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285화 (285/412)

【285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어쩌시렵니까? 크리스티나 더 고민해보겠는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추기경 조셉이 크리스티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있던 크리스티나가 이내 무언가 결심을 한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당장 아즈문으로 가야겠어요. 성녀로서 죄 없는 사람들이 이리도 피를 흘리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없어요!"

크리스티나의 결심에 조셉과 수잔을 비롯해 다른 추기경들까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녀라면 그리 깊게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결정을 내릴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러분! 전 마흐무드에 성녀이면서 교황 대리이며 임시로 마흐무드의 수장을 맡고 있는 상태에요 하지만 제 성격상 여러분들에게 강제로 도와달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원하신다면 마흐무드에 남아도 뭐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저는 우방국의 위기를 모른척 할 수는 없다 생각해요. 게다가 아즈문만이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에요 저희도 지원을 간 성기사 마레즈를 비롯해 여러 형제자매들까지 그곳에서 모든 이들을 지키다 라우엘님의 곁으로 갔지요 그런 그분들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임에 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답니다. 그러니 전 아즈문으로 가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크리스티나가 확인을 위해 모두를 돌아보며 묻자 이내 조셉이 가장 먼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성녀님이자 우리 교황 대리께서 이렇게 빠져나갈 수조차 없게 말을 하는데 우리가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허허 그렇지요?"

넉살 좋은 조셉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크리스티나, 참으로 말을 잘하는구나? 남고 싶어도 남을 수가 없게 말이야?"

뒤이어 장난기 가득한 수잔이 조센의 말을 받자 크리스티나가 괜스레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생각을 정리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다 보니 추기경들이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아즈문이 밀린다면 마흐무드도 위기임이 분명하니 아즈문이 아직 건재할 때 저희도 힘을 보태야지요! 좋습니다 성녀님!"

이내 다른 추기경들이 이구동성으로 크리스티나의 말에 동의하자 크리스티나가 함박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모두 고마워요! 그럼 어서 준비하도록 하죠! 아즈문도 국가 비상사태를 걸며 모든 귀족들의 사병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했으니 저희도 어서 준비해 그들이 출전할 때 늦지 않게 맞춰 가야지요!"

"그러도록 하지요!"

조셉이 맞장구치며 몸을 일으키자 수잔이 다른 추기경들에게 말했다.

"일단 병사에게 아즈문으로 간다는 전령을 보내도록 하세요, 아마 쥬디스에게 말하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도록 하지요."

호아킨과 자비에르 추기경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수잔이 지아코 추기경을 보며 말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모든 사제들도 모두 모아주세요 저희도 아즈문에서 사활을 걸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잔 추기경!"

그 말을 뒤로 지아코 추기경이 밖으로 나가자 조셉이 껄껄 웃어 보이며 수잔 앞에 섰다.

"자네도 가려는 건가?"

"그럼 가야지 않겠는가? 그럼 자네는 안 갈 텐가?"

수잔이 조셉을 향해 묻자 크리스티나도 조셉을 바라봤다. 그러자 조셉이 잠시 당황하다 이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나이가 이래 보여도 아직 정정하지! 그깟 놈들 별거 아니라고!"

"쯧 왠지 가기 싫은 걸 억지로 가는 듯한데 말이지?"

"무, 무슨! 그런거 아니네!"

"아니면 아니지 왜 이리 소리를 지르는 거야 나 아직 귀 안 먹었어 이 늙은아!"

이내 수잔이 빽하니 소리를 치자 조셉이 괜스레 툴툴거린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크리스티나가 밝게 웃어 보이며 조용히 회의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하자 여전히 수잔과 조셉의 투닥거림이 들려왔다.

그렇게 회의장을 지나 푸른 빛이 감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크리스티나는 이내 방안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라우엘의 석상이 보이자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옷이 걸려 있는 옷장으로 향했다.

뒤이어 그녀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평소 편안함을 중시하던 사제복 대신 하얀 바탕에 금색의 수실로 장식되어 있는 꽤 고급져 보이는 옷으로 갈아 입은 크리스티나가 이내 라우엘의 석상 앞에 무릎을 꿇어 보였다.

천천히 가지런히 양손을 모으며 경건한 자세로 눈을 감고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앞에 놓인 라우엘의 석상 앞에서 나지막이 중얼 거렸다.

"쥬신 라우엘이시여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차가움이 더 하는 겨울이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함에 더욱 날씨가 추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에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계절에 우리 모든 이들의 마음이 라우엘님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따뜻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중략)

이 추운 계절에 모든 나무들이 봄을 기다리며 추위를 참아 내듯이, 우리 삶에 온 갖 어려움과 시련이 찾아온다 하여도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옵소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 추운 겨울날 우리 모두를 보살펴주시고 인도하옵시며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따뜻함을 전해주시옵고 모두에게 행복이 가득하게 하옵시며 다시 태어날 생명들도 라우엘님 품으로 이끌어 지켜주시옵소서..."

꽤 긴 기도문이 끝났다. 이내 마지막 합장으로 기도를 끝낸 크리스티나가 몸을 일으켰다. 경건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하얀 빛 무리가 크리스티나에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가 눈을 감고 그 황홀한 감각을 만끽하다 이내 눈을 떴다.

"이겨내고 돌아오겠나이다."

다시 떠 진 크리스티나의 눈빛에 호기롭고 당당하며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어떠한 여전사가 온다 해도 꿀리지 않을 호기로움이 느껴졌다.

☆ ☆ ☆

한편 아스란 저택이었다.

어둡게 내리 앉은 땅거미에 루크가 멍하니 서 있었다. 루크는 잠시 주위를 돌아보자 이내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윈랜드.."

루크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이내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눈은 포근했으며 따듯했다. 마치 겨울날 화롯불 앞에 몸을 녹이는 것처럼 차가워야 할 눈은 너무나 따듯해 루크를 품에 감싸 안듯 했다. 그렇게 루크가 따스함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겁쟁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루크의 귓가에 울리자 루크가 놀란 얼굴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보이는 건 공허한 윈랜드의 거리, 이내 따듯했던 눈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루크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쓸모 없는 녀석..."

다시 루크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하늘이 번쩍이며 천둥이 내리 쳤다. 루크는 이내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자 주변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하늘이 뚫린 것마냥 내리기 시작한 폭우에 너무나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비명이 루크의 귀를 울리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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