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후.. 이제야 요아크 평원이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바다 내음이 담겨 소금기가 섞인 미풍이 진하게 풍겨 온다. 뒤로 자그맣지만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지크문드가 잠시 멈춰 서서 땀을 식히며 중얼거렸다. 그럼에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마리에테가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엘프라 해도 이 먼 거리를 쉬지 않고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숲길을 걸었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심지어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고 여전히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는 모습에 이내 지크문드가 혀를 내두르자 마리에테가 키득거리며 웃어 보였다.
"자! 조금만 더 힘내세요. 이제 숲의 끝자락에 다 왔으니."
"후~ 이 지긋지긋한 숲을 그제야 벗어날 수 있겠군!"
"그런가요? 후훗."
지크문드의 투정 섞인 대답에 마리에테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전 숲이 좋기만 한 걸요. 평화롭잖아요. 특히 이 숲은 더 평화롭지요."
"그건 엘프 들의 생각이 아니오?"
"그렇지요.. 저가 몇천 년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인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점이 있어요."
"무엇인가?"
"왜 인간들은 이 평화로움을 지루하다 하는 것일까요? 어째서 이 잔잔한 미풍이 지루하다고 하는 걸까요?"
마리에테가 이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지크문드가 잠시 멈춰 서며 그녀를 바라봤다.
"허허 그대는 초대 현자라 불리지 않았소? 그런데 모르시는 것이오?"
"그것 역시 인간들이 제게 붙여준 칭호, 전 원하지 않았는걸요."
마리에테의 말에 지크문드가 씁쓸하게 끄덕였다. 아무래도 무언가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보다 칭호를 붙여 말하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특성상 현자라는 단어도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왜 인간들은 이리도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마리에테가 다시 묻자 조용히 땀을 식히던 데미아스가 지크문드 대신 대답했다.
"그건 당연하지 않소?"
"당연하다구요?"
마리에테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데미아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엘프처럼 그렇게 오래 살지 않소, 기껏해야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나간다네 .. 우리는 자네들처럼 한가롭게 인생을 즐기면서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거 등 원하는 것을 이루기엔 시간이 부족하오."
"...그렇군요."
마리에테가 나름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그래요 시간, 태초의 신께서 인간들에게 내린 벌, 시간....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군요."
"그러한 일은 잘 모르겠다만, 부정은 못하겠네, 데미아스의 말대로 우리에겐 무엇을 하든 시간이 부족하지.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한발 나가려 하는게 아닐까 싶어.. 다른 종족들의 눈엔 그러한 모습이 급해 보이고 숨막히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겐 이 시간, 일분일초가 아깝고 중요하다네."
"...아.."
자그마한 탄성을 토해내며 마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 잠시 걸음을 멈추며 데미아스와 지크문드를 보며 말했다.
"당신들도 현자라고 불리나요?"
"그건 무슨 소리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렇지 않네. 만약 조금 전 나눴던 말 때문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라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몇천 년이나 살면서 늙지도 않은 모습을 갖는 엘프 들은 이해하기 힘든 게 어찌보면 당연하네."
지크문드의 말에 마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엘프로서 인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엘프와 인간의 시작부터 끝이 다르니 말이다.
그렇게 마리에테의 질문과 지크문드의 대답 또는 지크문드의 질문과 마리에테의 대답을 나누며 가길 점차 길을걸을 수록 진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향이 바람을 타고 일행을 훑어 지나감에 그제야 모두의 걸음이 다시 멈추게 되었다. 뒤이어 보이는 풍경, 이 지긋지긋한 숲을 뒤로 한 채 넓게 펼쳐진 평원,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불음에 이곳이 요아크 평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원 평화롭게 미풍이 불 때마다 고요하게 녹빛의 풀잎이 춤을 추고 있었다. 겨울의 중반이 되어 감에도 이상할 정도로 이곳은 녹빛이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마음을 고요하게 해준다.
그러한 평온함과 고요함을 느끼던 마리에테가 이내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나요. 모두? 이제 정말 금방이에요."
"그건 몇 시간 전에도 금방이라 하지 않았소?"
마리에테의 말에 지크문드가 키득거리며 묻자 마리에테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여 보인다.
"자! 어서 움직여요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아요. 아마 오늘은 따듯한 음식과 잠자리에서 잠들 수 있을 거에요."
마리에테가 이내 힘차게 소리쳤다. 그러자 잠시 땀을 식히던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에테의 걸음을 뒤쫓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비가 내릴 것 같이 우중충한 구름은 계속해서 태양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아 야영을 할 때 나름 마른 상태로 보냈으나 만약 오늘도 야영을 하게 된다면 비를 쫄딱 맞으며 야영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아직 환자가 있는 일행으로서 어서 빨리 요르문간드의 사람들이 있는 야영지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어서 가요!"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점차 크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바다와 가까워졌음을 말해주며 곧 도착지가 멀지 않았음을 말해줬다. 그러나 좋아하기도 잠시 점차 땅거미가 이는 평원에 한두 방울씩 빗물이 떨어지자 지크문드가 짙은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이런 비가 내리는군. 결국, 따듯한 불과 천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건 한낱 꿈이 되었군 쯧쯧.. 요근래 태양을 본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짜증이 조금 섞인 목소리로 지크문드가 중얼거리자 마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녀 역시 근래 볼 수 없는 태양이 참으로 그리워졌음은 물론 이제 비는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어두워진 평원 일행의 빗줄기도 거세질 무렵이었다. 요아크 평원이 끝나는 길목 사이 온통 어둠밖에 없던 지평선에 불빛과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음이 보이자 비를 쫄딱 맞은 생쥐 꼴이 된 마리에테가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기 봐요! 빛이에요! 연기도! 아마 저기에 그들의 야영지가 있나 봐요!"
"그렇군! 다행히 비를 맞으며 야영을 할 필요는 없게 되었어!"
마리에테의 말에 지크문드가 상기 된 목소리로 대답하자 마리에테가 피식 웃어 보였다.
"어때요 제 말대로 금방이지요?"
"뭐 해가 다지긴 했으나 금방이 맞구려 자 어서 가지! 더는 비를 맞긴 싫구먼."
"그래요! 자 모두들 조금만 더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