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데미아스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시야가 잠시 빙글거리며 어지러움을 느껴 몸이 휘청이자 간신히 나무로 된 벽에 손을 집어 안정을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자 이 고운 음색은 더욱 커져 오르며 이내 마음 한구석에 따듯함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보통에 음유시인이 아닌 듯이 고작 간단한 음악에 이리도 사람의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할 사람은 웬만한 실력으론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데미아스도 한때 노후를 준비하며 음악을 배우려 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 잘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때의 기억이 잠시 떠올랐는지 벽에 기댄 데미아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매일 검을 집고 살다가 악기를 배우려니 잘되지 않았음은 물론 지크문드가 그런 자신을 보며 어울리지 않는다고 혀를 차는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사무엘 역시 악기를 다루는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러다가도 지크문드와 사무엘이 떠올라 이내 걱정스런 마음이 다시 비집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이 건물이라고도 하기 뭐한 곳에서 나가야겠다. 생각한 데미아스였다.
그렇게 힘겹게 데미아스가 방을 나서자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언제나 익숙했던 도시가 아닌 푸른 나무들이 높게 들어선 숲 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풀잎들이 다 떨어져 나가 앙상한 가지만이 남은 나무들은 을씨년스럽게 보이려 했으나 다행히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동물들의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이 음악 소리가 그러한 마음을 단번에 가시게 했다.
"도대체 여긴..."
데미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처음 보는 숲 속이었다. 그런 그 숲 속사이로 다시 또 들려오는 악기 소리에 데미아스는 이내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길인 것인가? 아니면 동물들이 지나다니는 길인 것인지 길은 길이지만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길을 지나 소리에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동물들의 소리도 점차 커져 오른다. 뒤이어 어디선가 시냇물이 있는지 물이 흐르는 소리도 악기의 음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든 소리들이 이내 고운 악기 소리에 리드를 따라 한대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앙상한 나무들을 지나쳐 그가 이르른 곳은 한 널찍한 공터 나무 그루터기엔 한 엘프 여인이 앉아 피리를 부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엔 조그마한 냇물이 흐르며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여태 들었던 동물들이 앉아 음악회를 즐기며 그 음의 맞춰 울음을 토해내며 하모니를 이루는 장관을 보이고 있었다. 데미아스는 그런 그녀의 신비로움에 잠시 말문이 막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지크문드를 비롯해 나서스와 사무엘도 그들의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지크문드.. 사무엘? 나서스.."
동물들과 같이 앉아 엘프의 음악을 듣고 있는 지크문드와 사무엘 그리고 나서스를 보며 묻자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데미아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일어났는가?"
"자네.. 여긴 도대체 어딘가? 그리고 지금 이건.."
데미아스가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이 동물들과 연주를 하는 엘프를 보며 중얼거리자 지크문드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일단 기다렸다가 직접 설명을 듣는 게 빠르겠지."
지크문드가 자신의 옆을 툭툭 치며 말하자 여전히 데미아스가 얼떨결 한 얼굴로 지크문드 옆에 앉았다. 앉으면서도 아직 낫지 않은 상처가 아려오는지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뒤이어 엘프를 바라봤다. 긴 은발의 녹색의 로브를 착용한 엘프는 연실 동물들을 향해 피리를 부르고 있었고 그 피리에 맞춰 동물들이 연실 기다린 귀를 흔들어 대며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동물들과 교감을 하는 듯이 이 놀라운 광경에 잠시 데미아스도 근심과 걱정이 잊혀지는 듯했다.
"... 좋은 음색이야."
데미아스가 음악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진 음악은 차츰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동물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엘프도 이내 들고 있던 피리를 옆에 메고 있는 가방에 넣자 데미아스는 괜스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셨네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엘프가 물었다. 데미아스는 이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여긴 도대체 어디인것이요?"
"제가 잠시 누군가를 기다리며 있던 임시 거처에요 뭐 이러한 손재주는 부족해 거처라고 하기엔 좀 힘들지만요.. 아무튼, 이곳은 아즈문과 요르문간드를 가는 길목의 숲이지요 엘프들은 여길 바람이 머문 숲이라고 하지요"
엘프의 말에 데미아스의 표정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대답했다.
"그, 푸른 달빛의 숲 일족이랑 푸른 바다의 일족이 만나는 곳 아닌가?"
"맞아요 그대도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그게, 이 얘기를 듣게 된 일이 있어서."
데미아스의 말에 엘프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들었어요 이쪽 분에게 안느란테라 했던가요 호홋."
"맞습니다. 그나저나 윈랜드는? 윈랜드는 어떻게 된 것이오?"
데미아스가 그제야 윈랜드가 생각났는지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엘프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해갔고 지크문드도 그러했다. 뒤이어 데미아스가 사무엘과 나서스를 바라봤지만, 그들은 마치 죄인 마냥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야.."
"윈랜드는 함락됐네.. 데미아스.."
"..."
직설적인 지크문드의 말에 데미아스의 눈가에 파문이 일었다.
"단 4시간 만에.. 우리가 졌네 데미아스.. 우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네.."
"... 그런... 나, 남은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은 어디 있는가? 설마.."
"그래.. 살아남은 자들은 우리가 다일세, 성기사단, 로열나이트, 윈랜드의 병사들과 기사들 전부다.. 죽었네.."
"..."
데미아스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간신히 일으켰던 몸이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단 4시간 만에 함락이 되었단 허무함이 밀려든다. 그것도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말이다. 데미아스는 슬픔과 죄송스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했으니 한 나라의 사령관으로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크문드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진정하세요..."
그때였다. 엘프가 몸을 일으켜 데미아스에게 다가 섰다.
"진정하세요,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데미아스가 울음을 토해내며 묻자 엘프가 이내 진중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아직 그들을 막을 수 있어요 조금은 늦어졌으나 바삐 간다면 맞출 수 있을 거에요"
"어딜 간다는 말이오? 이제 와서.. 어딜 간다는 말이오.. 이미 나만 믿고 있던 내 병사들은 모두다 유명을 달리했는데!"
엘프의 물음에 데미아스가 울부짖으며 되묻자 잠자코 지켜보던 지크문드가 대신 대답했다.
"신물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가기로 했네"
"신물? 루크에게 말이야?"
"아니, 루크가 아닐세 다른 자일세."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여전히 데미아스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토해내다 이내 엘프를 바라봤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데미아스의 물음에 엘프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어 보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