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1장】
분명히 차에 치였던 건 기억이 났다. 매일 지옥 같은 회사에서 일을 끝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초록 불로 변한 신호등을 보고 건넜던 건 확실했다.
졸음운전이었던 것일까? 아무 거리낌 없이 걷던 자신에게 흰색 소형차는 빨간 불이었음에도 멈추지 않았고 길을 건너던 자신을 그대로 치고 지나갔다. 차에 치이는 순간 정신을 잃은 강인이 다시 눈을 떠보니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정리할 새도 없이 이상하고도 처음 보는 기억들이 강인의 머릿속을 괴롭혔고 그러한 기억들에 단 하루도 제대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강인이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기억을 집어 넣어주듯 과도한 용량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 결국 두통으로 인해 매일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래도 고통 속에서 그래도 나름 가족들인지 사무엘 아스란과 라이아 아스란이 교회에 사제를 강인을 위해 불러오기까지 했으나 여전히 별 효용은 없었다.
그렇게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지 한 달여 서서히 잦아든 고통과 함께 이곳이 어떠한 세상이고 어떠한 말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강인이었다.
"꿈이 아니라니.."
처음엔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강인이었다. 정말 책에서만 봐왔던 그러한 곳에 자신이 들어왔다는 생각에 코웃음을 치며 꿈 한번 요란하게 꾸는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두통과 더불어 다시금 깨닫게 된 현실에 그 생각은 쉽게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곳이 완벽한 꿈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고 현실에 직시하게 되자 며칠 동안은 그저 멍하니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차분히 기다렸다가 머리가 또다시 아프다 보면 조금씩 루크의 기억이 흡수되어왔고 그럴 때마다 차츰 기억나는 루크의 과오들에 의해 강인은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했다.
망나니 그 자체, 심지어 질투의 화신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마나의 저주란 것에 걸려 마나를 몸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로서 검술로 유명한 공작가의 가문에 태어날 수 없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다. 그에 비해 자신의 누나인 레이니 아스란은 여자만 아니었다면 당연하게 공작가의 가문을 이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능력을 가진 여인이였다.
그녀는 사교계에서도 꽤 인기가 많을뿐더러 검술 능력까지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그에 비해 루크는 남자로서 태어나 연약한 몸을 가진 것과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평범보다 못한 그 아래의 남자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루크로서는 잘난 누나가 불만이었는지 점차 질투심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성격은 점점 더 삐뚤어져만 갔다. 결국 반항심에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들을 끼고 노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있던 나날에. 결국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루크에게 사무엘은 저택 밖으로 나가게 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루크로서 저택을 빠져나가는 건 언제나 손 쉬웠으니. 아니 어쩌면 루크가 나가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알다시피 아버지인 사무엘이 루크에게 대해 손을 놓은 것인지라 루크가 밖으로 나가는 걸 알면서도 잡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이번에도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몰래 빠져나와 도박장으로 간 루크는 금세 가진 돈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자 루크의 눈에 오늘따라 도박장에 있는 상대들의 모습이 아니꼽게 보였다. 술에 거하게 취해서 그런 것일까? 그들의 웃음소리가 자신을 무시하는듯싶다. 그러자 루크의 몸 안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분노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해버렸다. 도박장에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박장을 지키던 가드들이 나와 나름 공작가의 자제인 루크를 설득으로 제지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자신을 무시하는 거라 느낀 루크가 그 가녀린 손으로 가드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신참으로 들어온 한 가드가 참지 못하고 루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 뻗기 시작했다.
그대로 가드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루크는 세상이 핑 돌고 코피가 터진 것인지 뜨거운 느낌이 인중 근처에 느껴졌다. 뒤이어 가드들이 몸을 숨기며 루크를 들어 어디론가 던져버리고는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으나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서서히 루크의 정신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속이 메스꺼워 졌으며 넘어졌을 때 받았 던 뒷머리 부분에 뜨뜨 미지근한 핏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운 길거리에 쓰러져 서서히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만 의식을 되찾았을 때엔 강인이 그의 몸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자신을 치료하던 사제들은 안 그래도 연약한 몸이 술과 방탄한 생활에 빠져 몸이 더 약해진 상태로 뇌출혈을 겪었고 차가운 바닥에 오랜 시간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마나를 받지 못하는 병에 의해 신성력 조차 받지 못했는지라 모두가 하나같이 마음에 준비를 하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두가 루크가 죽을 거라 예상했건만 다행히도 루크는 깨어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영혼은 다른 사람이 차지했지만 말이다.
"이게 정말 책으로만 봤던 다시 태어난다는 건가? 물론 이렇게 망나니 새끼의 몸이지만...지금부터 바꿔가면 되잖아? 안 그래?"
거울 속 루크를 바라보며 강인이 말했다. 그러자 왜인지 모르게 차츰 눈가에 눈물이 맺혀갔다.
"하.. 좀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기회 주는 거지? 다시 빼앗아 가는 거 아니지? 낙장불입이야 알아? 지구에서 즐기지 못했던 여자들도 많이 만나고! 하고 싶은거 다 하고 그러고 살아도 되는거지? 그렇지?!"
강인은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듯 한 느낌으로 거울 속 루크를 보며 소리치자.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지고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옛 기억
지구에서의 생활은 강인으로선 너무나 힘들고 지옥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실험실에 가서 돈도 별로 받지 못하는 신약에 대해 공부 겸 소위 말하는 따까리 노릇하다가 저녁 늦게 되어서야 퇴근하는 것이 반복이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해 좋은 대학도 나오고 괜찮은 직업도 가졌건만 자신의 부모는 그새를 못 참고 돌아가셨다. 그렇다고 여자 한 번 제대로 사귀어봤나? 그렇지도 않았다. 매일 바쁜 일상 속에 쉬는 날은 그저 집에서 잠만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까지 연락이 끊기고 매일을 외로이 지내는 강인으로서 이 기회는 어쩌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천만금이나 될 정도에 기회라 생각했다.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막살 거야. 알아? 여자들도 첩으로 아주 수십명씩 두고! 돈도 흥청망청 써보고! 물론 너처럼은 아냐 이새끼야.."
강인은 왠지 자신을 보며 웃는 듯한 거울 속의 루크를 향해 소리쳤다. 괜스레 아니꼽게 느껴졌다.
"이제 넌 없어 내 몸이야 이제 내가 루크야 루크 아스란...내가 루크 아스란이라고"
어느세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외치는 루크로서는 괜스레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였을까? 누군가 루크의 방문을 두드렸다. 루크는 급히 누가 볼세라 눈물을 훔치고는 태연하게 연기하며 외쳤다.
"들어오세요."
루크의 말이 끝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레이니 아스란이였다. 루크와 같은 붉은색의 긴 머리칼과 하얀 피부와 오뚝한 코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 확실히 거울에서 본 루크의 얼굴과는 비슷했지만 좀 더 여성스러웠다. 그리고 꽤 미인이였다. 특히 몸매로는 정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커다란 골반을 가진 매력적인 미녀였으니 루크는 절로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아..누...나..하핫."
아직 누나란 단어가 어색한지 괜스레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루크의 기억이 조금씩 흡수되어간다 해도 단번에 누나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던 것이다.
"안에 있었구나."
"네. 무슨 일로?"
차가운 말투였다. 어떠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너무나 차가웠고 그의 눈안에는 여전히 루크를 향한 실망스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그렇기에 루크는 생각했다. 이렇게 차갑게 되어버린 레이니 역시 예전의 루크의 탓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자신의 누나를 보며 질투하고 막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누나로서 그녀는 얼마나 루크를 싫어했을까 싶다. 아주 어릴 땐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했던 기억이 어슴푸레 기억나느듯 했지만, 너무나 옛날이었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지금의 루크로서는 꼭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레이니가 강인으로 보기엔 너무나 아름답기도 하고 말이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니?"
그래도 피가 이어진 동생이 걱정되었던 것일까? 아님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떠밀림에 온 것일까? 자신이 깨어나고 근 한 달여가 지나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로서 루크는 어떤 게 진짜일지 고민되었다.
"네 많이 나아졌어요. 고마워요 누나."
"...뭐?"
고맙다는 말이 정말 익숙지 않은 것일까? 마지막에 고맙다는 말에 레이니가 잠시 움찔해 보인다. 안그래도 커다란 눈망울이 좀 더 커진 듯 싶다.
루크로서는 이때다 싶었다. 지금 아니면 더이상 레이니와의 관계가 진척이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단 둘이 있을때야 말로 지난 과오들을 사과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괜스레 자신이 아닌 남에 일에 대해 사과하려니 짜증이 솟구쳤지만 이제는 어떡하랴 이 몸이 강인에 것이 된 이상 자신이 떠 안고 가야 할 과오였으니
"죄송했습니다. 누나.."
"..."
"심한 말을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가문에 민폐를 끼친 일까지. 전부 다요. 사과하고 싶었는데 지금에서야 사과하게 되네요."
루크는 고개를 숙여보이면서 계속해서 사과를 하자 레이니로서는 너무나 뜻밖이었을까?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 큰 눈망울로 꾸벅꾸벅 루크를 쳐다만 볼 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