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회. 전쟁 1시간 전】
단상 위에 올라간 데미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얘기를 하고 있으나 병사들에겐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은 커져갔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며 라우엘님을 찾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들 역시 그들의 어깨에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병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조그맣게 내리던 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바람은 크게 안 불어 추위는 잘 모르겠다. 이내 병사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자 아까보다 토를 하는 전우들이 늘어났다.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자신 역시 몇 번이나 토를 했는지 몰랐다. 토를 하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더이상 도망칠 시간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왜 윈랜드에 지원했는지부터 시작해 모든 것들이 후회되었다. 그 호기롭던 자신의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내림에 병사의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래도 한편으로 자랑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자신의 전우들과 이곳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이러니라 하는 것인가 병사는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 이러고 상념에 빠져 있는 것보다 지금 당장 자신의 손에 들린 무기를 마른 천으로 닦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마른 천으로 자신의 무기를 몇 번이나 닦아내도 이 두려움이 떨쳐지지 않았다. 이 무거운 분위기는 자꾸만 가슴을 짓눌러 물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다른 이들도 그런 것인가? 어느 한 병사가 연실 물을 먹으면서도 토해내고 다시 또 마시면서도 토해내길 반복했다. 그러다 이내 먹는 걸 포기한다. 모든 병사들이 그러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몬스터들의 포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뒤이어 메세츠데 적들의 발걸음 소리도 가까워져 갔다. 긴장감과 공포심이란 악마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 같게 느껴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30분 전
그들의 포효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저번처럼 칼로 베어도 비명소리조차 없을 것이다. 마치 인형처럼 그러할 것이다. 오직 목을 베어야지만 그 움직임을 멈출 것임이 분명했다.
처음 그들을 봤을 때 얼마나 무섭던가. 차라리 비명을 토해내거나 자신의 검에 겁이라도 집어먹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그러지 않아 오히려 자신이 상대를 죽이고 있음에도 무섭고 겁이 드는 건 자신이었다. 아무리 팔을 베어도 다리를 베어도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들거나 팔이 없으면 이빨이라도 사용해 자신들을 죽이러 온다. 마치 좀비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들을 배어나면 또 다른 이가 그렇게 달려들었고 또 그들을 베어 버리면 또 몰려오길 반복한다. 여기까지 살아남으면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 손으로 셀 수가 없었다. 마치 살육의 기계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론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참으로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베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감정이 없는 그들을 베는 것에 적어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의 마음속은 이리도 편치 않은 것일까? 왜 비명이라도 토해내길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오늘 마흐무드의 온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더욱 충원되었고 라우엘을 믿는 병사들을 위해 기도문을 읊어 주었다. 거의 모든 병사들이 그 사제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 같았다. 무엇을 빌었을까? 자신과 같은 것을 빌었을까? 제발 나만이라도 살아남게 해달라고 했을까? 날 지켜달라고? 나만이라도 살아남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반쯤 삶을 포기했으니 아마 온전한 시체라도 자신의 고향으로 갈 수 있길 빌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말이다.
이내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이 나라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야 하는지 억울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괜스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곳곳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기사도 용병도 직급이 낮은 병사도 사제도 성기사도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들 역시 인간이었다.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한번 사제님을 찾아 잠깐의 기도문을 읊어 주었지만, 그 사제님도 기도문을 읊으면서도 잔뜩 긴장했는지 몸을 떨었다. 그래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준비하라!"
데미아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상념에 차 있는 병사들이 한둘씩 깨어났다. 그들의 눈에 투기가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즈문을 위하여!!"
"위하여!!"
두려움을 이겨 내려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이렇게 해서라도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외치고 또 외치리라, 입은 아즈문을 위해서였지만 마음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내 가족들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 나와 함께 있는 전우를 위해서 외치고 또 외칠 뿐이었다. 하늘도 병사들의 외침을 들은 것일까? 천둥이 내려친다. 눈에서 이제 비로 바뀌기 시작했다. 주변 온도가 차츰 내려가며 몸이 절로 떨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가 된 듯했다.
"대포를 쏴라!"
데미아스의 목소리에 이내 루크 아스란이란 자가 만든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굉음과 함께 불꽃을 내뿜으며 커다란 쇠 구가 적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이내 그 쇠 구는 그들의 진영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게 했다. 그 폭발은 지축을 요동치게 했고 하늘을 울게 했다. 뒤이어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계속해서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방벽 위, 한 병사가 소리쳤다.
"와이번이 다가옵니다!!"
다급한 병사의 말에 데미아스가 다시 소리쳤다.
"발리스타를 준비하라!"
이내 발리스타도 그 거대한 시위를 놓자 사람 몸만 한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귀를 째지게 하자 포효를 토해내는 와이번에게 나아갔다.
"쉬지 말고 포격하라!"
지크문드가 다그쳤다. 발리스타 병과 새로 전과하게 된 포병들이 이내 움직임이 빨라졌다. 뒤이어 몇 마리에 와이번들이 하늘을 가득 채운 화살의 비를 뚫고 방벽을 공격했다. 뒤이어 마법사들의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마법이 어두운 하늘을 밝혔고 궁수들의 화살도 연속해서 시위를 놓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공성 탑을 공격하라!! 방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데미아스가 소리쳤다.
"저 트롤들을 먼저 공격해! 불꽃 계열 마법으로 재생하지 못하게 하라!"
불꽃의 구를 소환해낸 지크문드가 소리쳤다.
"방패 병들은 발리스타와 대포를 먼저 지켜라!"
사무엘이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전장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적들이 가까이 다가온 듯하다. 방벽 위 데미아스와 지크문드의 말투에 다급함이 느껴졌고 이내 하늘을 뒤덮던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지상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거대한 방벽의 철문이 연실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서 있는 나서스와 마레즈 그리고 로열 나이트의 제이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모든 병사들도 자신의 무기를 꼬나쥐기 시작했다.
"준비하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오줌을 지린 것 같았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저 성문이 열리지 않길 빌었다. 주변 여기저기서 대장들의 다급한 외침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거대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병사는 이내 라우엘에게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저 성문이 열리지 않기를 오늘도 이대로 그냥 적들이 물러나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엔 라우엘께서 우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냈다. 동시에 두 개의 철문이 힘없이 쓰러졌다. 연이어 그 문 사이로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서스가 소리쳤다.
"준비하라!!"
여전히 감정이라고 보이지 않은 병사들 그 옆에 흉측한 얼굴로 포효를 토해내며 비릿한 웃음과 썩은 향기를 내뿜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창과 검 그리고 방패를 손에 꼭 꼬나 쥐었다. 너무 거세게 쥔 것일까? 손바닥에 물기로 흥건하다. 이것이 피인지 땀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을 향해 흉측한 이빨을 들이밀며 달려오는 적들이 보인다.
병사는 손에 꼬나 쥔 검을 들어 이내 있는 힘껏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