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회. 함락 당하다】
사무엘이 땅을 박찼다. 동시에 그의 검에 푸른 마나가 일렁였고 이내 비릿하게 웃는 클루드를 향해 검을 그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으니 어느새 클루드의 주위에 생겨난 붉은 막이 이내 사무엘의 검을 쉽게 막아냈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으나 너무나 단단한 붉은 막을 뚫어 낼 수가 없었다.
이내 지친 사무엘이 흥분에 못 이겨 검을 떨어트렸다.
"허억.. .허억.."
"끝났느냐?"
클루드의 비릿한 목소리가 사무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사무엘은 그저 숨을 헐떡이며 이제는 완전히 지쳐버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으니 클루드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점차 커져 오르더니 이내 메아리치듯 사방에서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클루드의 웃음소리가 고통으로 다가와 급히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아내려 했으나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쉽게 사무엘의 손을 지나 귀를 타고 사무엘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끄윽... 끅..."
사무엘과 나서스가 쓰러져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하자 클루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약하디약한 인간이구나, 그래 그렇게 두려워하거라 그렇게 겁을 집어먹어 다신 내 발끝조차 쳐다보지 못하게 해주마 끌끌."
클루드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린다. 동시에 서서히 차오르는 악마의 기운이 클루드의 손을 타고 모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만하시지요 벨리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클루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자 꽤 온전한 건물 지붕 위 녹색의 로브를 두른 여인이 사무엘 앞에 내려섰다.
"마리에테.."
"결국, 이렇게나 많은 생명을 앗아갔군요 벨리알."
잔뜩 인상을 구긴 마리에테가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벨리알이 킥킥 거리며 대답했다.
"끌끌끌.. 난 벨리알이 아닌 클루드다.. 완전히 그의 힘을 흡수했지.. 하찮은 생명 따위 좀 죽이면 어떻더냐?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은 이렇게 해서라도 변해야 한다. 위선으로 가득 찬 자들이 모든 것을 잃어 봐야 그제야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일 테니 말이야."
"여전히 흑마법사들을 몰아낸 것을 마음에 두고 있나 보군요."
"큭큭.. 내 어찌 잊겠느냐.. 너희들의 만행을 그때와 똑같지 않더냐?!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땅을 가득 채웠다.!"
"..."
굉소를 지어 보이며 클루드가 소리치자 마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 불러선 안 될 자를 부르려 했기 때문이지요. 그대들의 업보에요!"
"너희들에 천시와 괄시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 인정을 받고 싶었던 한낱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엄연히 잘못된 방법 그대들은 경고를 어겼지요. 그러니 전 그때처럼 당신을 어떻게든 막아 낼 겁니다."
"그래, 아무렴 상관없다 이제 난 복수의 화신이 되었으니.. 발버둥치거라 그래야 나도 재밌지 않겠느냐? 자! 어떻게 할 것이냐? 해 보거라! 그리고 나에게 업보라 했더나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너희들의 업보이니라 큭큭"
클루드가 여유롭게 자신의 양팔을 벌리며 소리치며 비아냥 거리자 마리에테가 씁쓸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인정합니다. 지금은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곧 신물들이 모일 겁니다. 그때 다시 당신을 찾아뵙겠어요."
"...?"
마리에테는 그 말을 뒤로 하나의 구슬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거대한 빛이 이내 구슬로부터 뿜어져 나오더니 곧장 그녀를 비롯해 사무엘과 나서스의 모습까지 빛이 머금기 시작했고 이내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자 클루드가 잔뜩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쥐새끼 처럼 잘도 도망치는군.."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은 마리에테의 기척에 클루드가 이내 혀를 찼다. 그러나 쫓을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운명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클루드는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기척을 감춘 마리에테의 능력에 불만을 간직하며 인상을 썼다.
"아직도 내 기척을 벗어날 수 있다니. 내가 아직 부족한 것인가?"
클루드의 중얼거림에 잠자코 있던 벨리알의 목소리가 다시 클루드의 뇌리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니라 이젠 네 녀석을 이길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넌 이제 반신과 같은 존재이니라.'
"끌끌 그렇지요 잘 알겠습니다. 벨리알이시여!! 크하하하핫!"
그렇게 전쟁은 단 4시간 만에 윈랜드의 함락으로 끝을 맺어갔고 오직 윈랜드에선 클루드의 웃음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 ☆ ☆
"윈랜드가.. 함락 당했습니다.."
아즈문의 회의실, 우울한 분위기 속에 주위에 수많은 귀족들이 참담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 그들 앞에 루이서스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루이서스 옆에는 지크라엘이 서 있었는데 그 역시 눈가에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는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전령으로 온 병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생존자는... 데미아스랑 지크문드는? 행방은... 알고 있는가?"
"그게, 윈랜드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하는 병사의 모습에 지크라엘이 신형이 휘청거렸다. 주변에 귀족들도 파리한 안색으로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아.. 데미아스.. 지크문드.. 자네들이 이리도 빨리.. 가는 겐가.."
"재상.."
지크라엘이 탄식을 토해내며 눈가에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이서스가 굳어진 표정으로 재상을 부르자 지크라엘이 급히 루이서스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황자 전하.."
"응..."
"상황이,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즈문의 남은 두 개의 기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황자 전하.."
".."
지크라엘의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루이서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어리다 해도 데미아스와 지크문드가 누군지 알았음은 물론 그들이 맡은 임무와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루이서스의 표정은 한 없이 진지했고 그 어느 때처럼 투정이나 칭얼대지도 않았다. 어리긴 해도 마치 한 국가의 황제처럼 오롯이 앉아 지크라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신을 확인했습니까?"
이내 루이서스가 병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지금 윈랜드는 메세츠데 군이 점령 하고 있는 상태라 시신을 확인하거나 찾아보지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침통한 표정으로 루이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지크라엘이 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폐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폐하! 이럴 때일수록 더욱 견고하게 있으셔야 합니다. 만인의 태양처럼 황제로서 바라보는 세상에는 그 어느 풍파에도 굴복하시면 안 됩니다. 때론 거센 폭풍이 몰아쳐 나라가 위태로워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언제나 만인을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기 되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때론 표연 하게 때로는 곧게 뻣은 커다란 고목처럼 오롯이 있으셔야 합니다."
"알겠어. 재상.. 그럴게."
"이것이 저의 마지막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 재상?"
루이서스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 지크라엘은 눈물을 지우며 이내 얼굴에 미소를 그려 보인다. 루이서스는 임시 황제로 즉위하고 처음으로 보는 지크라엘의 미소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재상..?"
루이서스가 다시 지크라엘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 대신 이내 지크라엘이 고개를 돌려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일갈했다.
"아즈문의 귀족들이여! 아즈문의 존폐 상황이 닥쳤네. 어느 가문이건 모든 가문에 동원령을 내려 끌어올 수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모아야 할거네 아즈문의 방패가 뚫린 지금 나라의 존폐 위기가 닥쳤으니 이젠 우리가 지난 과거를 잊고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할 때일세 전선은 제가 직접 나가 진두지휘할 테니 끌어올 수 있는 인원이란 인원은 전부 모아주시기 부탁하네 그리고 병사들을 진두 지휘하고 날 도와줄.. 칼리아 후작을 불러주게나.."
지크라엘의 말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지크라엘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