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회. 27 루미에르】
어느 때보다 더 고요하고 적막감이 흐르는 아스란가의 저택이었다. 루크가 행방불명이 되고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은 아스란가는 그 누구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흔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익숙하던 릴리와 세리스가 재잘 거리며 떠드는 소리까지 사라져 마치 폐건물이 아닌가 싶은 곳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러한 저택, 루크의 방이었다. 적막을 깨고 방의 한가운데 빛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한차례 방을 밝히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그 안엔 골렘인 아리스와 함께 두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빛이 완전히 지워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든 방, 이번엔 방 밖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발걸음은 곧 방문을 열어 젖혔고 곧 다급하게 숨을 헐떡이는 레이니를 비롯해 아스란가의 사람들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레이니가 방 한가운데 서있는 아리스를 보며 소리쳤다.
"루크는 어딨어요!"
아리스를 향해 달려든 레이니가 소리쳤다. 아리스는 잠시 레이니를 바라보다 자신의 양옆에 들려있는 루미에르와 세이실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처음 겪는 파이시스의 힘에 놀라 정신을 잃은 듯싶었다.
"그는 같이 오지 못했다."
묵묵히 침대 위에 루미에르와 세이실을 눕힌 아리스가 대답하자. 레이니의 눈이 심하게 떨려왔다.
"분명... 파이시스의 힘이었는데... 어째서?"
릴리가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아리스 릴리에게 다가가 파이시스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파이시스의 힘은 오직 두 명만이 텔레포트 할 수 있지, 루크는 날 시켜 저 두 명을 이곳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대신 그가 그곳에 남아있지."
"왜.. 왜 하필 루크가! 그렇다면 지금 루크는 어디 있는 거죠! 파이시스를 이용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지 않아요?"
레이니가 다시 다급하게 묻자 아리스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느껴지지 않는다. 파이시스를 이용해 빠져나오긴 했으나. 그곳에 좌표가 떠오르지 않아 이곳으로 온 이후로 아무리 파이시스를 이용해도 좌표가 어디인지 나오질 않아. 마법으로 그곳의 좌표를 지운듯하다. 그곳은 빠져나올 순 있으나 좌표가 없다면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곳 같군.."
무뚝뚝한 아리스의 말에 레이니가 아리스에게 다가서며 소리쳤다.
"왜!! 왜 그렇다면 루크를 버리고 온 거야!! 왜!!"
"...."
레이니가 눈물을 터트리며 소리쳤으나 아리스의 대답은 없었다. 아리스 역시도 씁쓸한 감정과 루크를 지키지 못한 분노에 찬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찾을..방법은 없는 건가요?"
라이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리스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로서는 뚫을 수 없다. 좌표만 안다면 파이시스의 힘으로 뚫을 순 있겠으나.. 좌표를 알 수가 없으니.. 무리다."
"왜...그럴 순 없어.!! 당신까지 온다면 루크는 진짜 혼자가 되는 거잖아...!!"
어느새 엘레니아 까지 다가와 소리치자 아리스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아리스는 씁쓸하게 한차례 사람들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어 보이자 로제스가 소리쳤다.
"어떻게 그를 혼자 올 수 있어요.다! 필요 없어! 황후든! 공주든!! 당신은 루크를 지켜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 그를 먼저 데려와야 하는거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 미안하다."
"미안하면 다야?!
로제스가 잔뜩 노기 띤 얼굴로 소리쳤으나 아리스는 그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미안해요.."
침대 위에 정신을 잃었던 루미에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루미에르에게 향했다.
"루미에르님.."
로제스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자신이 속해있는 제국의 황후에 앞에 대놓고 욕을 들어놓을 순 없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표정은 여전해 말대신 표정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미안해요. 지크라엘의 말대로 더 많은 병력으로 이동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너무 안일했어요."
"..당신 때문에.. 고작 ... 당신 때문에!"
어느새 레이니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며 루미에르에게 달려들려 하자 라이아가 급히 레이니의 손을 붙잡아 말렸다.
"레이니. 예의를 갖추거라..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이 나라의 황후시다."
"어머니! 그게 지금 하실 말이에요?! 그리고 왜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는 거죠?! 루크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
"레이니.."
안느란테가 화가나 소리치는 레이니를 제지하려 했으나 쉽사리 레이니의 화가 풀리지 않은 듯싶었다.
"그렇지요!!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직 루크를 인정하지 않은 거지요!! 언제나 말로만! 그를 사랑한다, 내 아들이다 해놓곤!!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죠 왜! 고작 저런 사람한테 예의를 갖춰야 하느냐고요!!! 옜날 루크에게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이렇게 태평하..."
차가운 짧은 소음이 레이니의 입을 막아내었다. 동시에 레이니의 얼굴이 홱 하니 옆으로 돌아갔고 라이아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낮게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죽을 만큼 아프단다.."
라이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레이니는 그런 라이아의 모습을 보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급히 방을 나서자. 그 뒤를 세리스가 따라나서자. 릴리도 세리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뒤이어 에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라이아의 팔을 잡아주자 라이아가 간신히 몸의 떨림을 멈추고 다시 루미에르 앞에 서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지금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서."
"아니에요 라이아 아스란.. 이해 합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지금 황궁이 난리가 났습니다. 공주님과 황후께서 행방불명이 되고 벌써 1주일이 넘게 시간이 지났답니다. 급히 황궁으로 편지를 한 통 보내겠습니다. 아마 금방 지크라엘님이 오실겁니다."
"예... 고마워요 "
루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로제스는 여전히 루미에르를 향한 분노가 풀리지 않았는지 더는 이곳에 있기 싫어 안느란테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에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루미에르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 하십니까?"
"아.. 메세츠데의 황후시군요."
"이미 잊은 호칭입니다.. 그저 에이리스라고 불러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예"
에이리스의 말에 루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혼란스러웠던 마차의 내부와 자신 역시 알지 못하는 처음 보는 동굴안 그리고 감옥 뿐이었기에 딱히 해줄 말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저 거대한 동굴이었다는 것만이.. 그 안엔 흑마법의 힘이 계속 느껴졌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몬스터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어요... 그것 외에는.."
힘겹게 무언가라도 기억해내려던 루미에르가 간신히 기억나는 몇몇의 기억을 말을 해주자. 에이리스는 그러한 곳에 루크가 혼자 있다는 것에 눈가에 순간 눈물이 차오르려 했고 숨이 턱턱 막혀오는 듯 싶었다. 엘레니아 역시 에이리스와 같은 생각인지 눈물이 멈추려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다시 한 번 루미에르가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해왔다.
"몰랐어요.. 루크와 헤어질 때... 그가 황궁에서 했던 저와의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해요 모두.."
루미에르도 눈가에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곧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아도 참으려 했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리자 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미안해요.."
다시 한 번 슬픔이 차오른 아스란 저택에 루미에르의 사죄의 목소리만이 계속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