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마차가 이내 지아란가의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루크는 급히 마차에 내렸다. 지아란가의 저택을 지키는 병사들도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루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루크를 들이며 이내 저택 문을 열어주자 저택 안에는 파리한 안색의 꽤나 피곤한지 초췌한 모습의 노집사 메르헴이 가장 먼저 루크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루크 도련님?"
여전히 차분하고 교양이 느껴지는 메르헴이 예를 표하며 루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루크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는 놀라거나 하는 별다른 표정 없이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루크를 맞이하자 루크도 간단하게 인사를 하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엘레니아 누나는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역시 아가씨 때문에 오셨군요.. 그나저나 그것이.."
루크의 말에 메르헴이 잠시 뒷말을 흐리며 우물쭈물하자 루크가 답답한지 다시 한번 메르헴을 닦달했다.
"어서 가르쳐주세요!"
"그게, 방 안에 들어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윈랜드에 돌아오신 후부터 계속 그렇지요 심지어 식사도 하지 않고 있어. 로아니님을 비롯해 테온 도련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아가씨의 방 안에 들어가 무슨 이야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테온 도련님이나 로아니님 조차도 아가씨가 방에 들여 보내질 않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루크의 생각대로 엘레니아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더 심각하게 주변의 소통조차 끊어 버린 듯하자 루크는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너무 늦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엘레니아가 잘못 된 생각까지 하진 않았을까? 생각했으나 루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질 만한 나약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 루크였다.
"바로 엘레니아님에게 가보시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그래도 예의가 있지요 로아니님은 병은 어떠신가요 많이 완화되었나요? 로아니님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어요."
"난 괜찮단다 루크."
메르헴에게 로아니의 증세를 물었으나 대답은 중앙 2층으로 가는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루크가 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여전히 호리호리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로아니님의 모습이 보였다. 병이 어느 정도 완화가 되었는지 마른 기침은 하지 않았으나 파리한 안색에 아직 약을 더 먹어야 하는 상태로 보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번에 로아니에게 다가온 충격이기도 했다. 병의 치료는 언제나 마음먹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기에 혹여나 로아니가 윈랜드에 일 때문에 병세가 더 악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아니님..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십니까? 병이란 자고로 마음먹기 나름인지라 굳건하게 마음을 먹어야 나을 수 있는데.."
루크는 이내 로아니의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로아니의 안색을 살펴 봤다.
그런 루크의 걱정에 로아니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난 정말 괜찮단다.. 나보단 엘레니아가 더 걱정이지.."
"... 그런가요."
루크가 인상을 쓰며 엘레니아의 방으로 가는 복도를 바라봤다. 뒤이어 오랜만에 떠들석한 저택에 테온이 방에서 나왔다.
테온도 곧 사병들을 데리고 황성으로 간다 했는데 아직 가지 않았나 보다. 루크가 이내 테온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고개를 끄덕이자 테온 역시 두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으나 나름 의젓하게 이겨내고 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루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반가워요 형님!"
"그래... 잘 이겨내고 있구나?"
"힘들어할 시간이 없어요...어떻게든 복수해야지요.. 그래서 이번에 저희 기사들과 함께 황성으로 가기로 했어요. 아직 영지 일이 좀 남아서 그것만 해결하고 가려고요."
의젓한 테온의 말에 루크가 진심으로 테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테온이 더 강한 사람이라 생각이 들었다. 자신 역시 집안사람들이 없었다면 여전히 엘레니아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슬퍼하고 있었을 텐데 테온은 홀로 슬픔을 이겨내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테온의 모습에 루크는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강하구나."
"저는 지아란 가문의 가주니까요."
테온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루크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동시에 자신을 가주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이 아직 어려 보이는데도 나서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 테온의 모습에 로아니도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금세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엘레니아 때문일 것이다."
"그래, 맞아.. 넌 이제 지아란가의 가주지.."
"그나저나 잘 오셨어요! 누나 좀 도와줘요 며칠째 식사도 안하고 방안에 틀어 박혀서 나오질 않아요."
"응, 그럴 것 같아서 왔어.. 사실 나도 지금까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거든... 하지만 이제 이겨내야지.. 그리고 엘레니아 누나도 다시 데려와야지.. 그래. 그럼 가보도록 할게요."
루크가 로아니를 보며 말하자 로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엘레니아를.."
"부탁해요 형님."
로아니와 테온의 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저택의 2층으로 올라섰다. 이내 오른쪽으로 난 복도 길을 걸으며 엘레니아의 방 앞에 멈춰 섰다.
특이점이 없이 그저 흰 나무와 금색으로 장식이 된 방 문 앞에 잠시 멈춰 선 루크가 이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방문을 두드렸다. 복도를 울리는 노크 소리는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소리로 울려 퍼졌다. 분명 방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들을 만한 소리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루크는 다시 한번 좀 더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자 아까보다 더 커진 노크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잠들었다 해도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였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으나 그래도 다행인 건 문 안에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루크는 문 앞에 엘레니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엘레니아 누나? 거기 있어요? 듣고 있죠? 저에요 루크.."
".."
"듣고 있나요?"
루크의 목소리가 차츰 떨려왔다. 엘레니아가 느끼고 있을 감정이 자신에게도 공감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괜스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이내 꾹 눌러 참았다. 뒤이어 지금 여기서 자신이 울어버리면 어떡하느냐며 자신을 탓했다.
뒤이어 잠시 멈춰 선 채로 엘레니아의 감정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느낀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매 순간 시도때도없이 나서스와 지크문드의 얼굴이 떠오름이 분명했음에 그 슬픔은 말로 이루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 처럼 그들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크가 이내 생각을 끝냈는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