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회. 28 잊혀진 기억】
"제미 나이.. 꿈속에서 봤던 곳이 이곳이야?"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짙은 흑색의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양쪽 귀에 걸려있는 귀걸이를 향해 낮게 말을 하자 양 귀걸이에 빛이 발하더니 곧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날개가 달린 두 명의 요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요정은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인 옷과 머리칼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요정은 온통 푸른색으로 꾸며진 요정이었다. 그 두 명의 요정은 무엇이 기쁜지 한차례 여인의 주위를 돌아 보이고는 그 작은 날개를 열심히 움직여 여인의 얼굴 앞에 멈춰 섰다.
"응!! 응! 저기 저 동굴이야!"
"맞아!! 저기야 저기!"
제미와 나이 두 명의 요정이 동굴 입구를 가리키며 연실 방정맞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있던 흰색의 갑옷을 입은 사내가 여인에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 이곳이 맞다고 합니까?"
"맞는 것 같아요 쥬디스"
성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쥬디스를 향해 성녀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 쥬디스가 자신의 뒤쪽을 보며 작게 신호를 보이자 어느새 풀숲에서 여러 명의 성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쥬디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크리스티나를 향해 말했다.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쥬디스가 크리스티나를 향해 말하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뒤이어 두 명의 요정도 각각 크리스티나의 양 어깨에 자리했다.
"난 들어가기 싫은데."
그러자 푸른색의 옷을 입은 정령이 크리스티나에게 작게 중얼거리자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런 표정을 하며 물어왔다.
"왜?"
크리스타나의 물음에 푸른색의 옷을 입은 정령 나이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 안에 큰 어둠이 있어, 지금 이곳에서도 느껴지는 걸 끔찍해 무서워.."
그 작은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몸을 부들 떠는 나이의 모습에 크리스티나는 심각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괜스레 귀여움이 느껴지자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날려버렸다. 그러자 다른 쪽에 있던 요정 제미가 나이에게 일렀다.
"나이는 여전히 겁쟁이구나?"
"제미는 괜찮아?"
제미의 말에 나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제미가 그 작은 가슴을 퉁퉁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대단해 제미!"
"에헷!"
나이의 대답에 제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결국 크리스티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몇몇 성기사들의 시선이 크리스티나에게 향하자 크리스티나는 벌게진 얼굴로 괜스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제미가 지켜줄 테니. 들어가자 나이"
"응!"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티나는 성기사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 쥬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조용히 내 뒤를 밟아라. 그리고 성녀님을 최우선으로 지킨다"
성기사단의 단장인 쥬디스의 말에 성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정비를 끝냈고 곧 쥬디스가 먼저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 그 뒤를 성기사들과 크리스티나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게 이어진 동굴, 짙은 안개가 가득 동굴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연이어 안쪽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바람과 알수없는 비명이 한대 어우러져 전해오자 으스스한 느낌을 들기엔 충분한 동굴이었다. 쥬디스는 그러한 동굴을 보며 잔뜩 인상을 쓰며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자 그의 안에서 무언가 청량한 힘이 서서히 퍼져 오르기 시작했고 곧 쥬디스의 눈가에 푸른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멈춰라! 앞에 마법으로 된 진이 있다. 진에 현혹되지 말아라!"
☆ ☆ ☆
"이제 말할 기운조차 없나 보구나?"
클루드의 비릿한 목소리가 루크의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잔뜩 피를 흘리고 있는 루크에게선 어떠한 반응도 오지 않았다. 이미 온몸은 만신창이가 됨은 물론 뼈가 보일 정도로 꽤 위험해 보이는 상처들이 가득해 보인다. 게다가 온몸이 피 칠갑이 되어있는 상태로 살아있다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기절하고 깨어나길 수차례 다시 정신을 되찾는다 해도 지친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혹여나 죽을 위기까지 다가올 때마다 클루드는 아귀의 스태프를 이용해 다시 루크에게 생명력을 강제로 채워 넣어 어떻게든 죽지 않게 만들었다.
"크흐흐 죽고 싶겠지.. 하지만 약속하지 않았더냐 넌 절대 죽이지 않겠다고 내 이 분노가 다 지워지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한 자비는 없을 것이다"
루크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그러곤 눈가에 한 두방울씩 눈물로 보이는 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날 방해했으면 안 되었다.. 네까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하찮은 녀석이 감히 우리의 위대한 계획을 방해하는 것 자체가 너에겐 큰 실수였다. 자업자득이니라."
클루드의 입술이 귀까지 찢어지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이어 클루드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루크를 향하자. 스태프 주변이 일렁이는 감이 생겨나더니 곧 루크를 향해 무언의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몸에 스태프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강제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스태프의 힘은 곧 루크의 몸에 봇물이 터지듯 스며들기 시작했다.
"끄으으.."
다시금 찾아다는 고통, 억지로 집어넣는 마나에 의해 혹여나 가장 아프다는 작열 통을 겪는 것처럼 루크의 몸에 고통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루크로서 어이가 없는 건 고통이 지나간 뒤에는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아이러니에 루크는 정신을 잃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고 쇼크사로 죽었으면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였다. 언제부턴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시금 루크에게 찾아들어 뇌 속을 울리곤 했다.
'...아르문 포기하고 날 받아들여.'
'..'
'왜 그러는 거야 아르문 날 잊은 거야 벌써? 어서 날 받아들여 그럼 편해질 수 있어.'
여성으로 느껴지는 의문의 목소리가 루크의 귓가에 들려왔다. 혹여나 클루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우린 평생 함께하기로 했잖아. 어서 날 기억해줘..'
'난..'
'그래!! 어서.'
'나는..'
'생각해.. 그리고 기억해!'
'난..'
'어서!!'
'라르문이 아니야..'
'아니 넌 라르문이 맞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어.'
자신을 자꾸 라르문이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에도 루크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라르문이 아니라 외쳤으나. 더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이제는 혹 자신이 루크 아스란이 맞는 것일지 혹은 이 몸속을 강제로 차지한 지구에 살던 이강인이 맞는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