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회. 26 습격】
왠지 모르게 레이니도 그렇고 로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엘레니아의 눈치를 보는듯싶었다. 서열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매번 자신이 1순위라던 레이니의 모습은 이렇게 잔뜩 해명을 요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가장 먼저 나서는 게 엘레니아였고 레이니는 뒤로 빠져있었다. 그녀에게 은은하게 풍기는 포스가 있어서 일까? 엘레니아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레이니는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비해 로제스의 표정은 언제든 여유로웠다. 어차피 에이리스와 루크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로제스 역시 뒤늦게 루크에게 껴들었기도 하지만 로제스에게는 언제나 자신감이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루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루크 내가 확실히 2명에서 3명이 되건 4명이 되건 괜찮다고 했지만.. 다섯은 좀 많지 않을까요? 호호호 물론 내가 먼저 루크의 아이를 밴다면 1순위가 되겠지만, 이거 상단일이 아직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아 힘이 드는군요 어서빨리 루크가 다른 여인들을 더 얻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야 겠네? 호호"
로제스가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모두의 신경을 자극될 만한 말을 꺼내 보이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자 레이니와 안느란테 그리고 엘레니아까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심지어 에이리스까지 말이다. 이러한 모습이 로제스였다. 그녀는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루크를 이용해 도발해왔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있기에 엘레니아와 로제스가 더욱 로제스를 경계했다.
"후..루크!"
다시 엘레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루크를 부르자 루크가 황급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크가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어서 고맙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야!"
"그..그렇지요."
"하지만...이번만 넘어갈 거야. 어차피 이미 내가 손쓸 도리가 없이 관계가 이어진 것 같고 예전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을 들긴 했으니깐!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다면..알지?"
엘레니아의 몸에 살며시 마나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마치 펄펄 끓어오르는 물처럼 가득 끌어 올려진 마나는 하나의 검이 되어 루크의 목 언저리를 노리고 왔고 루크는 잔뜩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저..정말로 루크님과 에이리스님을 받아들이실 거에요 엘레니아님?"
안느란테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엘레니아에게 묻자 엘레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힝..."
"그리고 루크가 날 사랑한다는 건 이미 우리집에서 많이 느꼈거든.."
"네?"
안느란테가 의아함 섞인 목소리로 되묻자 엘레니아가 빙그레 웃어 보이며 자신의 배를 어루어만졌다. 그러자 모두의 눈빛이 착 가라앚으며 뒤이어 루크와 엘레니아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웠던 로제스의 눈도 어느샌가 차갑게 변해 냉랭해져 가자 루크가 당황 했다.
"누..누나...모두가 오해하잖아."
"오해라니? 호홋."
엘레니아는 대담하게 웃어보이며 루크의 몸을 손가락으로 훑어지나가다 천천히 분신을 확 움켜쥐었다.
"이걸로 밤새 날 재우지 않았잖아?"
"에..엘레니아님!"
엘레니아의 행동에 안느란테가 놀란 얼굴로 급히 엘레니아를 제지했다. 그러자 레이니와 로제스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기 시작했고 에이리스 역시 마찬가지로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안돼 나랑 있을 거야 알았지!"
레이니가 급히 안느란테와 엘레니아를 밀치며 다가왔고 에이리스도 급히 루크의 팔을 꽉 쥐어 보였다. 그런 레이니의 모습에 로제스가 급히 루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에 내가 갈게."
"안된다구!!"
레이니가 급히 로제스와 에이리스를 때어내며 말했으나 모두의 시선은 오직 루크에게 향해 있었다.
"이씨 안된다구!!"
그런 분위기 속에 다시 레이니가 소리쳤다
☆ ☆ ☆
황궁의 뒷 편에 자리잡은 곳, 깁숙히 땅을 파 거대하게 만들어진 황릉 안이었다. 그 안은 마법으로 빛나는 수정구들이 가득 천장에 박혀 동공을 비추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꽃들이 장식되어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동공 안 가운데엔 하나의 석관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관 앞엔 돌로 된 묘비가 있었는데 그 묘비 속엔 황제 제이서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제이서스.."
그 묘비 앞에 루미에르가 검은 옷을 입고 핏기가 없는 얼굴로 묘비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찌 그리고 쉽게 날 떠날 수가 있습니까? 그대가 이토록 원망스럽긴 처음이에요.."
간신히 눈물을 참으려 하던 루미에르 였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먹먹해져 왔고 시야도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다시 한번 루미에르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직 북방의 일이 해결되지 않아 대대적으로 국상을 치르진 않았으나 묘비와 능은 완성이 되어 황제를 안치해둔 것이었다. 그런 황릉에 루미에르는 매일 같이 이곳으로와 잠들어있는 제이서스에게 말을 걸곤 했다.
"오늘은 재상과 황자가 처음으로 같이 정무를 보았답니다. 물론 황자가 아직 어리고 소심해 재상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제이서스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답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 제이서스 우리 황자를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세요...그리고 당신의 딸이자 공주인 세이실도 많이 변했답니다. 그 어린 것이 나와 황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배우겠다고 합니다. 어찌나 의젓한지 참으로 대견스럽지요? 하지만 아직 그들은 너무 어리고 저 역시 많이 부족하답니다. 재상이 도와준다 했으나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군요..제이서스.. 당신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군요.."
어느세 루미에르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뚝뚝 덜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당신의 목소리가 그리운데.. 아직도 당신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어찌 그리 급하다고 먼저 가신 겁니까? 힘들고 두렵습니다. 당신의 온기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 당신의 목소리가 점차 잊혀진다는 것이..당신의 모습이 점차 지워지려 하는 것이..당신이 원망스러워 당장 당신에게 따지러 당신 곁으로 가고 싶어요...전 어떡해야 하는 거죠 제이서스? "
잠시간 이어진 침묵 루미에르의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커져 올랐으나 제이서스의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후...울지 말아야지 했는데 결국 또 눈물을 보였네요....당신을 진정으로 떠나 보내기 전까지 만이라도... 제가 울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제이서스. 국상은 북방이 해결되는 대로 즉시 할거에요...그때가 되면 당신을 진짜로 보내야겠지요....."
루미에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묘비에 잠깐의 입맞춤을 하며 릉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