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회. 전쟁의 끝】
세이실이 이내 혀를 찼다. 한편, 현우는 그녀의 말마따나 루미에르가 자신을 꽤나 걱정한 듯싶었고 그녀를 위해 편지 한 통 쓰지 않았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들처럼 그녀도 결국 자신에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니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애를 태우고 있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윈랜드 이후로 그녀를 만난 적도 없으니 그 애타는 감정은 더욱 심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황후님에게 저와 관계를 다 들었나 보군요.."
이내 루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자 세이실이 그 여린 손으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거 아세요? 루이서스도 알아요. 이젠 지크라엘도 알게 되었죠! 아마 곧 모든 귀족들도 알게 될 거에요."
"하..하하."
루크가 딱히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어 보이자 세이실이 다시 물었다.
"당신 황제의 자리에 관심 있어요?"
"예?! 그게 무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님!"
현우가 다급히 고개를 숙여 부정을 하자 세이실이 잠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흠... 그럼.. 정말 어머니를 좋아하는 거에요? 뭐 다른 이유 없고?"
"그렇습니다..."
세이실의 말에 루크가 다급히 대답하다 이내 얼굴을 붉혔으나 물어오는 세이실의 모습은 너무나 진중해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가족과 관계 된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루미에르와 자신과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비공식적으로 세이실과 루이서스는 자신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이 될 수도 있으니 루크에 대해 세세하게 알고 싶었나 보다.
"만 약에라도 어머니의 권력에 눈이 멀어 어머니를 좋아하는 척! 하는 거라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 어머니는 황후의 자리를 벗어나려 하니까.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어머니에게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해요 오히려 어머니와 당신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게 귀족들이고 그것으로 약점을 잡힐 수도 있어요! 게다가 그대는 다른 여인들도 많으니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귀족들이 반드시 있을 거에요. 없을 수가 없어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여인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귀족들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절대 첩으로 들일 수 없어요. 그분의 수준에 맞게 본처가 되어야 해요! 알았어요?"
"하..하하.."
세이실의 당돌한 말에 루크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첩을 들이는지 본처를 누구로 정하는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특히 결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알았어요 몰랐어요?! "
잠시 우물쭈물하던 루크가 세이실을 바라봤다. 당돌하지만 한나라의 공주답게 위엄이 느껴진다. 루미에르와 쏙 빼닮은 얼굴이라기보다는 제이서스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성격은 약간 루미에르와 닮았어도 그녀에게 풍기는 이 조그마한 위압감은 제이서스를 닮은 것이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루이서스를 밀어내고 황제의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될 듯했다.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특히 결혼은 더더욱 그렇지요."
"왜죠? 그대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나요?"
"당연히 좋아하죠! 하지만 다른 이들도 차별 없이 똑같이 좋아하는 걸요. 하하.. 욕심이 많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에게는... 제 성격이 이러거든요.. 그리고 결혼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간 너무 바빴고 시국도 좋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루크의 말에 세이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한나라의 황후가 첩으로 들어간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거 맞아요?"
"당연하죠."
"어머니도 이 점 다 알고 있는 거겠죠?"
"그럼요. 지금 당장 가서 물어보셔도 돼요."
여유로운 루크의 모습에 세이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 루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가 얼마나 루미에르를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어서였다. 분명 자신에게 불만이 많을 것임을 알지만 루미에르의 행복을 위해서 세이실이 이내 한발 물러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눈물을 보이게 한다면.. 그대의 목을 베어버릴 거에요."
"하하.. 좋아요! 약속하지요. 공주님."
"전 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라고요!"
세이실이 빽 하니 소리치며 대답하자 여전히 미소를 그린 루크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진심입니다 공주님, 황후님, 아니 루미에르님이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실망을 하신다면 공주님께서 절 친히 심판해주시지요."
루크도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이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들어가 봐요. 연회장 말고 3층 오른쪽 끝 방으로요. 꼭 가야 해요 절대 다른 곳 들리지 말고요! 알았어요?!"
"예? 그게 무슨?"
루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으나 더이상 세이실에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냥 잔말 말고 어서 가요!"
"아.. 예!"
결국 세이실의 다그침에 루크가 다급히 화원에서 멀어져야 했고 이내 화원에 혼자 남게 된 세이실이 멍한 눈으로 화원에 마련된 벤치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달이 크고 동그랗다. 동시에 무언가 공허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어머니가 새로운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도 했던 것 같았다. 그럼에 결국 몰래 루크 아스란을 만나러 왔던 것이고 그에게 확답을 들어야만 했었다.
그 결과 보류였다. 아직 그를 판단하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그의 대답도 시원시원하지 않았다. 두루뭉술, 어쩌면 두루뭉술이 가장 확신한 표현일지도 몰랐으나 유일하게 하나 알 수 있었던 것은 루크 아스란이 적어도 루미에르에 대한 마음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태 수십 권의 로맨스 책을 읽었던 자신의 감이지만 말이다.
세이실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봄이 다가옴에도 밤바람은 꽤 찼으나 마음은 춘풍이 분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이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모든 권력을 버려서라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랑, 그저 허구인 로맨스 소설만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러한 일이 정말 현실이 되어 눈앞에 벌어졌다. 그것도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한편으론 그런 용기가 있는 어머니가 부럽기도 하다.
"에휴..."
잠시 한숨을 내쉰 세이실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분명 갑자기 사라진 자신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 이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 자신도 이러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