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회. 발발하다】
한편 기마대로 인해 진이 붕괴 되어 혼전이 일기 시작한 윈랜드 방벽 아래였다. 고군분투하는 병사들 사이 한 사내가 병사들 앞에 나서며 말을 탄 기병들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배신자! 당신에게 당했던 황실에서의 치욕 이곳에서 씻어내 주겠소!."
기병들을 가로막은 사내 제이슨이 자신의 앞에 말을 타고 있는 자이로스를 향해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말을 탄 상태로 윈랜드의 병사들을 도륙해 나가던 자이로스가 눈짓으로 주변의 기병들을 물려 다른 곳을 치게 하고는 제이슨의 앞에 섰다.
"오늘 꼭 당신을 죽여 돌아가신 폐하의 묘에 당신의 뼛가루를 뿌릴 것이오!"
분노로 가득 찬 제이슨의 목소리가 자이로스에게 닿자 자이로스는 그저 비릿한 미소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타고 있던 말의 배를 걷어차며 제이슨을 향해 나아갔다. 그럼에 제이슨이 급히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금색의 마나를 온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자이로스가 제이슨의 코앞에 마주했다. 제이슨이 강하게 꼬나 쥔 검이 길게 가로로 베어졌다. 동시에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토해내는 자이로스의 말이 땅을 뒹굴며 제이슨을 지나쳤다.
제이슨이 진창을 뒹구는 말의 사체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곳엔 자이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자이로스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어딜 보는가?"
뒤이어 하늘 높이 떠올랐던 자이로스가 제이슨을 향해 검을 휘둘러내자 제이슨이 급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치며 작은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큭큭, 그동안 훈련을 꽤 열심히 했나 보구나? 예전에 없던 힘이 검에 실려있어.."
"닥쳐라! 기사의 명예도 모르고 데스나이트가 된 악귀여! 너는 그 갑옷을 입고 있을 자격이 없다!"
제이슨이 자이로스가 여전히 입고 있는 황금색의 갑옷을 보며 소리쳤다. 예로부터 아즈문의 제1 근위기사단의 단장만이 입을 수 있는 황금 사자의 갑옷은 황제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은 갑옷이었다. 오직 황제만이 단 한 명의 근위기사를 인정하며 직접 하사해야만 받을 수 있는 갑옷으로 아즈문의 기사라면 누구라도 탐낼만한 갑옷이었고 가장 명예로운 갑옷이기도 했다. 그런 갑옷을 아직도 착용하고 있는 자이로스가 못마땅한 제이슨이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뒤이어 검에 힘을 주어 휘두르자 서로가 뒤로 밀려 났다.
"이 갑옷은, 내가 내 실력으로 집적 제이서스에게 얻어낸 갑옷이다."
"쓰레기 같은 녀석 네 그 더러운 입에 황제 폐하의 이름을 거론하지 마라!"
"이미 죽고 흙이 된 한낱 인간 따위일 뿐 아니더냐?"
"닥치라 했다! 자이로스! 명예도 모른 추한 기사여! 내 꼭 오늘 너를 죽이고 말 테다!"
다시 제이슨이 땅을 박차고 자이로스에게 뛰어들었다. 뒤이어 이어진 수많은 공방전 자이로스는 여유롭게 제이슨의 검을 막아낸다. 그러면서도 제이슨이 빈틈이 생길 때마다 그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가자 제이슨의 몸에 기다란 혈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갑옷을 벗으란 말이다!!"
"원한다면 네가 직접 날 이기고 빼앗아 가거라 제이슨!."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네 갑옷을 빼앗아 돌아가신 황제 폐하의 묘 앞에 네 뼛가루와 함께 불태워 주겠다!"
다시 한번 제이슨의 검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이내 자이로스를 향해 내려치려 할 때였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제이슨의 그림자에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두 개의 곡도가 제이슨의 심장을 향해 노려오자 제이슨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겁한!"
제이슨이 소리치며 급히 몸을 옆으로 날린다. 간신히 두 개의 곡도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으나 결국 진창이 된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이로스의 흙빛으로 빛나는 검이 넘어진 제이슨을 향해 쇄도해왔다.
제이슨의 얼굴에 짙은 패색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이로스의 검을 막아내기가 용이치 않아 보였다.
"전장은 홀로 싸우는 곳이 아니다 제이슨!"
자이로스의 비릿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빗물을 가르고 제이슨에게 향한다. 제이슨이 어떻게든 검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은 듯하다. 연이어 너무 안일했던 자신에게 짙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죽어라!"
서서히 가까워지는 자이로스의 검에 제이슨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할 때였다. 제이슨의 머리 앞에서 갑작스레 멈춰 선 자이로스의 검과 뒤이어 들려오는 파공음 제이슨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제이슨의 뒤에서 하얀빛이 폭사 되기 시작했고 자이로스가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괜찮습니까? 제이슨님?"
"아.. 마레즈님.."
흰색의 갑옷이 검붉은 피로 얼룩진 성기사단의 부단장 마레즈가 제이슨의 앞에 서서 자이로스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내 자이로스가 인상을 구겼다. 아무래도 자신의 힘과 상극이 된 마레즈가 꽤 불편한 듯 보였다.
"하찮은 성기사 따위가.."
"하찮은지 아닌지는 직접 붙어봐야 아는 법이지"
비릿하게 웃으며 자이로스의 말에 반박한 마레즈를 보며 자이로스가 스완에게 눈짓하자 스완이 다시금 그림자로 변해 마레즈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마레즈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동시에 몸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신성력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마레즈의 몸이 빛을 내 뿜기 시작하며 그의 주변에 모든 그림자가 지워졌고 이내 빛이 사그라들 무렵에는 스완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눈속임에 불과한 그림자놀이 따위, 라우엘님의 빛 앞에 무용지물일 뿐이오!"
그런 스완의 모습에 자이로스가 혀를 차며 이번엔 직접 몸을 날려 마레즈에게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엔 제이슨이 자이로스의 검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당신의 상대는 나요! 자이로스!"
☆ ☆ ☆
전쟁 시작 3시간 경과
땅 아래는 전부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마치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땅을 가득 채운 시체들과 빗물로 웅덩이진 바닥은 피로 인해 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이러한 지옥도는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만들어졌다. 고작 3시간여 만에 이렇다 한 방어도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 윈랜드는 시체로 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산을 이룬 시체는 연실 내리는 폭우에도 그 핏물은 씻겨 내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병사들의 몸에도 그 피 냄새가 가득 배 씻겨 내리질 않는다. 씻길만하면 다시 피를 뒤짚어 쓰며 시체의 산에 한 구를 추가하길 반복해 이 지독한 피 냄새에 정신이 어질할 정도였다.
그러한 곳에서 윈랜드의 병사들이 한둘씩 몸도 마음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이 눈에띠게 굼떠졌음은 물론 손에 들린 무기에 힘이 실리지 않아 검의 무게에 몸이 휘청인다. 그에 비해 메세츠데의 병사들은 여전히 지치지 않은 것인지 처음과 달리 변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온몸이 베여도 아파하는 기색 없이 계속해서 윈랜드의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윈랜드의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데려가려 했다. 그래서일까? 시체의 산은 점차 윈랜드의 병사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웅덩이진 핏물들도 거진 윈랜드의 병사들의 눈물과 핏물, 그리고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럼에 병사들 사이에서 공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점차 늘어나는 전우의 시체에 몸이 위축되었고 차오르는 공포심과 두려움에 몸이 굼떠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연실 내리는 폭우는 어떠한가 이미 지쳐버린 몸을 더 무겁게 하니 인간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