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167화 (167/412)

【167회. 28 잊혀진 기억】

"더는 의식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에요!"

성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레이먼드는 짜증이 확 일기 시작했다. 얼마나 이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고대하고 또 고대했던가 수많은 제물들을 갈아 넣어 이제서야 마신을 깨울 적당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건만 하필 오늘, 마흐무드에서 이곳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녀의 양옆에 빛을 발하며 가증스런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요정들을 보자 레이먼드는 어째서 마흐무드가 이곳을 알게 된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마리에테.. 망할 년이.. 결국 우릴 또 방해하는구나... .망할 자식들 클루드는 무얼 하는 것이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레이먼드가 잔뜩 노성을 띄며 소리치자. 다른 길목에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클루드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먼드와는 다르게 무엇이 그리 여유로운지 한껏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레이먼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클루드!! 왜 저들을 막아내지 않은거지! 설마 배신을 하겠다는 것이냐?"

레이먼드의 일갈에 클루드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레이먼드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말이야. 왜 내가 너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더군"

"뭣이?"

"그놈의 신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고 과연 깨어난다고 해서 그 다음은? 확실한 계획이 있나? 그저 깨어나면 뭐든지 다 해결이 되는 것인가? 너는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어. 그저 내 하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명령하기에 바빴지..."

클루드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한차례 지나갔다. 레이먼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당장에라도 클루드를 향해 마법을 보내고 싶었으나 여전히 제단을 향해 마나를 보내고 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의식을 이곳에서 끊어버린다면 불안전한 제단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곧 이다! 곧! 조금만 지나면 모든 형제들에게 힘을 줄 그녀가 깨어난다! 복수의 여신이 깨어날 거란 말이야!"

클루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단으로 향했다. 뒤이어 쥬디스와 성녀의 시선도 제단으로 향했다. 제단의 주위엔 온통 피의 웅덩이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피의 웅덩이는 레이먼드의 마나를 따라 천천히 제단을 향해 스며들고 있었다.

"당장 멈춰야 해요!"

제단을 보며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불안한 느낌을 받은 성녀가 소리쳤다. 뒤이어 쥬디스를 비롯해 다른 성기사들이 자신의 검과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서자 곧 수많은 흑의인들이 성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레이먼드... 여기까지야 큭큭."

클루드가 웃어 보이며 낮게 일렀다.

"무슨.."

"마신을 깨우는 대신... 내가 마신이 되는 거다."

"설마... 스완!"

무언가를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레이먼드가 급히 스완을 외쳤다. 그러자 클루드의 그림자가 꿈틀하더니 곧 검은 실루엣이 클루드의 등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클루드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한 듯 이미 준비한 아귀의 스태프를 꺼내 보이며 스완의 검날을 막아내었다.

"고작 엘프 따위가."

클루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서서히 스태프의 마나를 더하자 강대한 마나가 일렁이더니 곧 거대한 동공을 가득 채워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레이먼드와 스완은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압박해오는 힘에 순간 신형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성기사들과 성녀 역시 갑작스레 동공안을 채우는 거대한 마나의 흐름에 급히 기도문을 외워 빛의 장막을 만들어내기에 급급했다.

"큭큭큭 레이먼드 네가 준 스태프다. 아귀의 스태프.. 아주 마음에 드는 힘이지. 과연 이 스태프가 네 힘을 비롯해 이 제단의 힘까지 흡수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려나? 하핫"

"미..미친 자식....배신을.."

"큭큭 아무렴! 마신을 깨우든! 내가 마신이 되든! 그 무슨 상관이겠느냐?"

"너 따위 하찮은 인간 따위가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냐?"

"해보면 알겠지"

클루드의 스태프가 더욱 빛을 바라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이먼드의 힘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음은 물론 제단으로 향하던 피의 웅덩이는 서서히 아귀의 스태프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스태프로 흡수한 너의 힘을 내가 잘 사용하겠다. 큭큭 네놈의 눈빛 마음에 드는구나!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왔는지!"

클루드를 향해 분노에 찬 눈빛을 내뿜는 레이먼드를 보며 클루드가 굉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그렇게 쉽게 두진 않겠다."

레이먼드는 어쩔 수 없이 제단으로 향하던 마나의 공급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러곤 품속에 있던 의식용 검을 빼 들었다.

"고작 그딴 검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큭큭 일어나지도 못하는 몸으로 휘두르려 하는가?"

클루드의 물음에 레이먼드가 짧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의식을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

"... 뭐?"

레이먼드는 낮게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클루드는 놀란 얼굴로 스태프를 레이먼드 가까이 들어 더욱 마나를 주입했으나 레이먼드가 조금 더 빠른 듯싶었다. 레이먼드의 손에 들린 작은 소도는 곧 레이먼드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잔 기침을 하자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흘러나오더니 곧 레이먼드의 몸에서 짙은 핏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 자신의 피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냐! 자살할 속셈이군!"

레이먼드에게서 터져 나온 거대한 핏빛의 구는 한대 어우러져 곧장 제단으로 향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큭큭.. 이젠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네 녀석의 방해로 어느 정도는 힘을 잃었으나 그녀를 강제로 깨울 것이다. 너 역시 반쪽짜리 힘이 되겠지!"

"네놈!"

클루드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레이먼드의 신형은 곧 힘을 잃어 그대로 땅바닥으로 쓰러져갈 뿐이었다. 한편 성녀는 급히 쥬디스를 향해 제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쥬디스!! 의식이 완성되지 못하게 해야 해요!! 어서 저것을!"

"알겠습니다!"

점차 제단 위에 올려져 있는 붕대를 칭칭 감은 시체에게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급히 외친 성녀를 보며 쥬디스가 급히 자신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힘을 내뿜고 있는 아귀의 스태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제기랄!"

쥬디스가 욕지거리를 토해 냈다. 그러자 쥬디스의 몸 안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쥬디스의 온몸에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 라이브라에요! 교황님이 전해 주신 힘.."

서서히 빛이 서리기 시작한 쥬디스의 몸을 보며 성녀가 기쁜듯이 소리쳤다. 교황이 서거하기 전, 자신에게 주었던 제미나이와 그리고 또 하나의 신물인 천칭과 심판의 힘 라이브라였다. 쥬디스는 갑작스레 피어오르는 힘에 놀라 할 새도 없이 급히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한편 클루드는 제단 위에 모여드는 거대한 힘과 함께 또 다른 쪽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에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필.. 이때 또 신물의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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