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회. 27 루미에르】
"아...."
뒤이어 서서히 교황의 몸에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홀 안을 가득 채우는 빛은 점차 그 강도가 더해져 쥬디스의 시야가 먹먹해져 온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사그라드는 빛에 쥬디스가 간신히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그의 앞, 교황이 있어야 할 의자 위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허함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아...."
쥬디스의 눈에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이 쥬디스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때였다. 거대한 홀의 문이 열림 동시에 몇몇의 사제들과 함께 황급히 달려온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의 표정엔 다급함과 함께 걱정이 서려 있었다.
"쥬디스!! 아버지는!!"
"......"
여인의 물음에도 쥬디스가 말 없이 눈물만 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여인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 것인지 그녀의 하얀 턱선을 타고 눈물방울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사제들도 황급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여인은 고개를 저어 보이며 소리쳤다.
"아냐... 거짓말 그럴 순 없어!! 아버지!! 아버지!! 쥬디스 말해 아버지 어딨는 거야!"
"..."
여인의 닦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말없이 눈물만 보이는 쥬디스를 보며 그제서야 여인이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안돼.....아..."
☆ ☆ ☆
"황후님.."
"..."
검은색의 상복을 입고 있는 루미에르의 표정은 너무나 공허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허한 표정으로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자신의 남편인 제이서스가 죽고 뒤이어 자신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교황의 죽음이 전해져왔다. 그녀로서 모든 것이 무너진듯 한 느낌이 들어 온몸에 힘이 빠지는듯 싶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지크라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루미에르를 불러세웠으나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우중충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루미에르를 향해 지크라엘은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오자 곧 루미에르의 눈가에 다시 한 번 눈물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연이어 셀 수 없이 많은 눈물이 턱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여보.. 어째서.. 어째서!"
"어머니.."
한참을 오열하고 있던 차였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공주 세이실이천천히 다가와 루미에르를 끌어안아 주자 루미에르가 말없이 세이실의 품 안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루미에르의 모습을 처음 본 세이실도 어찌할 줄 몰라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이 그녀에겐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고맙구나.. 세이실.."
"아니에요 어머니.. 힘내세요."
"..그래.."
어느 정도의 안정을 되찾은 루미에르가 세이실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세이실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 닮은 세이실의 모습 도중 도중 제이서스의 얼굴 역시 보인다. 괜스레 루미에르의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듯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딸 앞에 연실 눈물만 보일 수 없는 어머니였기에 루미에르가 힘겹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마리에테님의 신물을 찾아야겠구나."
"...그건? 저번에.."
"기억하느냐? 아스란가의 아이가 말했던 것 말이다."
루미에르의 말에 세이실이 지난 황궁에서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었다. 자신의 방안에 몰래 숨어들어왔던 한 사람, 그 사람이 말 속에 파이시스와 마리에테님의 신물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나자 세이실이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억나요 분명 마리에테님의 신물을 이용해서 황궁으로 들어왔다고 했어요"
"그래... 일단 재상에게 알리고 아스란가로 가보고 싶구나."
"직접이요?"
세이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루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슬퍼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 이럴 때 잠시 슬픔을 잊을 일을 하고 싶구나.."
루미에르의 말에 세이실이 어느 정도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제가 어머니를 지켜주겠어요! 제 검 실력도 많이 늘었다구요!"
세이실이 일부로 밝게 보이며 가슴을 퉁퉁치며 소리치자 루미에르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머리칼을 한차례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주어서 고맙구나.."
"아니에요! 그러니 알겠죠!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래... 재상에게 말하고 내일이든 내일모레든 출발을 하자꾸나"
"네!"
☆ ☆ ☆
루이서스의 방, 그 크기는 꽤나 컸으나 아직 어린 루이서스 답게 수수하게 꾸며진 방안이었다. 고작 침대와 몇몇의 그림들만으로 장식된 방, 그 방 가운데 책상 위에 앉아있던 루이서스의 표정이 한 껏 찌푸려지자 그 옆에 서 있던 지크라엘의 표정이 절로 엄해져 갔다.
"재상.. 너무 어려워요.."
어린 황자 루이서스가 칭얼거리며 말하자 재상의 얼굴이 급격히 노성을 띄며 루이서스를 다그쳤다.
"황자전하! 지금 그렇게 어린 애처럼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걸요.."
루이서스가 무언가 변명을 하려 했으나 지크라엘의 노기 띈 얼굴에 루이서스가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아즈문의 역사와 함께 황제가 가져야 할 덕목에 관해 적힌 책으로서 어린 루이서스가 읽기에는 꽤나 난이도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제이서스가 죽고 루미에르도 연이은 좋지 않은 소식에 어서 빨리 황자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크라엘은 그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강제적으로 공부를 시켜야 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어린 황자와 같이 정무를 보기도 한 것 이고 말이다.
"자고로 황제란 하기 싫어도 국가를 위해서 황제만을 바라보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의 고통이 나중에 황자전하에게 피와 살이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어서 공부를 시작하시지요"
"후..."
지크라엘의 말에도 여전히 시무룩함을 유지하던 황자가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천천히 책을 펼쳐 보이자 그제서야 지크라엘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편으론 걱정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심성이 올곧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성이 있는 건 좋았으나 너무 자신감이 부족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지만, 남에게 기대려는 버릇까지 심해 지크라엘로서는 그에게 더욱 엄하게 대해야 했다. 그때였다. 이제 막 황자가 공부를 시작하려던 찰나 황자의 방에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곧 루미에르 황후와 세이실 공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크라엘은 갑작스런 루미에르의 방문에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