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290화 (290/412)

【290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누나, 슬프지요.. 알아요 저도.. 저도 같은 걸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해도 루크는 계속해서 묵묵히 말을 이어 갔다. 그녀가 듣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방 안에만 있다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어요. 그거 아세요? 저도 똑같았어요 누나처럼 이 쓸모없는 몸으로 아버지를 도와주지 못해 한동안 방안에 틀어 밖혀 나오질 않았거든요 그때는 내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나고 죄송스러웠는지.. 모든 게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다행히도 저의 곁엔 많은 분들이 있었어요.."

어느새 루크의 눈에도 더는 참을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루크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머니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있으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하더라구요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이 땅을 쉽게 내줄 거라고 말이에요.. 그러니 힘들더라도 슬퍼하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오히려 더 일어나야 할 때라고 말이에요 그런 말을 들으니 저도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깨달았어요. 슬픔은 나중에 미뤄야 한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이러지 말아야지 해도 가슴 한편에 윈랜드에 남겨둔 많은 사람들이 자꾸 떠올라요.. 그들이 매일 밤 제 꿈에 나타나 절 괴롭혀요 그들의 비명소리가 끊임이 없이 들려와요. 그래서 매일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내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되는 거 있죠.. 그런데 레이니 누나 로제스 누나 안느란테님과 에이리스님 그리고 루시까지 모두 절 도와주었어요. 이겨낼 수 있도록.. 혼자서 슬퍼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제 고통과 슬픔을 같이 나눠 들으려 했어요.."

".."

"그러니 이번엔 제가 누나랑 같이 있어 주고 싶어요. 누나 혼자 있지 말아요. 슬퍼도 같이 슬퍼해요. 우리 우린 언제나 함께 잖아요. 누나.."

루크의 말이 끝났다. 말하다보니 감정이 북받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횡설수설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생가갛자 왠지 후련한 것 같았다.

이제 엘레니아가 결정할 차례였다. 조용히 엘레니아의 문 앞에 지키고 있자 다행히도 달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문 사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레니아의 모습이 보였다.

"루크.."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다 쉰 엘레니아의 목소리에 루크도 울컥 눈물이 터져나왔으나 간신히 눈물을 숨기고 힘겹게 미소를 그렸다.

"혼자 슬퍼하지 말아요. 모두가 엘레니아님을 기다려요.."

"루크.."

초췌해진 얼굴과 산발이 된 갈색의 머리칼을 루크가 조심스럽게 정리해준다. 뒤이어 엘레니아의 얼굴에 난 눈물 자국도 손을 들어 닦아내 준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엘레니아가 왜소해 보이는지 루크는 씁쓸한 감정이 맴돌았다.

"같이 있어 줄게요."

루크가 나지막이 엘레니아에게 일렀다. 이내 엘레니아가 눈물을 머금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에게 안겨왔다.

"흑... 루크..."

서로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편, 그들의 뒤편에 바라보던 로아니가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로아니의 얼굴에도 이제야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 ☆ ☆

"좀 괜찮아졌어요?"

침대 위에서 한참을 울던 그녀가 차츰 눈물을 그치자 루크가 물어왔다. 그러자 엘레니아가 루크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죄송해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저는 테온과 달라서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니야, 지금이라도 옆에 있어줘서 고마운걸."

루크의 말에 엘레니아가 힘겹게 미소를 그렸다. 그러자 루크의 입가에도 차츰 미소가 서리며 이내 엘레니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자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인다. 루크는 다시 엘레니아의 미소가 돌아왔음에 다행히라 생각했다.

뒤이어 엘레니아가 다시 물어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이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요.."

"잘할 수 있는거?"

엘레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루크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네.. 잘할 수 있는 거요.."

☆ ☆ ☆

우중충한 하늘, 비가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윈랜드가 함락되고 슬픔에 잠긴 아즈문을 하늘도 알아주시는 걸까? 하늘은 항상 잿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비가 내리려는 것인지 공기가 습기가 가득 차 비 내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하늘 아래 푸른 들판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려 하나로 묶은 사내의 얼굴은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 사내의 손에는 특이하게도 게의 발처럼 생긴 클로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 클로는 온통 붉은빛이었고 게의 집게발 같은 앞부분도 굉장히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는 모습이 사내의 인상과는 반대였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갑옷도 늑대와 흰 뱀이 그려진 문양이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으나 아무리 봐도 아즈문이나 마흐무드의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윈랜드가 단 몇시간만에 함락되었답니다."

그때 마침 사내의 뒤편에서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다가와 말했다.

"..."

그 중년 남성의 말에도 사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잿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깊고 느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뿐이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차라리, 그분의 말 대신 저희에게 익숙한 진영에서 적들을 맞이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흠.."

다시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말에 그제야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다가 울고 있어."

"예? 그게 무슨?"

갑작스런 사내의 말에 중년 남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뒤편에 이어진 바다를 바라봤다. 점차 거세지는 바람에 파도도 바람을 따라 점차 거칠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모습을 뒤로 바다와 땅의 경계선을 잇는 모래사장엔 수십 척의 커다란 배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에 자신과 똑같은 늑대와 흰 뱀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자랑스런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배에 돛에도 늑대와 흰 뱀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저 배들 역시 이 전사들의 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켄서 너도 그렇지?"

사내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일까? 사내의 클로가 살짝 빛을 토해내다 이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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