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회. 전쟁의 끝】
잔뜩 기대했으나 너무나 짧게 끝난 그녀의 사과. 집요한 로제스가 그 점을 놓칠 일이 없다. 그럼에 불만을 가득한 표정이 된다.
"반말이라니요?! 제 아내나 다름이 없는 저나 로제스 누님도 당신에게 존대를 하지 않습니까?"
루크 역시 쉽사리 라이올린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럼에 이젠 울먹임까지 보이는 라이올린이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로제스.. 다닐루님.. 제, 제 사과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리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느낀 라이올린이 이내 흐느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에게 도대체 귀족이란 무엇이길래 이리도 자존심이 강한지 그 무엇이 그녀를 이리도 억울하게 만들고 분하게 만드는 것인지 루크로서는 역시나 이해 불가였다. 그의 비해 로제스는 이제야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만족스러운지 연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루크를 봐서라도 한 번 용서해줄게요 라이올린 아가란! 하지만 다음부터는 우리 서로 안 봤으면 좋겠군요! 당신도 그러는게 좋겠죠? 호홋!"
"..."
루크가 봐도 너무나 얄미롭게 대답하는 로제스의 모습에 라이올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그녀의 손바닥에서 핏물이 작게 새어 나올 정도이다. 그만큼 분하고 억울해 보였음에 라이올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녀에게 들으라는 듯이 로제스가 큰 소리로 웃어 보이며 확인사살까지 한다.
"호호홋! 꼴 좋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체면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제스가 크게 웃어 보인다. 그런 로제스를 향해 루크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좀 속이 풀리나요?"
루크의 물음에 로제스가 한껏 웃어 보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고마워 루크! 몇 년간 묵었던 체증이 확 내려간 것 같아!"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이제 그 누구도 누님 무시하지 못하게 할 거에요."
"그래?"
기분이 좋아졌는지 로제스가 루크에게 더욱 달라붙어 온다. 그럼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난 내 것이잖아요."
"호홋! 맞아! 난 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로제스가 루크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춘다.
한편, 파티장을 나선 라이올린 아가란은 연실 분을 못 이겨 하고 있었다.
"망할 년! 루크 아스란! 로제스 다닐루! 두 연놈들 다 찢어 죽여 주겠어! 어떻게서든 죽여 줄 거라고!!! 감히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나를 욕보여? 망할 년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호홋~ 그럼 안 되는데~"
그때였다. 연실 분을 못 이겨 소리치고 있던 라이올린의 뒤편에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라이올린 아가란이 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만에 하나 루크의 측근이라도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라이올린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여인은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등 뒤엔 두 쌍의 박쥐 날개를 달고 있어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꺅!! 다, 당신 누구야?!"
라이올린이 비명과 함께 묻자 그 흑발의 여인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교양 없게 너무 시끄럽네? 하긴 얼굴 보니 교양이랑은 담을 쌓은 애로 보이긴 하네. 그나저나 아까 뭐라 했어? 루크를 죽인다고?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호홋!"
흑발의 여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라이올린이 몸을 벌벌 떨며 물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아, 악마야? 아니면 마계인?!"
"그건 알 필요 없어.. 지금 중요한 건 네가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야! 로제스라는 그 애는 솔직히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루크 만큼은 안 돼 그는 내 것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루크에게 갚아야 하는 빚도 있으니.. 좋아 내가 루크가 귀찮아질 우려가 있으니 대신 너를 처리해 주겠어! 이 정도면 빛도 청산할 겸 그에게 다가갈 명분이 생기겠지?"
듣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여인이 천천히 라이올린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럼에 어느새 공포에 휩싸인 라이올린이 눈물을 토해내며 뒷걸음질치려 했다.
"누,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여, 여기 마계인이 있어요!!"
"너무 애 쓰지 마 이미 내 기운으로 주변과 바깥의 연결고리를 끊어 놨으니 아무도 오지 않아~ "
라이올린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녀의 말마따나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도 없고 누군가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처음 보는 흑발의 여인과 자신만이 살고있는 공간처럼 주변에는 그녀를 도와줄 그 누구도 없었다. 그럼에 라이올린이 더욱 몸을 떨며 여인을 바라봤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호홋!, 너무 겁먹지마 킥킥! 죽이진 않을 거야 죽이면 죽이지 않은 것보다 더 시끄러워지잖아? 대신 넌 내 인형으로 만들어 주겠어~ 다신 내 명령에 거부할 수 없도록 말이야!"
"제, 제발 안 돼요.."
그 말을 끝으로 흑발의 여인이 손을 들어 보이자. 곧 그녀의 주위에 흑색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라이올린을 향해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그녀를 삼켜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꺄아아악!"
"호호홋!"
그것을 끝으로 곧 흑발의 여인은 모습을 감췄고 혼자 남은 라이올린만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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