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크라엘과 칼리아 후작의 말에 그제야 아가란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해왔지만,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라 불만 어린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저희도 사병을 보내 지원도 했는데.."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아가란 백작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기가차지 않은다는 듯이 칼리아 후작이 코웃음을 터트리며 이내 노성 어린 목소리로 일갈했다.
"고작 사병을 보낸 게 대수라고! 사병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모인 자네들의 기사들을 윈랜드로 보냈더라면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네! 아가란 백작! 알겠는가?! 지금 여기 있는 병력들만 제때 윈랜드로 보냈다면 우리가 여기 모여 궁상을 떨 필요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야!" "
"그. 그건.. 그게 다 우리 탓이란 말입니까?"
아가란이 이내 억울한 듯 칼리아 후작의 말을 반박하자 칼리아 후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곳에 모인 모든 귀족들을 훑어 봤다. 그러자 귀족들이 몸을 움찔움찔하며 칼리아 후작의 눈을 피했다.
그런 귀족들의 모습에 칼리아 후작이 이내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대답했다.
"결국 어떻게 되었나?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자네도 들었을 거 아닌가?! 천애의 요새인 윈랜드는 뚫렸고 다시 전장의 지휘권을 이끌 사람도 없어졌소! 결국, 은퇴한 내가 다시 갑옷을 입었다네! 십몇 년이 지나 이 낡아 빠진 갑옷을 그대들 때문에 다시 입었단 말이야! 모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상황이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치달은 건! 다 그대들 하나하나가 무책임함 때문에 이리도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이야! 아즈문은 아스란과 지아란 빼면 전쟁을 준비하거나 제대로 겪어본 가문이 있기라도 하는가?! 지휘를 배우러 북방으로 간 이들이 있긴 하는가?! 지금은 사라진 무아란 마저 전쟁을 지휘한 가문이기도 했어. 지휘권이 없어도 몇 달씩 전방으로 가 아스란과 지아란에게 지휘를 배우기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문이 없으니 이 보시게! 이! 오합지졸이 따로 없지 않은가?!"
칼리아 후작의 일갈에 모두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해갔다. 이내 고개를 숙여 부끄러움을 표했으나 칼리아 후작의 말은 여기서 더 끝나지 않았다. 모든 귀족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계속해서 노성을 터트리자. 귀족들 사이에서 칼리아 후작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칼리아 후작을 제지하려 했다.
"아버지.. 그만하셔도 됩니다.."
"마리아스 칼리아! 네놈도 똑같아! 아무리 우리 가문이 더는 전방에 서지 않는다고 해도 미래를 준비했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그리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 꼴을 봐라! 창피하지도 않으냐?! 왜 아스란과 지아란이 평생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는가?!"
"죄, 죄송합니다."
칼리아 후작을 말리려던 후작의 아들인 마리아스 칼리아도 되려 한소리 듣고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자 칼리아 후작이 이내 모두를 바라보며 다시 소리쳤다.
" 부끄러운 것이야! 은퇴한 날 불렀다는 것이! 이 내가 다시 지휘권을 잡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말이야! 그러니 알리오 아가란! 자네가 지금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지아란과 아스란 가문의 함부로 깎아내리지 마시게! 그들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아즈문은 메세츠데 놈들에게 이 땅은 이미 시체와 피로 가득 쌓여 있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지금 아스란이 없다 해도 투정부리지 말란 소리라네! 그들이 충분히 이 동원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칼리아 후작님..제 생각이 짧았습니다..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언성을 높여 모두에게 소리친 칼리아 후작의 말에 결국 아가란 백작이 고개를 숙여 진심을 다해 사과를 했다. 뒤이어 몇몇 귀족들도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이내 칼리아 후작이 혀를 쯧쯧 차 보인다.
그런 칼리아 후작의 모습에 분노가 차오르던 테온도 왠지 모를 후련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칼리아 후작에 의해 회의장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아 모두가 노년의 칼리아 후작의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리자. 지크라엘이 내려앚은 분위기를 바꾸려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모두의 이목을 쏠리게 했다.
"그, 그만하면 됐습니다. 다르미안 칼리아 후작, 아가란 백작도 사과했으니 더는 이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지금 우린 이곳에 서로 물어뜯으려 모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노여움을 풀어주시지요..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인 귀족 여러분 모두 아스란과 지아란이 충분히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준 것을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칼리안 후작 말대로 모두 그들을 깎아내리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군요.. 자자! 그러니 모두 기분 푸시지요. 지금 우린 그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지크라엘이 모두를 보며 토닥였다. 이내 칼리아 후작이 자신이 너무 열을 냈다는 것에 얼굴을 조금 붉히며 헛 기침을 했고 이내 재상에게 살짝 묵례를하며 사과했다.
"미안하오. 재상. 내가 너무 흥분했구려."
"아닙니다... 자 이제 모두 기분 풀고 지금 현재를 생각해보지요. 일단 멜리니아와 윈랜드 사이에는 대평원이 있습니다. 확실히 저희가 적은 숫자라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적에 공세를 받는다면 꽤 힘들지도 모릅니다. 브루클린 백작의 말대로 성벽도 낮고 앞이 탁 트인 대평원이 있으니 말입니다. 모두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이곳에서 농성을 한다면 그들을 막을 확률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지크라엘이 모두를 보며 묻자 모두가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을 막아낼 확률은 0 퍼센트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 칼리아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윈랜드가 함락되었네, 윈랜드와 메세츠데는 주변의 높은 계곡이 있었고 입구도 좁았지.. 그리고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방벽은 또 어떠하고 말이야?.. 정말이지 천애의 요새라 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인데 그런 요새가 뚫렸다네. 그 뚫리지 않을 것 같던 방벽이 뚫렸단 말이야. 그것도 단 4시간 만에! 그들의 힘은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니 이 대평원에서 전투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생각이네. 브루클린 백작에 제안한 대로 차라리 황궁과 가깝더라도 조금이라도 막을 확률이 올라 갈 그의 영지에서 농성을 해야 함이 옳다고 보여지네 하지만 그곳도 윈랜드만큼 요새로 불릴 정도는 아니니..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야.. 게다가 지금은 데미아스와 지크문드조차 없으니 ... "
칼리아가 말을 하면서도 지금 상황에 답답한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뒷말을 흐렸다. 멜라니아에서 농성을 하나 브루클린에서 농성을 하나 어차피 그곳이 그곳일 정도로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지도를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아도 윈랜드만큼 특출난 지형은 없었다. 그런 그곳도 단 몇 시간 만에 뚫렸는데 지금의 자신들이 어디로 간다해도 막을 수 있으려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칼리아 후작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귀족들의 사병들을 강제로 동원해서라도 윈랜드를 지켜야 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쏘아져 날아가 버린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은 미래를 바꿀 수가 없었음에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어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