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회. 전쟁의 끝】
"괜찮은 거야 루크? 그나저나 벨리알은? 라우엘님?!"
레이니가 루크의 몸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러자 루크의 주변에 쓰러져 있는 클루드의 시체를 가리키니 레이니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뒤이어 엘레니아와 안느란테가 놀란 얼굴로 루크를 바라보자. 루크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끝이..어, 어라..?"
그러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갑작스레 어질어질한 머리와 점차 점멸되어 사라지는 시야, 동시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럼에 참을 수 없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루크? 왜, 왜 그래? 루크!"
자신을 향해 걱정스런 레이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상하리만큼 잠이 쏟아진 루크는 결국 흐릿해진 정신을 잡지 못하고 서서히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걱정을 하는 레이니를 비롯해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 들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림과 함께 커다란 피로가 쏟아진 듯싶었다.
☆ ☆ ☆
오랜만에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간 지쳤던 몸이 노곤해지며 피로가 가셨다. 그럼에 천천히 눈을 뜬 루크의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으로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천장은 이제는 친근했으면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준 방안으로 변해있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새로운 삶 속에 이 방안은 자신에게 둘도 없는 따듯한 보금자리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간 정신을 잃고 눈을 떴는데도 왠지 모르게 편안함이 느껴졌다.
"흐음.."
잠시 몸을 뒤척이던 루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얼마 만에 느껴지는 개운함인지 기분이 좋았으나 이상하게 일어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떠한 무게가 있는 무언가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여기서..."
루크가 이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그제야 왜 일어나는 게 힘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름 커다란 침대라 생각했는데 그 침대가 꽉 차 보일 정도로 침대 위엔 레이니와 엘레니아를 비롯해 안느란테와 에이리스 심지어 아스란가에 남아 있었던 로제스까지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마치 예전 마흐무드에서의 잠시 생활을 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비좁은 침대에 모두가 간신히 비좁고 힘겹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웃겨 풋하고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여전히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변하지 않을 사람들 같아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양옆에 잠들어 있던 레이니와 엘레니아가 몸을 뒤척이며 루크를 안아왔다. 아무래도 쉽게 일어나기는 꽤 힘들 듯싶어 이내 일어나는 것을 체념하고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럼에 떠오르는 지난 기억, 신물들을 모아, 여신 라우엘을 만나고 벨리알을 무찔렀다. 마치 소설이나 동화 속에서만 나오는 멋진 용사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말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아련한 얼굴에 루크의 얼굴 때문에 결국 다시 씁쓸함이 자리 잡았다.
"루시.."
하얗던 피부, 기다란 흑발과 커다랗고 순수했던 푸른 눈,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지만, 그녀의 따듯한 온기와 언제나 장난기가 가득했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라우엘에게 듣기로는 신들은 죽지 않고 태초의 존재 곁으로 가 깨어날 때까지 기약 없는 잠을 잔다고 했었다. 그리고 루시에 대한 태초의 존재가 심판을 내린다고 했다. 과연 어떻게 될지, 정말 그녀가 소멸이 될지 또는 자신을 잊게 될 것인지 모르지만 루크는 언젠가 다시 루시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평소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기다리자라고 다짐했으나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아팠다. 너무나 아파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루크.. 괜찮니?"
그때였다.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에이리스가 몸을 일으키며 묻자 루크가 화들짝 놀라며 에이리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아무래도 만나자마자 자신이 쓰러졌음에 오는 걱정일 것이기에 루크가 다급히 슬픈 표정을 지우며 미소를 지었다.
"예. 전 괜찮아요.. 아직 일어날 시간 아닌 것 같은데 더 주무시지 왜 일어나셨어요?"
루크가 언뜻 창문을 바라보니 아직 푸르스름한 햇살이 있음에 새벽녘 인 것 같았다. 그럼에 에이리스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밤새 잠을 잘 이루지 못한 듯싶다.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든다.
"난 괜찮아. 그냥.. 루크가 일어나서 그런가 봐."
"그런가요? 하하.."
에이리스의 특유의 포근한 미소가 루크를 반겨줬다. 그럼에 오는 이 따스함은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이기에 루크의 얼굴에 절로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다. 이내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 위에 올려져 있는 레이니와 엘레니아의 팔을 치운 루크가 침대 밖으로 나오자 에이리스도 루크를 따라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서로 딱 붙어 비좁게 자고 있던지라 에이리스도 나오기 힘들었는지 조금은 애를 쓰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하.. 각자 방에서 주무시지."
"루크 너도 이제 잘 알지 않니? 나나 다른 애들 성격을 말이야. 절대 따로 떨어져서 안 자려고 할 거야 이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하하..."
동시에 에이리스가 루크를 껴안았다. 그럼에 다가오는 이 포근함, 그녀의 커다란 가슴에 따듯함이 전해져 루크를 감싸 안아주자 루크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