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회. 루미에르】
"내가.. 내가 만약..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어떨 것 같니..?"
"예?"
"... 뭐라구요?"
아무래도 루미에르의 말에 무언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세이실도 이런 고민일 줄은 몰랐나 보다 그의 눈이 토끼 눈 마냥 커지며 놀라 했고 루이서스도 당연히 세이실과 같았다.
"저, 정말이에요?"
세이실이 되물었으나 루미에르의 표정은 꽤 진중해 보였다. 아무래도 갑자기 생긴 고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미에르의 모습에 세이실이 잠시 깊은 고민을 빠졌고 루이서스는 파문이이는 눈으로 루미에르를 바라봤다.
"어머니.. 혹시 재혼을 생각하고 있나요?"
진중한 표정에 세이실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에 루미에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비밀을 낱낱이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세이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보다 눈치는 더욱 빨라 보였다. 그럼에 자연스레 긴장감이 들었고 걱정이 찾아들었다. 만약에라도 세이실과 루이서스가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이 들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말한다고 말을 한 건데 목소리에 떨림이 여전했다. 그럼에 루미에르는 연기도 못 하는 바보라며 자신을 자책했으나 눈은 이미 세이실을 바라보고 있었고 세이실의 표정은 이내 의문이 아닌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전 말했던 거 그대로요.. 제가 음유시인들이 쓴 책들도 읽어 봤는데 보통 어머니처럼 행동하는 여인들은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게 주로 보인다고 했어요."
"...그, 그런 건 언제.. 본 거니?"
"황실 서고에는 없는 게 없다구요 어머니."
"...그, 그렇지."
루미에르는 잠시 세이실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모습이 정말 그렇게까지 티가 난 것인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도망친다면 꼭 황실 서고에 있는 음유시인들의 그 이상한 소설들은 다 불태워 버리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뒤이어 세이실이 말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과연 자신은 누굴 생각하며 넋을 잃고 때론 미소를 지었던 것일까? 그러자 가장 먼저 떠오른 일화는 전령으로부터 전장의 소식을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언제나 전장의 소식을 기다리던 루미에르에게 그제야 전령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에게 얘기를 들었다. 그럼에 전령은 곧장 전장의 소식을 전했는데
브루클린 영지에서 메세츠데 적군들에 의해 아즈문이 큰 위기에 놓였다는 소리를 전령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정령은 마치 전장에 직접 참가한 듯이 생생하게 전해주었음에 혹시 자신의 군대가 패퇴하고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들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마흐무드에서 직접 자신의 동생인 성녀 크리스티나가 도와주러 와 상황을 역전시켰다는 말에 얼마나 좋아했던가? 당장 크리스티나를 보러 브루클린 영지로 가고 싶었던 루미에르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전령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벨리알이란 악마가 나타나 크리스티나가 만들어낸 빛의 장막을 부숴내었다고 했고 결국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고 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 루미에르의 모습에 전령은 마치 루미에르를 가지고 놀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전장을 계속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이었다.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리라 생각했던 아스란가의 차기 가주 루크 아스란이 새로운 신식무기를 만들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군의 반절이 넘은 적군을 단숨에 쓸어버렸다고 했을 때 루미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내며 기뻐했다. 그런 루미에르의 반응에 전령이 더욱 신이 난 듯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는 수천수만의 불꽃이 지상을 뒤덮을 때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버섯구름 뒤이어 지상에 그려지는 한 폭의 지옥도, 전령은 그 모습을 천벌이 내렸다라고 표현했다. 뒤이어 이어진 요르문 간드의 도움과 함께 연합군을 결성해서 메세츠데로 진군을 한다는 이야기였으나 루미에르에게는 더이상 다른 뒷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루크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고 심지어 눈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외로움을 타던 자신의 몸이 찌르르 울리며 전류가 흘렀다. 마치 루크 아스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듯 말이다. 그럼에 숨이 가빠져 올랐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상기되어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루크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그가 보인 업적이 이미 전 도시에 퍼져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에 오히려 자신의 업적이라도 된 듯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더이상 기억도 나지 않은 전령의 말이 끝나고 그가 그만 돌아가자 루미에르는 전령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가빠져 오른 숨을 간신히 고르며 거울 앞에 자리했었다. 그 거울에 비친 루미에르의 모습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를 찾아가고 싶었다. 생각이 아닌 실제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그를 당장에라도 안고 싶었다. 남편이었던 제이서스에게조차 느끼지 못했던 감정, 이제는 어떠한 배덕 감도 들지 않았다. 분명 그이도 이해해주리라 대충 넘긴다. 이미 그는 죽은 사람이 아닌가. 그가 살아있을 때는 분명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은 젊었다. 애가 둘이나 있음에도 젊다 생각했다. 자신은 아직 혼자 살아가고 싶지 않았고 가족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연인으로서의 사랑도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루크 뿐이란 걸 알았다. 그는 자신을 다시 여자로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루미에르는 그때 이후로 더이상 예전의 루미에르는 이제 없어졌다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미 그녀의 몸과 감정은 새로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