껍데기를 까고, 다시금 주변의 낌새를 살핀다.
다행히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
지금이다!
그녀는 에너지 바를 통째로 삼켰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전신을 활류하는 아릿한 포도의 잔향에 얼굴이 붉어지고, 척추가 전율한다.
문자 그대로 '취향저격'이었다.
"어흡······."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감탄사를 손으로 막는다. 천만다행이게도 주변사람은 관심이 없다.
······빌어먹을 딱 한 놈을 제외하고는
"흐흐."
능글맞게 웃는 김세진의 면상을, 바토리는 전심전력을 다해 깨부수고 싶었다. 부디 단 한번이라도.
< 48. 파도 (3) > 끝
ⓒ 지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