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295화 (295/412)

【295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즈문의 하늘에 태양이 오롯이 떠 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우중충한 하늘은 비가 내리다 말기를 반복했으며 잿빛의 색깔을 연실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지상에 너무나 많은 피가 흘러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먹구름은 맑게 개이질 않고 계속해서 땅을 적셨다.

지금도 여전히 보슬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태양을 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든 지상을 적신 피를 닦아내려는 듯, 허나 피와 시체가 쌓이는 속도는 어떠한 강풍과 폭우에도 씻겨 내리지 않았다.

마치 하늘을 비웃듯 메세츠데가 지나간 길목은 언제나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윈랜드가 함락된 상태에서 메세츠데의 진군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었고 남하하는 도중에 보이는 어떠한 마을도 지도에 완전히 지워 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생명도 허락하지 않은 듯, 그들이 내려온 자리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연실 그려지고 있었으니 주변 도시들의 공포심은 나날히 커져만 갔다.

그러함에 공포심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를 먹고 사는 클루드의 힘은 점차 강대해져 갔으며 이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평범한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기운은 더욱 불쾌해지며 절로 공포심을 유도 한다. 동시에 클루드도 인간으로서의 인격이 차츰 옅어졌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완벽한 악마가 되어 갔다.

"흐음.."

불타오르는 마을 속 클루드가 오롯이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땅을 적시는 핏물이 발밑에 닿았다. 클루드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그 핏물을 적셔 입가에 가져갔다.

"하아..."

피가 이렇게 달콤했는지 처음 알았다. 절로 기분이 상기 되며 자신의 생기를 채워주는 듯하다. 그러면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마음에 안정을 찾아 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상황이 정리되는 것인지 더이상 어떠한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땅을 적시는 빗소리만이 클루드의 귓가에 들려오자 어느새 자신의 병사들이 클루드의 뒤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클루드가 만족스런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병사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클루드는 이번에야말로 아즈문을 세상에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절로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준비가 다 되었다면 슬슬 움직여라. 우린 아직 쉴 수가 없으니..곧 아즈문에 도달할 것이다. 그들의 황성에서 그 년놈들의 피로 목을 축이고 그들의 시체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뒤로 클루드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뒤이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병사들, 그들의 발아래는 한 줌의 재로 된 마을과 땅을 적신 피와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메세츠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윈랜드 아래에 아직 메세츠데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소도시 멜라닌 남작의 도시 멜라니아였다. 그곳에 지크라엘을 비롯해 여러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예복 대신 모두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고 있었고 표정도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어떠한 장난기도 보이지 않은 체 진중했다.

지크라엘을 필두로 모인 귀족들은 지금 자신의 아래에 커다란 원형의 탁자에 놓인 지도를 보고 있었고 이내 푸른 색 늑대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노년의 남성이 윈랜드가 있는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재상! 이제 곧 적군들이 멜라니아에 당도할 걸세."

늑대의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노년의 사내는 칼리아 후작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의 나이를 보여줬으나 그럼에도 커다란 풍채와 갑옷 사이 보이는 울긋불긋한 근육을 유지한 노년의 사내는 지크문드나 데미아스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언제나 몸의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런 그가 등 뒤에 차여진 검을 보니 여전한 현역의 기사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데미아스와 지크문드를 제외한 이 시점에서 가장 전쟁 경험이 많았기도 하고 데미아스 이전 총사령관 직을 맡았던 은퇴 기사였기에 지금 병사들을 이끌 사람이 필요한 아즈문에게 너무나 알맞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럼에 재상의 부탁으로 다시 전장에 복귀한 칼리아 후작은 오랜만에 갑옷을 입고 이곳 임시로 만들어진 병영에 돌아왔으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그 서늘서늘한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으론 그들이 윈랜드에서 이곳으로 내려올 때까지 그 어떠한 마을도 살아남은 마을이 없다고 했소. 그 손속이 너무 잔인하니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전에 당장 어떻게든 이곳에서 그들을 막아야만 할 것이오."

"흠... 자신감이군요.. 어떠한 전술도 없이 그저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칼리아 후작의 말을 들은 지크라엘이 침을 성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지크라엘 말대로 그들은 사전 어떠한 세작도 뿌리지 않고 그저 있는 병력에 힘으로 쉬지도 않고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칼리아 후작 반대편에 자리해 있는 회색의 늑대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사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재상! 차라리 멜라니아 아래에 있는 부르클린에서 농성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르클린이오?"

"그렇습니다! 멜라니아에서 농성을 하기엔 성벽도 높지 않고 앞이 너무 확 트인 들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감이 과다해 길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아즈문의 황궁으로 오고 있으니 어차피 브루클린 지역을 들릴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적은 숫자인 저희는 산새가 험하고 입구가 좁은 브루클린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게 적은 병력으로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브루클린 백작이 이내 멜라니아 아래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가리켰다. 확실히 그곳은 멜라니아 영지보다는 주변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그 산들은 높고 넓을뿐더러 산세도 험해 산을 타지 않고 돌아서 황궁으로 간다고 하면 꽤 멀리 삥 돌아야 하기에 시간도 오래 걸릴 뿐더러 그곳도 결국 브루클린 영지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브루클린 영지가 아즈문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방어벽임이 분명했으나 단점도 명확했다. 그 길목은 아즈문과 너무 가깝기도 했고 만약 브루클린이 뚫린다면 더이상 뒤가 없었다.

브루클린 백작의 말에 재상이 그것 역시 좋은 의견인지라 잠시 고민에 빠지자 칼리아 후작 옆에 백색과 붉은 장비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아가란 백작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브루클린에 농성이 실패하면 더이상 막을 곳이 없습니다. 바로 황궁과 이어지는 길이고 황궁과의 거리도 가까워 어떠한 준비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이상 아즈문 황궁을 지킬 보루가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재상,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이드오 브루클린 백작."

아가란 백작의 말에 브루클른이 콧방귀를 뀌며 자신의 옆에 세워져 있는 베틀 액스를 들어 보이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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