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회. 28 잊혀진 기억】
쥬디스의 목소리에 곧 100여 명의 성기사들은 사제들과 성녀를 주위로 빙 둘러쌓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술 훈련이 잘되어있는지 그들은 단 몇 초 만에 훌륭한 원형진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었다.
"조심하십시오! 성녀님! 몬스터들입니다."
"알고 있어요!"
쥬디스의 목소리에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기도문을 외울 준비를 끝 맞췄다.
"긴장하지 마라 평소처럼 상대해 나가면 된다."
"네!"
쥬디스의 목소리에 성기사단이 대답했다. 뒤이어 동공에 나 있는 여러 갈래 길에서 진득한 악취와 함께 시끄러운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쥬디스는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와 악취의 근원을 생각하며 손에 쥔 장검을 더욱 거세게 쥐어 보였다. 뒤이어 크리스티나의 기도문이 시작되었고 크리스티나의 주위로 황금색의 빛이 퍼져 오르기 시작했다.
"죽여라!"
쥬디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성기사들은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들어 어느새 자신들을 둘러쌓고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칼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조심하세요!"
뒤이어 크리스티나에게서 또 다른 기도문이 읊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푸른색의 힘이 모든 성기사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하자. 성기사들의 몸이 한결 가벼워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이 몸속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쥬디스가 기다란 장검을 들어 흉측하게 생긴 몬스터의 머리를 잘라내며 소리쳤다. 그의 검엔 흰색의 신성력이 맺혀 흐르고 있었고 다른 성기사들 역시 그와 비슷하게 무기에 신성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굼떠 보였고 그 질긴 가죽도 검에 쉽게 배어나갔다.
"진을 유지해라 앞으로 부상입은 적에 현혹되지 말고 방패를 들어 진을 먼저 유지하며 싸워라!"
"네!"
기사의 검에 베여 몸을 빼내려는 몬스터들을 향해 몇몇의 성기사들이 달려나가려 하자 쥬디스가 소리쳤다. 괜스레 한두 명이 진을 이탈했다가 진이 무너지면 그것만큼 최악은 없었기에 쥬디스는 노련하게 성기사들을 보며 진을 유지해 나갔고 성기사들 역시 금세 원형진을 복구하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시 성녀 크리스티나로부터 거대한 신성력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고 마흐무드의 성기사단은 손쉽게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 ☆ ☆
'라르문.. 기억해?'
오늘따라 의문의 목소리가 꽤 길게 이어졌다.
'..'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약속들'
'..'
'난 잊지 않았어. 몇천 년 동안 오직 네 생각을 하며 버텼어.'
여인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나왔다. 무엇이 그리 슬픈 것일까? 괜스레 루크의 마음도 짙은 슬픔이 차오른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
'다신 그때처럼 쓸쓸히 널 보내지 않을게 우리를 갈라놓은 자들을 모두다 죽여버릴 거야.. 그러니.. 어서 날 기억해줘.'
무엇에 의한 슬픔이고 무엇에 의한 분노인지도 모르는 루크로서는 그녀의 말 속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감정이 쉽게 공유가 되어 루크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난.. 루크 아스란이야.'
'그렇지 않아!'
'난.'
루크가 힘겹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난 네가 누군지 몰라.'
'그렇지 않아!! 넌 날 알아야 해!! 난 오직 너만을 기다렸다고!! 혼자서!! 몇천 년간!!! 그리고 결국 넌 이곳에 왔어!!'
'...넌 어디에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 우린 곧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깐! 아주 가까워 난 곧 깨어날 거야 그러니 어서 날 기억해줘... 그때 처럼 사랑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봐줘.'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
루크의 목소리에 여인의 목소리가 뚝 하니 그쳤다. 그럼에도 루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
'내 지난 기억을 너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만... 난 분명..'
'가능해!! 날 받아들여!! 우린 다시 서로 이어질 거야! 그럼 충분해!'
다시 여인이 소리쳤다. 루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고민을 했다. 그러나 몸 가득 흐르는 피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정신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빙빙 돌고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는 몸에 루크의 목소리가 간신히 이어졌다.
'좋아... 느껴봐... 난... 라르문이 아니니깐..'
'받아들이는 거야? 날..'
'그래..'
떨림이 가득한 의문의 목소리 루크는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곧 죽을 것 같았기에. 자신의 머리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뒤이어 루크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뒤죽박죽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이어 심장의 고동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고 온몸에 가득 차있던 마계의 힘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루크를 덮쳐갔다. 마치 온몸이 바스러지듯 루크는 더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던 몸이 몸부림 칠 정도로 커다란 고통이었다.
"끄아윽!!"
그럼에도 루크의 머릿속엔 수많은 기억들과 감정들이 교차하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 분노, 슬픔, 등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루크를 덮쳐 갔고 그녀가 겪었던 모든 아픔 역시 루크를 괴롭혔다. 그러길 얼마간 뒤이어 루크의 기억 속에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 루크 역시 그녀를 보며 미소를 흘렸다. 짙은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하얀 피부 커다란 눈망울은 너무나 매혹적임은 물론 엘프의 눈처럼 그녀의 앞에 거짓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을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뒤이어 보이는 그녀의 붉은 입술은 마치 앵두 같았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고요한 달빛 마냥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라르문..'
루크를 향해 말했다. 아니 자신과 똑 닮은 사람을 향해 루크는 고개를 갸웃해하며 입을 열려했으나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무언가에 갇혀있는 듯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와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듯 했다.
'사랑해.. 루시.'
'저도 사랑해요..'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고 초라한 한 채의 집. 루크의 영혼이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들려오는 삐걱대는 침대 소리, 그녀의 아름다운 신음소리와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서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며 나누는 정사의 모습 속에 루크의 마음도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져 왔다. 다시금 헐떡이는 둘의 모습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만나 하나가 되었고 곧장 서로는 하나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 이어진 허리 놀림 속에 절정에 다다른 그녀는 기쁜 듯이 신음을 토해내며 라르문의 양분을 한가득 받아들여 갔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