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잔뜩 노기 띤 목소리가 루크에게 닿자 여전히 멍한 눈으로 우중충한 창 밖을 바라보던 루크의 시선이 차츰 움직이며 라이아에게 향했다. 그러자 다시 라이아의 목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루크!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라이아의 노성이 저택을 소란스럽게 하자 집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이 되어 루크의 방에 한둘씩 모이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처음으로 보는 라이아의 화난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라이아는 언제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기보단 자애롭고 또는 자비롭게 화를 낼만한 일을 넘겼기에 그녀의 노성은 그들로선 처음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내 루크와 라이아를 번갈아 봤으나. 라이아만 잔뜩 열불을 토해내고 있었고 초췌한 루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라이아가 잔뜩 인상을 쓰며 나들의 시선에도 괘념치 않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이제 이만하면 충분해! 내가 널 너무 방치했구나? 루크! 지금 네 몰골을 보렴! 얼마나 추한지 아느냐?"
계속해서 루크를 다그치는 라이아가 억지로라도 루크를 침대 위에 일어나게 하려 했으나 루크가 라이아의 손을 뿌리친다. 그러자 라이아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너만 슬픈 거 아니란다. 우리 모두 힘들고 슬퍼 하고 있어 하지만 넌 도를 넘는 구나! 언제까지 이리 지낼 것이니? 사무엘과 아버지가 얼마나.. 얼마나 네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겠니! 우리 모두 똑같이 슬프단 말이야! 하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 "
라이아 역시 윈랜드에서 전해진 비보에 몸과 마음이 초췌해진 것은 루크와 같았다. 그녀 역시 루크처럼 매일 사무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하루하루를 비통하고 슬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문에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리고 아즈문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 중 첫 번째를 차지하는 대 아스란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었기에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을 생각했으니 바로 루크를 방 밖으로 다시 내보내는 것이었다. 가문의 안 주인으로서 가정의 어머니로서 차기 가주인 루크를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결심은 곧 행동으로 나왔고 이내 루크의 앞에 이르러 난생 처음으로 노성을 터트린 라이아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창피하지도 않는거니?! 어찌 아스란가의 차기 가주가 이리도 망가진단 말이냐! 네가 다시 부끄러워지는구나 루크! 남은 이들을 보란 말이야. 황성은 슬픔을 잊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있어.. 지아란 가문도 테온과 함께 병사를 동원한다는 연락을 해왔단다. 그런데 넌 아직도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니?! 넌 아스란 가문의 차기 가주란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슬프더라도 지금은 참아야 하는 시기란 말이야!"
".."
라이아의 다그침에 루크가 멍하니 라이아를 쳐다봤다.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말라버린 눈가에 다시 습기가 차오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라이아도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렇다고 또다시 같이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나거라. 우리에게 아직 남은 일이 있지않니?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이 땅을 이리도 멍청하게 그들의 손아귀에 내버려둘 것이니 난 절대 그 꼴을 보지 않을 거란다!"
"어머니..하지만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은걸요.. 매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후회돼요 차라리 저도 그곳에 남아서 아버지와 같이 싸웠으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요.. 어머니.."
루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심정을 토해내자 라이아가 이내 루크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알아.. 나도 그렇단다. 나도 사무엘의 얼굴이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구나.. 그러니 더더욱 이러면 안 돼. 사무엘을 위해서라도 아버님을 위해서라도 싸우다 전사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니.. 만약 계속 이러고 있다면 넌 절대 그들을 떨쳐낼 수 없을거야.. 그러니 어서 일어나렴 꿈에서 사무엘과 아버님이 널 보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하렴! 루크... 자 어서 일어나자꾸나.. 그래야 복수라도 할 수 있는거 아니겠니?"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전 무엇을 해야 하는 거에요 도대체.. 무엇을.."
루크의 울부짖음에 라이아가 루크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잘 생각해보렴 루크 넌 똑똑하잖니.. 넌 다른 이들보다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어. 그러니 금방 떠오를 거야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말이야.. 만약 계속 이러고 있다면 더 힘들어질 게 분명해 넌 평생 패자로 남게 될 거야.. 그러면 사무엘은 너에게 또다시 실망할테지.. 그러면 좋겠니? 예전에 변하겠다고 그리 장담을 하지 않았니?.. 이제 네가 보여줄 차례야. 너의 변한 모습을 말이야..."
라이아가 루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루크의 몸이 떨림이 커졌다. 그럼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루시가 루크를 꼭 끌어안아 준다.
"맞아. .루크.. 이러고 있는거 싫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래! 어서 일어나렴 루크..."
루시와 라이아를 비롯해 안느란테와 에이리스가 다가와 루크를 끌어안아 주자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함이 루크의 차갑던 마음을 조금은 녹여주는 거 같았다. 이내 루크가 라이아의 도움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앉아 있어서일까? 잠시 현기증이 돌며 몸이 휘청거리자 라이아가 급히 루크를 부축해 주며 말했다.
"실수를 해도 좋단다. 실패해도 상관없단다. 넘어진다 해도 좋아. 하지만 그 실수와 실패로 인해 무너지지마렴.. 우린 언제나 네 옆에 있을 테니.. 무너지지만마렴 내 아들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라이아의 말에 루크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해오자 라이아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를 그리곤 루크의 뺨을 쓰다듬어 준다.
"보여주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네가 아스란의 가주라는 것을 보여달란 말이야.."
"..."
라이아의 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허나 아직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데미아스나 지크문드 조차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그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자신이라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아는 차근차근 생각해 보라 한다. 소소한 것부터 우선적으로 하다 보면 무엇이든 떠오를 거라는 라이아의 말이 서서히 포근함에 녹아가는 루크의 심장에 닿자 완전히 녹아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듯이 마구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루크.. 지금 황궁에서도 전체 동원령이 내려졌어. 각지의 용병들 하며 귀족들의 남은 사병들까지 전부다 끌어모으고 있어 우리도 어서 도와야 해."
"그런가요.."
레이니의 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흐르던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모두 고맙고 죄송해요, 일단 저도 이러고 있지 않을게요 그러니 가서 쉬고 있으세요.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괜찮겠니?"
루크의 말에 라이아가 다시 걱정스런 눈으로 변해 루크를 바라보자 루크가 이내 힘겹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걱정 말아요.."
"...난 언제나 널 믿는단다.. 루크.."
라이아가 나지막이 루크에게 일렀다. 그러곤 여전히 남은 근심을 간신히 떨쳐내며 방을 나서자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이 루크에게 힘내라는 따듯한 말 한 마디씩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나 루시는 루크와 계속 함께 있고 싶어 했으나 이내 릴리와 세리스에 이끌려 결국 방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해프닝에 잠시 루크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으나 다시 혼자가 된 방안에서 루크의 웃음은 금세 지워졌다. 세상이 다시 조용해지고 어느새 내리기 시작힌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사이로 꿈속에 내용이 떠오르는 듯했고 이내 환청이 들리듯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루크의 귓가를 비집고 들어섰다.
".. 죄송해요.."
루크가 나지막이 창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