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마리에테가 모두를 바라보며 말하자 모두가 걸음을 바삐 걸었다. 그때였다. 침울해 보이는 사무엘의 표정이 자꾸만 데미아스의 신경을 쓰이게 했다. 언제나 호기롭던 인상은 어디에 갔는지 침울하고 눈가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조금 전 마리에테와 이야기를 하면서 언뜻 보이는 두려움에 데미아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무엘, 왜 그러느냐.. 혹시 병사들 때문이냐?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야.."
".. .아버지."
데미아스의 말에 사무엘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내 데미아스가 나서스를 바라보자 사무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무언갈 보고 굉장히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뒤이어 다시 사무엘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뭐가 그리 죄송한 것이냐?"
"두려웠습니다..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데미아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사무엘이 다시 대답했다.
"그 클루드란 자와 대면했을 때 제가 보는 앞에서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저는 그자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그자가 계속 떠오릅니다. 공포심이 가시지 않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사무엘의 침울한 말에 데미아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뒤이어 사무엘의 몸이 차츰 떨려왔고 말라버린 눈가에 차츰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이 널 그리 망가트린 것이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인간이 아닌 신과 대적하는 자와의 싸움에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사무엘.."
둘의 대화에 듣고 있던 마리에테가 껴들었다.
"그래서 저희는 이 길을 가고 있는 거에요. 그는 모든 악마들을 이끄는 수장과도 같은 존재에요 한낱 인간으로서 그를 보고 두려움과 공포를 집어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
"그자의 이름은 벨리알. 모든 분노와 공포의 악마지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심에 잡아먹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힘을 가진 자이지요. 그러니 한시가 급해요. 그가 수많은 공포와 분노를 먹고 더 큰 힘을 키우기 전에 어서 신물을 모아야 해요. 이제 모든 신물들도 깨어났거든요."
"신물들이 다 깨어났다는 건가?"
지크문드가 묻자 마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이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 마리에테가 입고 있는 녹색의 로브를 저미며 말을 이었다.
" 맞아요. 다 깨어났지요 때가 된 거에요 이제 한데 모이기만 하면 돼요. 그러니 어서 이 숲을 지나 요르문간드 전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죠!."
마리에테의 말에 지크문드가 인상을 썼다.
"요르문간드 말이오? 우리가 가는 곳이 요르문간드 놈들이 있는 곳이오? 그런 겁쟁이들 따위.."
지크문드의 말에 마리에테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때를 기다린 것뿐이에요"
"때? 그때가 도대체 언제란 말이오! 이미 내 병사들은 죽어버렸고 나서스와 사무엘은 이리도 망가져 버렸는데! 도대체 그때가 언제인가!"
지크문드가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그럼에도 마리에테는 충분히 지크문드의 말을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들의 내부에도 이 대륙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요르문간드 내엔 미래를 볼 수 있고 라우엘님의 전언을 들을 수 있는 주술사가 한 명 있어요 그녀의 이름은 라게르사, 그들이 때를 기다린 것도 다 라우엘님의 전언 때문이에요. 그들에게 있는 신물들이 깨어나야만 했거든요 그리고 이제 두 개의 신물이 깨어났고 또 다른 기억을 잃은 신이 세상이 깨어났으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기억을 잃은 신이라니?"
데미아스가 껴들어 묻자 마리에테가 데미아스를 보며 대답했다.
"지금 이 세상엔 기억과 힘을 잃은 신이 태어났어요. 그는 라우엘님이 아니에요 라우엘님만큼의 능력을 갖췄으나 지금 모든 기억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된 신이에요. 지금 벨리알은 그녀의 몸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만약 벨리알이 그녀의 몸을 갖게 된다면 라우엘님으로서도 현신을 해 힘을 사용할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에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어려운가요? 간단하게 확실한 건 신물들과 루크님은 라우엘님의 현신에 필요로 하는 재물이고, 벨리알이 그녀의 영혼을 얻게 되면 라우엘이 이 현세에서 힘을 직접 적으로 사용할 명분과 계기를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지요 "
마리에테의 말에 데미아스는 여전히 아리송한 그녀의 말을 어느정도 대충은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그자를 막을 방법은 정녕 없던 것인가? 이렇게 많은 피를 꼭 봐야 했던가?"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그 벨리알도 인간이 만들어낸 악 신, 그리고 지금의 벨리알은 인간이 불러낸 업보이기 때문이지요, 그전에 라우엘님께서는 신탁을 내려 그들을 막으라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막지 못했지요. 저 역시 예전부터 흑마법사들의 준동을 막아내긴 했으나 그 싹을 모두 쳐 낼 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고 결국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악신을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이게 다 인간들 때문이란 거요?.."
"그렇지요."
마리에테의 말에 데미아스를 비롯해 지크문드도 침을 성을 삼켰다. 이리도 피를 보게 된 것이 모두 인간의 탓이란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수많은 발전을 이루어주지만, 때론 피할 수 없는 피를 부르게도 되지요..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은 인간들 스스로 막아야 했어요. 태초의 존재로부터 신들에게 내려진 규칙에 따르면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진 재앙은 오직 인간들만이 막아야 하는 규칙이 있었지요. 그렇다고 라우엘님을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그녀는 어떻게든 인간을 도와주고 싶어 했으니 저에게 신물을 만들라 했던 것도 다 그분의 예견이 있었고 그분의 도움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라우엘님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사랑하고 계신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기회를 주지요."
마리에테의 말이 끝나고 잠시 일행에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재앙 때문이란 것에 작지 않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 명분이란 것은 무엇이오?"
뒤이어 침묵을 깨고 지크문드가 묻자 마리에테는 열심히 길을 걸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 그 악신이 신을 건든다면 신이 끼어들 명분을 만들어주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진 재앙이 이내 신에게 손을 뻗친다면 라우엘님도 더는 뒤에서 방관만 할 수 없으니 말이에요."
"그렇기에 라우엘님을 현세에 불러들이기 위해 루크를 비롯해 그 신물들이 필요하다. 이 말인가?."
마리에테의 마지막 말에 이내 데미아스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국, 인간의 탓이었다는 것에 허무함이 느껴져서였다. 그러면서도 억울하고 분노가 차올랐으나 어디다 풀 곳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마리에테를 따라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걸음을 걸을 뿐이었다.
"너무 많은 피를 보았는데.. 이게 다 인간이 만들어낸 업보라니.."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업보이기도 하지요, 신들이 저주를 받았을 때,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인간들이 도를 넘어 악신을 만들어냈으니..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마리에테의 말에 데미아스는 그저 침을 성만 삼키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