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283화 (283/412)

【283회. 발발하다】

지친 병사들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했다. 동시에 공포심과 두려움이 그들의 어깨를 잔뜩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새 그 많던 윈랜드의 병사들은 고작 백 명도 채 안 될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에 비해 메세츠데의 병사들의 수는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윈랜드 병사들 사이에서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얼굴에도 더이상 어떠한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절망만 가득한 얼굴로 어떻게든 살아 보기 위해 최대한 발버둥 치듯이 간신히 방패를 들어 적군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사무엘과 나서스가 무어라 소리쳤으나 더이상 그 둘의 어떠한 말도 병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본능 적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적의 검을 막고 또 막을 뿐 사무엘과 나서스가 강조하는 진형이나 희망 섞인 말 따위는 병사들 귓가에 잠시 머물다 흘려 보낼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적군의 공격을 본능 적으로 막아내며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메세츠데 적군들의 움직임이 한둘씩 멈춰 서기 시작하자 병사들 사이에서 의아함이 퍼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하늘을 날며 괴성을 토해내던 와이번들도 차츰 폐허가 된 건물 위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포효를 토해내며 진한 악취와 살기를 풀풀 풍기던 몬스터들도 마치 순한 양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내 차츰 길을 터주기 시작하자 사무엘과 나서스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 했다. 혹여나 이들이 다시 공격해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이어진 대치 상황 아무래도 그들이 더는 공격을 해오지 않으려 하나 보다 윈랜드 병사들 사이에서도 이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되 웅성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사무엘과 나서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치 기적이라도 본 듯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 적군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무엘과 나서스가 지금 상황에 당황하며 이제 어떠한 판단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터준 길 끝, 방벽에서부터 차츰 자신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띠었다. 그러면서 사내에게 풀풀 풍기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사무엘과 나서스의 눈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고 이내 그 파문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이 서서히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 마리의 괴수였고 악마였다. 그의 머리에 자라난 3개의 뿔과 뱀의 눈 그리고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우에도 불길이 일었으며 그가 숨을 토해낼 때마다 주변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주변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 모순의 결정체였다.

뒤이어 가까워지는 사내의 양손의 두 구의 시체가 들려 있는 것이 보이자 사무엘과 나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봐도 저 두 구의 시체는 자신이 잘 아는 시체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내 사내가 사무엘과 나서스의 앞에 멈춰 섰다. 동시에 마주친 시선 사무엘과 나서스의 눈가에 격한 떨림이 찾아들며 자연스레 몸이 떨려 온다. 마치 마주쳐선 안 될 거대한 악마를 마주친 듯이 커져 오르는 공포심과 두려움이 사무엘과 나서스의 마음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내 사내가 양손을 사무엘의 앞에 들어 보인다. 사무엘이 떨리는 시선으로 나지막이 중얼 거렸다.

"마레즈... 제이슨.."

" 자 선물이니라."

사내가 두 구의 시체를 던져 내었다. 동시에 숨이 멎은 제이슨과 마레즈의 시체가 힘없이 사무엘과 나서스 앞에 나 뒹굴었다.

"네, 네 녀석은 누구냐.."

사무엘이 이를 갈면서 묻자 사내가 비릿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현 메세츠데의 황제이자. 세상을 발아래 둘 고귀한 존재이니라. 그리고 우린 만난 적이 있지 않더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긴 내가 변하긴 했지.. 큭큭."

오만한 사내의 말에 사무엘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이리도 악마처럼 생긴 사내는 본적이 없어 기억이 나질 않자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아즈문의 황성에서 만나지 않았더냐?"

그제야 사무엘이 기억났는지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크, 클루드..."

클루드가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이내 나서스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만하구나! 네가 누군지 난 모르겠으나! 넌 천벌을 받을 것이다!"

"오만? 그래, 예전에는 그러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보여주마 그리고 느끼거라 절망과 공포를 너희들을 갉아먹을 두려움을 말이야."

클루드의 목소리가 윈랜드를 울리며 메아리를 쳤다. 이내 이어진 정적, 뒤편에 자리한 병사들 사이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올 뿐 오직 빗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 클루드가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그 소리는 마치 동굴에서 튕긴 듯이 크게 울려 퍼지며 메아리를 치자 동시에 비릿하게 미소를 그리는 클루드의 얼굴은 진정한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무엘이 그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큭큭.. 사무엘.. 나서스.."

그가 나지막이 사무엘과 나서스를 향해 속삭였다.

"내가 직접 천벌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마."

"...!"

사무엘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할 때였다. 갑작스레 내려친 거대한 번개가 이내 사무엘과 나서스 뒤에 있던 병사들 사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없이 클루드의 소행이었으나 어떠한 마법적인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거대한 번개 줄기가 여러 차례 병사들을 향해 내려칠 뿐이었다. 뒤이어 윈랜드의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무엘과 나서스의 표정이 경악과 절망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급히 몸을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자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울부짖는 병사들이 보였다.

"끄아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줘!! 끄아악"

"사, 사무엘님!! 커어억!"

"나서스님!!"

연실 비명을 토해내는 병사들을 보며 나서스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더는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함께 했던 병사들이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나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손가락을 한번 튕겼을 뿐인데 그 별거 아닌 행동만으로 한 줌에 재가 되어버린 병사들을 보며 나서스가 말문을 잃자 이내 사무엘이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하란 말이다!! 그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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