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크 아스란 전기-390화 (390/412)

【390회. 전쟁의 끝】

"루미에르 황후님."

"예.. 말씀하세요 재상."

계속해서 지크라엘의 눈을 피한다.

"혹시 말입니다.. 저에게 무언가 숨기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재상? 숨기는 거라니요?"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 동시에 눈동자가 파문이 인다. 왠지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나 그녀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루미에르님, 절 너무 무르게 보지 말아주었으면 하군요 이 나이가 들도록 황궁에서 여러 일을 맡아 왔습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눈치 하나는 다른 이들보다 특출나게 빠른 저입니다. 황후께서 잠시 외출을 즐기고 온 이후로 많이 변해있음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난 시점에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지크라엘의 말에 루미에르가 식은땀을 흘린다.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지크라엘을 보면 어물쩍 넘기려고 하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든 확실한 대답을 원하는지 집요하게 물어오자 루미에르의 입가에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지금 얘기하려는 건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오늘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루미에르가 곧은 시선으로 지크라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 자신이 여태 고민했던 것들을 풀어낼 가장 적기가 아닌가 싶었다. 이내 진지해진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이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재상."

"듣고 있습니다. 황후."

"전 이만... 황후의 자리에서 나오려고 해요."

"....그런가요?"

"예... 아직 조금이라도 젊을 때.. 전.. 평범한 여성으로도 살고 싶어요.. 황성은 저에게 너무나 감옥 같은 곳이에요 재상.."

"...."

루미에르의 말에 지크라엘이 대답이 없었다. 그저 파문이 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황후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루미에르 아즈문이 아닌 그저 예전의 루미에르가 되고 싶어요."

".....이유를 듣고 싶군요."

지크라엘이 침중한 표정으로 묻자 루미에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와 이어지려면 아즈문의 이름을 버려야만 해요. 루이서스나 세이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게 누구인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크라엘이 다시 묻자 루미에르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이내 이어진 침묵 지크라엘은 그런 그녀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자 이내 루미에르의 입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루크 아스란이에요."

"역시.."

지크라엘이 역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에 작은 탄식을 토해냈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생각이라 치부했던 일이 결국 사실이 되었다. 그럼에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아시는 겁니까? 황후님.."

"그럼요.."

"더이상 루미에르님은 아즈문 황실에 관여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권력을 잃는 것이지요. 그저 루이서스님과 세이실님의 어머니로서만 간간이 맥을 유지하겠지만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저에게 이 황궁은 감옥과도 같아요. 특히 제이서스가 없는 이후로 저는 이 지긋지긋한 황궁에 있고 싶지 않아요. 숨이 막혀요. 가슴이 답답해요.."

루미에르의 말에 데미아스와 지크문드와 함께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자유로운 새와도 같은 존재라 했다. 그럼에 황궁은 그 자유로움을 가둘 새장과도 같았다고 했으며 그 새장을 유지할 제이서스가 없음에 그녀는 곧 자유를 위해 떠날 것이란 말이 결국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 우려했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럼에 재상은 그녀를 막아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한나라의 황후이자 세이실 공주와 어린 황제 루이서스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젊었다.

"공주님과 루이서스님도 아시는 일입니까?"

"예... 그들은 제 앞길에 축복을 해주었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쉬고 싶군요..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지크라엘이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아무래도 더는 대화를 이어나갈 순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방금 전 기분 나쁜 꿈을 꾼 이후로 머릿속이 꽤나 어지러웠다.

그럼에 루미에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상념에 빠져 있는 지크라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문을 나가려 할 때 지크라엘의 목소리가 방을 나가려던 루미에르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진정 사랑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저 황궁을 빠져나가고 싶어 만든 이유에 불과 한 겁니까?"

"..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요.."

"그에게 다른 여러 여인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상관없어요.. 그는 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여지가 되어주고 다시 여자로 만들어준 사람이니까요... 아이들과 재상에게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전 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면 이 황궁을 벗어날 순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군요.."

지크라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끝까지 공주님과 황자님의 어머니로는 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루미에르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걱정 때문인 것 같았다. 가끔 몇 있었다. 몇몇 황후가 새로운 남자를 찾아 혼자 남게 된 아이들을 에게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보낸 황후들 때문에 지크라엘은 그것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은 것 같았다. 특히 루미에르 처럼 젊은 여인들이 말이다.

"당연하지요 지크라엘... 무슨 일이 있어도. 루이서스와 세이실은 저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에요.."

"예...알겠습니다."

그제야 지크라엘이 루미에르를 바라봤다. 이내 그의 얼굴에 나지막이 미소가 그려지자 루미에르는 왠지 자신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에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가자 혼자 남게 된 지크라엘이 자신의 검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후...친우여.. 그대의 여인이 새로운 삶을 찾아가겠다고 하는구려.."

지크라엘이 잠시 뜸을 들였다. 검을 바라보니 조금은 고지식했던 제이서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리도 고지식한 사내가 저렇게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영혼과 이어졌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자유로운 영혼은 다시 자유를 위해 떠난다고 한다.

어떻게보면 애초에 맞지 않은 짝이었다. 제이서스와 어울리지 않은 인연이기도 했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제이서스에 비해 황후는 너무나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후..."

잠시 한숨을 토해내던 지크라엘이 칼을 어루어만졌다. 그럼에 제이서스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자. 그가 나지막이 일렀다.

" 이 모든 게 자네 탓이네.. 너무 일찍 가버린 자네 탓이야..저리도 자유로운 분을 두고 먼저 떠난 자네 탓이야...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녀도 많이 힘들어했으니.. 이제 놓아주게나.. 그리고 축복해주게.."

원래의 주인인 황제의 검이 잠시 공명을 하며 얇게 떨려온다. 마치 알겠다는 듯 지크라엘이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검을 조심히 자신의 옆에 놓아두고는 다시 침대 위에 몸을 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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