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회. 27 루미에르】
"이럴 수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 땅거미가 짙게 드리운 들판이었다. 부서진 마차 주위로 수십의 기사들과 루크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당황스러워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할 말을 잃은 상황에 루크 낮게 중얼거렸다.
"제롬... 분명 우리가 전해 들은 마차와.. 같은 마차야?"
"..."
제롬이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곧 긍정이란 말이 생각났다. 루크는 불안한 얼굴로 마차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고요하고 적막감이 흘렀다. 오직 아스란가에 사람들 말고는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레이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루크 옆에 서며 말했다.
"당장... 알려야 해 루크!"
"맞아요.. 제롬! 당장 병사들을 시켜 황궁에 알려요, 그리고 혹시나 무언가라도 발견할 수 있으니. 병사들을 풀어 주변을 수색하도록 해요"
"예!"
루크의 말에 제롬이 짧게 대답하고는 일사불란하게 기사들에게 명했다. 뒤이어 병사들은 제롬의 명령을 듣고 빠르게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무도 없던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내의 실루엣이 생겨나며 루크의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냐!"
제롬이 급히 검을 빼 들고 소리쳤다. 뒤이어 레이니 역시 검을 빼 들고 사내를 노려 보았고 안느란테의 활이 사내의 미간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러자 검은 실루엣의 사내가 양손을 들어 보이고는 천천히 루크에게 다가왔다.
"멈춰라!"
다시 제롬이 소리치자. 사내의 몸이 멈춰섰다.
"네 녀석은 누구냐?"
제롬의 목소리가 한없이 냉랭해졌다. 그의 복장은 아스란가와 황궁에서 많이 보았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색의 공허한 눈만을 들어낸 흑의인 이자 역시 분명 클루드의 하수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사내의 무거운 입이 천천히 열리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루미에르와 세이실 공주는 우리에게 있다. 그들을 찾고 싶다면 루크 아스란,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물과 함께 지금 이곳으로 혼자서 오너라"
감정이라고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 마치 기계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목소리 처럼 높낮이가 없었으나 그 의미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모두가 경악과 불만섞인 표정으로 그 사내를 바라 보았다.
"...."
당황한 루크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롬이 몸을 날렸다.
"지랄 하지마라!"
번뜩이는 검 뒤이어 레이니도 땅을 박차고 흑의 인을 향해 갔고 달빛을 받은 한줄기의 화살도 흑의인을 향해 나아갔다.
"루크는 절대 보낼 수 없어!"
레이니가 다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몸을 뒤로 날려 몸을 빼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지 않는다면 루미에르와 세이실은 몬스터들로부터 지옥을 맞보게 될 것이다. 평생 몬스터들의 어미가 될 것일지도 모르지"
"... 그런.."
어색한 흑의 인의 말이 끝나고 결국 모두의 신형이 멈춰 섰다. 한 나라의 황후와 공주가 몬스터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말은 그만큼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두 멈춰서며 의미없는 대치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오는지 말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흑의 인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 돼!"
제롬이 소리쳐 도망치려는 흑의 인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흑의 인에 신형은 완전히 투명해진 상태였다.
"잊지 마라! 3일 내로 이곳으로 와야 한다. 신물들을 가지고 혼자서 말이다."
그말을 끝으로 더는 흑의인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이어 모두의 시선이 루크에게 쏠리기 시작했으나 루크는 딱히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단장!"
뒤이어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뒤엔 꽤 심하게 다친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뒤이어 다른 병사의 말 뒤편에 이미 시체로 보이는 한 사내의 모습을 보이자 루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누구죠?"
루크의 물음에 제롬이 다가가 확인하며 말 했다.
"황궁의 제2 근위기사단 입니다. 로열나이트의 단장 레이슨과 부단장 라센인거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라센은 죽은 것 같은데.. 아직 레이슨의 숨은 붙어있습니다."
제롬의 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들을 데리고 아스란가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루크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병사들을 독촉했고 루크도 다시 말 위에 올라타려 했다. 그때 레이니가 루크를 붙잡으며 말했다.
"널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차가운 레이니의 목소리 마치 루크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하듯 콕 집어 말했다. 뒤이어 엘레니아와 안느란테의 표정도 레이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루크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말 위에 올라타 다시 아스란가로 방향을 틀었다.
아스란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미 너무나 늦은 시각 하늘 높이 솟아오른 달은 루크의 길을 밝혀주고 있었으나 루크의 표정은 꽤 심각한 상태였다. 루크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환하게 떠오른 달빛을 바라보자 괜스레 루미에르의 얼굴과 세이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을 괴롭힌다. '당신을 믿을게요' 루크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움직였고 기나긴 아스란가의 행렬은 적막감이 맴돌고 있었다.
☆ ☆ ☆
"보낼 수 없다."
라이아가 단호하게 일렀다. 그 옆에 로제스와 엘레니아 에이리스 그리고 레이니와 안느란테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반대하며 나섰다. 심지어 릴리와 세리스까지 모두가 나서며 말도 안 된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어머니.."
"그럴 수 없다. 네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이번에는 절대 너를 보낼 수 없어! 아무리 한 나라의 황후라 해도! 난 네가 가장 소중한 법이란다!"
"... 알겠어요... 그러니 모두 들어가 쉬세요."
루크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모두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두의 심각한 표정은 풀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루크는 그런 그들에게 자기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그들을 겨우 각자의 방으로 돌려 보냈으나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다. 모두가 루크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났다고 생각하는 방안 루크의 한숨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루크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루크는 곧 안느란테가 들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안느란테님.. 무슨 일이세요?"
"... 루크."
여전히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표정, 루크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정말 안 갈 거에요 그러니! 어서 들어가 쉬세요"
".. 난 알아."
안느란테의 눈에 떨림이 커져 왔다.루크는 그런 안느란테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하자 안느란테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날 속이려하지마... 그 누구도 엘프를 속일 수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