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286화 (286/412)

【286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리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 해도 비명은 멀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그 비명은 뚜렷한 목소리로 변해 루크에게 닿았다.

"겁쟁이!"

"쓸모없는 녀석!"

"도망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루크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럼 넌 무엇을 할 수 있지? 그저 도망치는 것뿐이잖아?"

"나, 난.."

루크가 고통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동시에 진창이 된 바닥은 이내 피로 번지기 시작했고 루크가 잔뜩 겁을 먹기 시작하며 발버둥치려 하자. 자신을 괴롭히는 목소리가 심해지며 진창이 된 바닥이 푹하고 꺼져 완전한 핏 빛의 바다가 되자 루크는 이내 숨을 쉴수가 없어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사, 살려 줘! 살려!"

그러면서 들려오는 루크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 루크의 안색이 파리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누군가 알 수 없는 검은 실루엣이 루크의 앞에 서서 잡아챘다. 그러자 이제는 어떠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온통 핏빛으로 물든 바다는 사라지고 다시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거리로 변해 있었다.

"허억.. .허억..."

루크가 간신히 숨을 몰아 쉬고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루크에 귀에 닿았다.

"루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루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 앞엔 사무엘이 서 있었다. 어떠한 상처도 없이 헤어졌을 때 그 위풍당당한 모습 그대로 사무엘이 루크의 앞에 그 잔잔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루크가 눈물을 흘리며 사무엘을 부르자 사무엘이 루크를 일으켜 세웠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야 했는데 도움이라도 됐어야 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아버지를 보내면 안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루크가 사무엘을 향해 말했으나 사무엘은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다.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제가 좀 더 노력했으면.. 좀 더 노력했더라면.."

"그럼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예?"

갑작스런 사무엘의 말에 루크가 말을 멈추고 사무엘을 바라봤다. 동시에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여러 사람들의 비명, 루크의 눈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인데 이곳에 남았다 한들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느냐 말이다?"

사무엘의 목소리가 마치 한겨울의 바람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루크는 너무 놀라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사무엘이 비릿하게 웃어 보인다. 동시에 사무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피를 쏟기 시작했고 그가 입던 은색의 갑옷도 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말해 보거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더냐? 쓸모없는 녀석.."

이내 사무엘이 혀를 차며 루크를 나무라자 누군가의 검이 사무엘의 등에서 심장을 관통했다.

"아, 아버지!!!"

동시에 사무엘이 불꽃에 타기 시작했고 이내 누군가가 사무엘 뒤에 서 있었다.

"너, 넌.."

익숙한 사내였으나 무언가 달랐다. 하지만 루크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모습이 변했다 한들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주변이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사무엘을 비롯해 데미아스와 지크문드 나서스가 울부짖으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비명을 토해내는 병사들 여러 장면들이 정신없이 지나친다.

"아.. 안 돼.."

"울부짖거라.. 분노하라. 두려워하라... 쓸모없는 녀석 그래야 내가 널 지켜보는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 계속 지켜보고 있으마.. 끝까지 널 지켜보겠어.. 큭큭..네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지켜보겠다."

온통 검은색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는 루크에게 가까워졌다. 이내 루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클루드...."

그 사내를 보며 루크가 그 사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동시에 굉소를 터트리는 클루드의 모습을 보며 루크가 놀란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숨이 멎을 듯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등에는 식은땀이 가득하다. 동시에 떨려오는 손이 멈추질 않았다. 이내 루크의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며 눈물 한 방울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스란가로 돌아오고 난 뒤 매일 꾸기 시작한 꿈이었다. 자신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던 클루드의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자신을 향해 울부짖던 모든 이들의 모습과 목소리였으니 그 목소리와 얼굴들은 잠에서 깨어나도 여운을 남겨 루크를 괴롭혔다.

☆ ☆ ☆

".."

매일을 눈물로 지새웠다. 윈랜드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울다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우중충한 하늘에는 빛이라곤 보이지 않은 아스란 저택은 한동안 을씨년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분위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루크의 방에도 이어져 있었으나 이내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오랜만에 저택에 침묵이 깨어지려 했다. 그러나 그 노크소리에도 다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조심스럽게 방문의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인이 보였다. 이내 방안으로 들어선 여인의 눈에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루크의 모습이 보이자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루크..."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레이니였다. 그녀 역시 한창 울었음을 말해주듯 눈 주위가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동자도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루크가 걱정되어 방안에 온 레이니가 조심스럽게 루크를 끌어안았다. 이내 루크의 몸이 조금씩 들썩이며 눈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바보였어.. 나 혼자 도망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누나.."

루크의 말에 레이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냐,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었던 거야."

"흑.. 아버지의 시체조차 찾으러 갈 수가 없어.. 난 왜이리 무능력하지.. 난 왜이리 무능력한거야.."

"루크.. 그렇지 않아... 넌 절대 무능력하지 않아.."

레이니가 토닥이며 루크를 계속해서 다독였으나 지금 루크에게는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마지막으로 봤던 사무엘과 데미아스를 비롯해 나서스와 지크문드의 얼굴 더 나아가 윈랜드의 모든 병사들의 얼굴까지 자꾸만 떠오르며 주변을 맴돌아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특히 매일 밤 꾸는 그 꿈은 루크를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냐 괜찮아.. 네 잘못이 아냐 넌 최선을 다했어."

레이니가 계속해서 루크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루크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책했고 후회를 했다. 자신이 좀 더 노력했더라면 자신이 만든 대포나 폭탄의 보급을 좀 더 빨리 원 수량대로 가득 채워 보급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후회였다. 웃고 떠들고 여인들과 사랑을 나눌 시간에 대포의 설계도를 더 빠르게 완벽히 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아 루크를 괴롭혔다.

어떻게보면 고작 그러한 문제만으로 윈랜드가 뚫린 것은 아니겠으나 지금 루크에게는 사소한 모든게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어쩔 때는 자신이 조금 더 똑똑해서 지구에서 알고 있던 무기들을 만들어 낼 수 만 있었더라면 하는 후회까지 밀려와 루크를 자책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레이니 조차 루크를 위로하지 못하고 그뒤로 루크에게 몇 명이 더 루크의 방에 왔다 갔으나 루크는 여전히 방안에 틀어박혀 자신을 자책하다 울다 지쳐 쓰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도 또 다음 날이 되어서도 말이다. 그럼에 루크의 모습은 더욱 초췌해지며 더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자.

라이아는 언젠간 훌훌털고 일어날 거라 믿었던 루크가 그러지 못하니 더는 이대로 둘 수 없었는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직접 루크의 방에 찾아 왔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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