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312화 (312/412)

【312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적들이 보입니다!"

한 병사의 외침에 지크라엘이 급하게 쌓아 올린 성벽 위에 올라섰다. 그 성벽 넘어 보이는 지평서 끝에 보이는 새까만 물결 들이 차츰 브루클린 영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소름이 끼치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주변의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을 말라 비틀어지게 했으며 하늘을 나는 새들조차 떨어지게 만드는 메세츠데의 병사들이 보이자 지크라엘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지크라엘의 옆에 칼리아와 아가란을 비롯해 다른 귀족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그들 역시 지크라엘과 비슷한 표정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그들을 보며 침을 성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점차 좁아지는 길목과 양옆에 높게 들어선 산맥에 의해 넓게 퍼져 있던 적들이 점차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그들은 어떠한 불리한 지형임에도 괘념치 않은 듯하다.

"브루클린으로 자리를 옮긴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드는구려? 그나저나 ... 저자가 심상치 않소. 아무래도 이들을 이끄는 자임에 틀림이 없어 보이는구먼.."

칼리아 후작이 나지막이 침을 성을 삼키며 적들의 한가운데 트롤들이 이끄는 마차를 타 있는 한 사내를 가리키자 지크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소름이 끼쳤고 두려움이 물씬 풍겨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얼어붙은 것 같게 만드는 그 사내의 모습을 뒤로 순간 지크라엘과 클루드와 눈이 마주친 듯하다.

"흡.."

"왜 그러시오 재상?"

지크라엘이 이상함을 눈치챈 듯이 칼리아 후작이 의아함을 보인 채 지크라엘에게 물었으나 지크라엘은 지금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일그러지며 귀가 먹먹해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저 알 수 없는 사내와 대면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속에 이내 사내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과도 같은 위엄이 느껴져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지크라엘이 파문이 이는 눈동자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럼에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비명 자신의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옆에 있던 칼리아 후작도 온몸이 난자되어 죽어 갔고 아가란 백작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난자가 된 상태로 지옥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불길로 휩싸이며 살아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이건.."

지크라엘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클루드의 모습이 더욱 커져 오르며 그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지크라엘의 귀를 괴롭혔다. 동시에 다시 변한 장면, 아즈문 황궁이 무너져 내림과 아즈문을 상징하는 태양과 황금 사자의 깃발이 이내 적들의 발에 짓밟혔다.

유일한 황족인 루이서스와 루미에르 그리고 세이실은 성벽에 목이 매달려 죽어 있고 하늘은 온통 까마귀 떼로 뒤덮여 있다. 그럼에 지크라엘의 몸에 떨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지크라엘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재상! 정신 차리시게!!"

"아... 아..."

잔뜩 식은땀을 흘리며 이내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칼리아 후작과 다른 귀족들을 비롯해 성벽 아래 도열해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이게.."

"갑자기.. 왜 그러는가? 왜 정줄을 놓고 있어?"

차마 미래를 봤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게 미래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지금 다가오고 있는 클루드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상 마법을 건 걸 수도 있었으나. 자꾸 그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 마음을 괴롭혔다.

이내 잠시 넋을 잃은 지크라엘이 다급히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다.

"병사들을 준비시켜주시지요 칼리아 후작, 지금부터는 제가 재상이란 직책 대신 총사령관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사령관."

지크라엘의 말에 칼리아 후작이 잠시 꺼림 직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성벽을 내려가며 병사들을 다독이는 모습이 보였다.

뒤이어 지크라엘이 다시 메세츠데 진형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절대로 네 뜻대로 되게 하지 않겠다..."

각지에 모인 병사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하며 성벽 아래 준비하기 도열하기 시작했다. 칼리아 후작은 확실히 소싯적 병사들을 이끌었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카리스마 있게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휘어잡으며 진두지휘를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지크라엘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렸으나 여전히 가시지 않은 걱정은 지크라엘을 계속 괴롭혔다.

이내 모든 병사들이 성벽 아래 모였다. 강제적인 동원령에 어린 소년부터 시작해 늙은 노년의 남성까지 모두가 갑옷을 입고 잔뜩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들이 훈련한 시간은 고작 며칠이 다인 이곳은 오합지졸이라 할 만했으나 그들의 패기는 어느 때보다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모두 메세츠데가 여기까지 내려오며 보인 만행 때문이었다. 이내 재상이 그들을 바라봤다.

침묵이 이는 병사들 사이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긴장을 못 이겨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이도 보이지만 그들의 눈은 짙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만 있는 힘껏 창을 꼬나 쥐며 이겨내려는 병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모두 두려움과 공포로 물들어 있으나 절대 물러서지 않은 패기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지크라엘이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게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몰랐다. 후회 없게 싸워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보며 긴말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진심을 보여주면 자연스레 병사들이 따를 것임을 알았다. 이내 옆에 있던 귀족들도 하나둘 성벽에 내려가 병사들 앞에 서며 지크라엘을 바라보자 지크라엘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즈문의 병사들이여.. 때가 되었다. 오늘 우린 마지막 싸움을 치를 것이다. 이기길 바라지만 패할 수도 있다. 그만큼 적들의 수는 우리의 몇 배나 많다. 우리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이는 것이 당연하다. 겁을 집어먹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린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후회 없게.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 지크라엘은 검을 들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즈문을 지킬 것이다. 그대들은 어떠한가? 아즈문을 위해 검을 들란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 이곳에 와 무거운 갑옷을 입은 이유! 검을 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위해. 한 점 후회 없이 나와 같이 싸워 주겠는가?!"

"예!!"

지크라엘의 말에 병사들이 소리친다.

"나와 함께 적들을 무너트리겠는가?!"

"예!"

지크라엘이 소리칠 때마다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 커져 오른다. 절로 호승심이 일고 두려움이 물러간다.

"나와 함께! 후회 없이 싸우겠는가?!"

"예!!!"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고 완연한 패기로 가득 찬다. 더는 몸을 떠는 이는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집어먹은 이도 없어졌다.

"아즈문의 영광을!!"

"영광을!!"

"아즈문을 위하여!!"

"위하여!!"

이내 마지막 전쟁이 시작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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