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회. 28 잊혀진 기억】
"레이니 언니.."
겨울이라 그런지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정원이었다. 세리스와 릴리가 조심스럽게 혼자 멍하니 있는 레이니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세리스의 물음에 레이니가 잠시 세리스를 보다 말을 이었다.
"왜.. 아버지는 오시지 않는 걸까?"
"..."
레이니의 물음에 세리스 역시 아버지의 사정을 알지 못하니 잠시 말문이 막히자 릴리가 급히 말을 이었다.
"분명히 오고 싶을거에요! 하지만 아직 전쟁 중이잖아요.. 어쩔 수 없어서 늦어지는게 분명해요!"
"알아.. 그곳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겠지.. 하지만.. 아들이잖아..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인데.. 이러면 안되는걸 알지만.. 너무해."
레이니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혀 흐르자 더 어린나이인 세리스가 급히 레이니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이럴 때보면 세리스가 레이니 보다 더 어른 같아 보였다.
"괜찮을거야 언니!.. 오빠는 분명 괜찮을거야.."
"만약... 루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세리스? 난 어쩌면 좋은 걸까.. 윈랜드에서도 이랬어.. 난 그를 지켜주지 못했어.. 매번.. 난 왜 매번 무력한 거지 그리고 루크도 너무해.. 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거야!"
레이니의 외침에 세리스의 대답은 없었다. 그저 레이니가 속 시원하게 속에 쌓아두었던 말을 그저 들어줄 뿐이었다.
"왜 난 루크를 지킬 수 없는 거야.."
레이니의 자책 섞인 말에 세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루크에게 다시금 미운 감정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서야 슬슬 자신의 행동을 고쳐 먹으며 지난 과오를 바로 잡아가던 루크에게 기쁨을 느낀지 언제인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가족들의 속을 썩인다. 그것도 별 대책없이 막무가내로 말이다 세리스는 괜스레 불쌍하게 여겨지는 레이니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 안아주었다.
"오빠가 돌아오면 혼내주자.. 언니."
☆ ☆ ☆
커다란 고통이 복부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크의 입에서 진한 붉은색의 피가 한 움큼 토해져 나왔다.
"네 녀석은 끝까지 날 엿 먹이는 구나."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클루드가 잔뜩 노성 낀 목소리로 양팔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루크를 향해 소리쳤다.
"고작 너 같은 능력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쓰레기가 내 일을 방해하냐 말이야!! 내가 너 따위에게 이런 치욕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클루드의 손에 들린 채찍이 번뜩였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멍하게 할 정도로 울리다 곧 무언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루크의 벌거벗은 상체에 또 다른 기다란 생채기를 만들었다.
얼마나 맞은 것일까? 이미 상체는 가슴부터 시작해 배까지 피를 뿜어내는 기다란 상처와 도중도중 진하게 생겨난 피딱지가 몸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끄윽..."
다시금 느껴지는 고통에 더는 고통에 찬 비명조차 나오지 않은 것일까? 루크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가 그 고통을 대신해주는 듯했다. 클루드는 그런 루크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상했던 루크의 얼굴이 꽤나 초췌해져 있음에 클루드의 마음에 기쁨이 자리를 잡았다.
"그 잘난 혀를 나불거려 보시지!"
"끄....으. 퉷"
클루드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러자 루크의 입이 힘겹게 열리며 그 안에 진득한 피가 섞인 가래가 클루드의 얼굴을 강타했다.
"크...크크...."
뒤이어 고통에 찬 신음 같았으나. 곧 그 목소리는 신음이 아닌 웃음소리가 루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클루드가 벌게진 얼굴로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침을 대충 닦아내고는 다시 한 번 채찍을 길게 늘어뜨렸다.
"내 자비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다시금 들려오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입가엔 피가 멈추지 않았다. 혹여나 루크가 죽지는 않을까 생각이들 정도였으나 클루드의 분노로 가득 찬 채찍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수가 되어서야 루크가 정신을 잃었음을 깨달은 클루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채찍을 던져버리고는 소리쳤다.
"후우..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다. 네 스스로 죽여달라고 부탁하게 만들어 주마. 후우.."
가빠른 숨을 고르며 클루드가 중얼거렸고 곧 걸음을 돌려 감옥을 나서자. 감옥의 입구에 서 있는 레이먼드를 보이자 클루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
"할 말이라도 있는가?"
아무런 말 없이 클루드를 바라보는 레이먼드의 모습에 클루드가 짜증이 일었는지 신경질적으로 물어왔다. 그러자 서서히 레이먼드의 입술이 열렸다.
"저 아이를 잡았으나.. 결국, 실패를 한거나 다름이 없군. 그 스태프를 들고도 말이야."
레이먼드의 클루드의 품속에 있을 스태프를 가리키며 말하자 클루드의 미간이 꿈틀하며 이마에 작은 혈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있었다."
"이미 우린 아리스가 있음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너무 안일했어... 결국, 우리의 앞마당까지 와서 아즈문의 황후와 공주도 놓치고 신물도 놓쳐버린 거지. 클루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더이상 실패는 없다고 말이야."
레이먼드의 눈가에 짙은 살기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클루드의 숨이 점차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
레이먼드의 눈가에 붉은 안광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클루드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가기 시작했고 꽉 쥐었던 손아귀에도 힘이 풀리려 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잠시 눈을 감아 힘을 풀자 클루드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허억!! 미.. 미안하내.. 내 실수를 ... 후우... 후우 인정하겠네!! 후우.."
결국 자존심을 굽힌 클루드의 모습에 레이먼드는 무심히 클루드를 바라보다. 차츰 자신의 마나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다. 더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레이먼드가 무심히 발걸음을 돌려 클루드에게서 멀어져가자 클루드는 잠시 레이먼드를 바라보다 괜스레 주먹으로 벽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젠장!! 감히.. 이 나에게!! 이런 치욕을! 젠장!! 젠장!! 힘이 필요해!!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신물만 있었다면... 기다려라.. 레이먼드. 언제고 내 이날의 치욕을 되갚아 줄테니!! 젠장 루크 아스란 네 녀석만 아니었다면!!"
주체할수 없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클루드가 씩씩거리며 소리치다 다시 감옥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 풀리지 않은 화를 루크에게 풀 생각인듯싶었다. 그렇게 클루드가 사라지고 난 감옥의 입구 어둠밖에 없던 그 자리에 한 엘프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엘프는 잠시 레이먼드가 갔던 길과 클루드가 들어간 감옥을 보며 고민을 하다. 이내 다시 클루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