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권. 1장. Empathy (4/21)

 제목: 룬의 아이들 2권 덫을 뚫고서, 폭풍 속에

 지은이: 전민희

 펴낸이: 서인석

 출판사: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초판 1쇄 인쇄 2001년 8월 30일

          초판 2쇄 인쇄 2001년 9월 6일

 저자소개: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

           타지 동회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

           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모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  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

          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

          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

          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룬의 아이들-윈터러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1장. Empathy

1. 달과 검, 그리고 사악한 밤 

 한동안 만져보지 않았던 짧은 칼을 잡은 채 캄캄한 복도로 뛰어나올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

도 없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놓친 것에 대한 극도의 자기  혐오 때문에 정신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버린 삶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 형을 자기 손으로 묻

고 떠나온 지 채 한 달도 흐르지 않았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도 말없이 견

뎌냈던 형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명을 모두 다해서 여린 동생을 조금이라도 지

켜 주려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혼자 살아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실제로는 그 자신이 훨씬 힘들고 아팠을 텐데.

 벌써 그런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은 마음이  풀어져 지켜야 하는 것조차 잊고 

이토록 방심했었다. 형이 무어라고 했는데, 형이 그에게 무어라고 가르쳤는데!

 반쯤 넋을 놓고 복도를 뛰다시피 걷던 보리스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당연한 추리가 떠올라왔다.

 윈터러는 방 안의 침대 아래에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란지

에, 그리고 새로 나타난 월넛 선생밖에 없었다.

 게다가 월넛 선생은 그 자리에 누워서  네 시간도 넘게 자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는 동안 

자신과 란지에는 몇 번인가 그 방을 비웠을 것이다. 그때  그가 어떤 식으로인가 검을 꺼내

어 숨겼다면?

 "......"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오늘 처음 만난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고 윈터러가 놓여 있는 방에 혼자 있도록 했단 말인가. 아니,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없었지! 처음부터 별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찌됐든 그 자가 명검을 찾아내어 횡재한 셈치고 당장 내뺀 것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뻔뻔

스럽게 자고 있을 그의 방으로  달려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그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그가 이런 밤중에 멋대로 깨워도 좋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

었다. 그는 오던 복도를 되돌아갔다.

 자기 방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방의 문을 두드린 뒤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란지에, 잠깐 일어나 봐."

 평소 같았으면 이미 깊이 잠들었을 상대방을 이런 식으로 대뜸 깨우는 일은 결코 하지  않

았을 보리스였다. 그가 자신외 시종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

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직 윈터러를 찾는 일만이 급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리스‥‥ 도련님?"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고 곧 촛불 하나가 밝혀졌다. 약한 불빛이 마주선 두 소년을 비췄다.

 란지에는 졸린 기색이라기보다는 피곤해서 해쓱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미

안하다는 생각이 났다.

 "이런 밤중에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제 의무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잠결에 일어났음에도 조금의 불쾌한 모습도,  더듬거리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것이 의무에 대한 성실함 때문일 뿐 자신에 대해 개인적인 충성심을 갖는다던가 하는 것

과는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월넛 선생이 자고 있는 방을 찾아 줘."

 "알겠습니다. "

 왜 찾는지 되묻지도 않았다. 란지에는  방 한쪽에서 손잡이가 달린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붙이더니 앞장서 나가려다가 문득 보리스외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램프를 내려놓

았다.

 "그런 모습으로는 밖에 못 나가십니다. "

 그제야 보리스도 자신의 꼴을 내려다 볼 정신이 들었다.  잠옷 차림에 무심코 집어들고 나

온 것은 길이도 허리까지밖에 오자 않는 데다 소매까지  부풀려진 엉뚱한 겉옷이었다. 란지

에가 돌아서서 장롱을 열더니 큼직한 회색 망토를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보리스 앞으로 다

가와 재빨리 손수 몸에 둘러 주었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순간적으로 손을 주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보리스의 손에 

쥐어진 검을 보았지만 못 본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가시지요."

 한쪽 어깨에 붙은 핀을 채우고 나니 온 몸이 망토로 가져져 자객이나 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서둘러 란지에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 앞에서 란지에는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그는 보

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냥 문을 열까요?"

 끄덕, 하자마자 란지에는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는 동안 

램프를 들어 방 안을 이리저리 비추던 그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더니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계시지 않는군요.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

 그러나 보리스는 도저히 란지에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라진 윈터

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방 안을 전부 밝혀 줘."

 곳곳의 촛대에 불이 붙여졌다. 방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쪽에  그

자가 입고 왔던-그리고 호두도 담아왔던-로브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란지에도 그제야 보리스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먼저 창문으로 다가가 열었던 흔적이 있는가 확인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보리

스에게 말했다.

 "뭔가 찾으십니까? 이 방 안에는 장롱과 침대 밑 정도를 제하면 물건을 숨길 만한 곳이 없

습니다. "

 란지에의 말 대로였다. 보리스는 점차 가설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끼며 현기증마저 느꼈다.

 "성문 밖으로 나가려면 경비병을 거쳐야겠지?"

 "밤이 되면 주인님의 허락 없이 성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 밖의 통로는?"

 "다른 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문은 열려 있겠지만 정원에서 외부로 나가는 입구 쪽에 

역시 경비병이 있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 문으로 나가보았자 소용없

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백작에게 알리는 것?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한데 자신의 개인적인 물건을 찾기 위해 자고 있는 백작을 깨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고려에 앞서서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마음 깊이  편하다

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늘 머릿속에 오랫동안 불편하게 남곤 했었

다. 백작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 날이 새려면 대여섯 시간은 넘게 남아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판단을 제대로 내리

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 문으로는 지금 나갈 수 있다는 거지?"

 달이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어둡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원의  풀들을 푸르게 적시는 달빛이 환했다.  오히려 

성 안의 복도 쪽이 더 캄캄했던 것 같았다.

 란지에가 램프를 낮추어 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걸쳐 준 망토 안쪽으

로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결정을 하게 된다면 결코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유품이다, 형과 아버지의... . 그것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진네만이라는 성

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거다.

 그러나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렸다면?

 "잠깐..... ."

 란지에가 갑자기 몸을 수그리는 순간이었다. 보리스의 눈에도 뜻밖의 모습이 띄었다.

 뭔가 흰 불빛 같은 것이 짧은 꼬리를 끌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인 듯했지만 

또한 하나가 아닌 듯했다. 달빛이 잠시 반딧불로 화하고 유성처럼 날아 떨어지는 듯,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 그들의 걸음을 묶어 버렸다.

 그가 찾던 그 자가 거기에 있었다.

 사라졌던 윈터러를 손에 들고.

 "..... ."

 보리스는 당황해 있었다. 한 번도 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분명 잘 알고 있는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윈터러는 이 순간 이미 그가 알던 그 검이 아니었다. 저 정체 모를 자

의 손에 쥐어지자 그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을 듯한 엄청난 빠르기, 그리고 감당하

기 힘든 살기를 내뿜는 악마의 검으로 돌변해 있었다.

 예프넨의 손에 쥐어졌을 때도 저러한 모습을 본 일은 없었다. 그  자가 손을 뻗어 검을 움

직이는 것에 따라, 눈뜨고 보기 힘든 광채가 곳곳으로 흩날려 갔다... 아니, 춤을 추었다.

 뺨이 오싹해지면서 가슴속까지 선뜩해졌다.  겨울의 검이라는 별칭은 누가  처음으로 붙인 

것일까, 보리스의 조상일지도 모를 그 사람은 지금의 저 자처럼  신들린 듯 검을 춤추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어제 만났을 때는 저 자에게  검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는데.

 "하아..... ."

 빛,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잠시 잠깐 동작을 멈출 때를 제외하면 윈터러의 모습은  육

안으로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무덤가의 귀신불처럼 칼날 전체가 넘실거렸다.

 똑바로 내찔러지고, 다시 걷어들여져 호를 긋는 듯하더니 어느새 머리 위를 단단히 봉쇄했

다. 하늘 꼭대기에는 그날따라 광기를 부르는 것처럼 하얗게 타는 달이 있었다. 산 자와  죽

은 자를 동시에 미치게 할 수 있을 듯한, 무생물조차 빨아들여 삼킬 듯한 빛으로.

 그것은 단순히 기분이었을지, 또는 깨달음이었을지, 보리스는 저 윈터러가 지금껏 자신에게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저 자에게 덤벼들어 이길 수는  없겠다는 그런 감정과는 질이 달랐다. 그가  지금 

도저히 입을 떼지 못한 채 되풀이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저 겨울의 검은, 결코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저것이... 도련님의 물건입니까?"

 곁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보리스는 그 목소리에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 실려 

있음을 알고 놀랐다. 란지에는 다시 앞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언가, 악한 역사가 존재하는 검 같군요."

 마지막 빛이 화살처럼 쏘아져 무지개를 그리더니 이윽고 끊어졌다. 월넛 선생은 이미 자세

를 바로 하고 검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그렇게 보아서일까, 그는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달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 소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는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라고."

 낮과 마찬가지로 익살맞은 어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듯 느껴지는 것이 있

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얼버무리려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두 소년은 일어났지만 그림자처럼 선 채  말이 없었다. 월넛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비록 

아래로 내려졌건만 윈터러의 살인적인 광채는 여전히 피를 원하는 괴물처럼 번쩍거렸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상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제 검입니다. 잠시 구경하신 것으로 알겠으니 그만 돌려주십시오."

 머리 너머로 달을 인 채 역광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월넛 선생은 보리스를 향해 가만히 눈

을 내리깔았다. 그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뜻밖의 대답이 울렸다.

 "그리고 넌 그걸 잃어버렸지."

 보리스는 망토 속의 검을 움켜쥐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힘주어 대꾸했다.

 "남의 집 식탁 아래에서 숟가락을 주웠다고 말하실 셈인가요?"

 "네게 되찾을 능력이 있느냐?"

 보리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턱을 쳐들며 상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저는 당신이 제  검술 스승으로 온 줄로 알고 있었습니

다만."

 '아니라면 당신은 도둑이었다는 말이냐'는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역광속의 얼굴이 문득 일

그러지더니 미소 비슷한 것을 보였다.

 "어린 녀석이 대담하구나, 그러나 이건 너 같은 아이가 쥘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아이도 어른이 되죠."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한 달빛이 마지막으로 칼날처럼 두  사람의 옆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월넛의 목소리에 이제 웃음기 따위는 없었다.

 "그 전에 검이 네 피를 먼저 원할  것이다. 내 진지하게 묻겠는데, 이런 검을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 이것이 바로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던 겨울의 검이냐?"

 이제와서 숨길 이유는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윈터러를 말하는 거라면, 바로 그것입니다."

 "허."

 여전히 월넛은 윈터러를 칼집에 넣지 않은 채 여차하면 상대를 벨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그

대로 잡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학생을 놀리

는 선생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실제로 이 검에 대해 어떤 욕망 내지는 불안감을 

가지고 넘겨주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것인가?

 이어서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보리스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추리를 하고 있는 듯, 침묵하던 그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네 성은 본래... 진네만이군. 트라바체스의 진네만, 윈터바텀 킷 (winterbottom Kit)을 이루

는 두 가지 물건을 모두 소유했던 집안. 그렇지 않은가?"

 보리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당신의  제자가 될 소년은 보리스  벨노어일 뿐인데. 그 

이상의 것을 당신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그는 결심한 듯 윈터러를 칼집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보리스가 기억하

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유연하고 빨랐다.

"검은 돌려주지 않겠다."

 보리스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는 짧게 답했다.

 "돌려 받겠습니다. 절대로."

 월넛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제는 잔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빼앗아 가라."

 보리스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자세를  약간 낮추었다. 그리고 망토를  젖히며 검 손잡이를 

내보였다.

 위협 따위가 통할 리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죽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의 손에 윈터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두 눈을 번히 뜨고 있는 동안은 더더욱 그

럴 수 없었다.

 그가 내보인 것은 검이 아닌 그의 의지였다.

 "조용히 떠나고 싶으면 지금 절 죽이시죠."

 검은 보랏빛 구름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이지러지고 뭉쳐지고 다시 서로

를 앞지르며 달려갔다. 달은 언뜻언뜻 그  얼굴을 보였다. 침묵하는 밤은 흡사 진실로  피를 

바라는 듯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월넛이 커다란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구름 뒤에 숨겨졌을 마른 벼락처럼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북처럼 

둔중하게,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것은 미칠 듯 뛰어오르는 심장의 박동이었다.

 월넛은 한참만에 웃음을 그치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어 보리스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이것 참, 흔히 보기 힘든 녀석이 아닌가.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난 네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베는 일도 없고. 설마 내가 네가 휘두르는 검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좋다. 나와 내기를 해 보겠나?"

 "......"

 대꾸가 없는 보리스를 향해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너를 가르치기로 했으니 가르친다. 내가 신용 없는  자로 보인다 해도 그것은 내가 원

해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 하지만  나는 내년 봄까지 너를 가르치

겠다고 백작과 이미 약속했다. 그러니 그 약속은 지킬 테다. 그러니 그때까지 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한 죽음의 기간을 늘려주마. 어떤가?"

 "무슨 뜻입니까?"

 보리스는 여전히 조금도 누그러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매일같이 내 손에서 검을 빼앗을 기회를 주마.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나는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이 검, 윈터러에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만일 내가 떠나는 날까지 네가 성공

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를 베고 떠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검을 내 것으로 하겠다.  내 말

이 이해가 가나?"

 "....."

 살기 위해 해야하는 선택을 느쪘다. 살아남기 위해 명예를 버릴 수도, 명예를 버리고  단지 

생존하기만 할 수도 없다면, 택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불안한 줄타기뿐이라고.

 그의 어깨에는 형의 생명이 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결코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목숨도 검

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니까. 영원을 사는 저 불멸자들처럼.

 "약속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월넛은 망설임 없이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단도를 하나 꺼내어 보리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것은 가드(guard) 없이 칼날과 손잡이가 일직선으로 이어진 폭이 넓은 단도였다. 특별한 

장식이 없어 단순하게 보이지만 칼집에서 뽑아보니 칼날 표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린 

것이 이색적이었다.

 손잡이에는 문장이 한줄 새겨져 있었다. '재앙을 기억하라'.

 월넛이 말했다.

 "그것을 징표로 맡겨 두겠다.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그

때 그 단도를 내게 돌려다오. 만일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그것을 네게서 되찾

아가겠다."

 보리스는 단도를 손에 든 채 계약을 받아들일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계약이었다.

 뜻밖으로 바로 뒤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받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단순한 말에 불과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놓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보

리스는 천천히 단도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다시 정면으

로 주시했다. 그 눈을 통해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진실 된 것인지 느껴 보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예지가 퍼뜩 눈을 떴다. 방금 뭔가 중대한  것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었다. 단도라든가 검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

었다.

 그의 몸 전체로 약하지만 짜릿한 전율이 흐르고 지나갔다.  이것은 열쇠이자 문인가? 아직 

캄캄한 암흑이나 다름없는 인생에 첫 번째 지표가 되어 줄 선명한 별빛인가?

 계약은 성립되었다. 월넛은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돌아가라.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될 것이니까."

 보리스는 돌아서기 전에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사답게 신의를 지키시기를."

 "그래, 네 이름대로 너 역시 전사겠지. 알겠다."

 보리스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란지에는 잠시 지체하며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월넛은 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떠나기 전에 도련님의 검을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월넛은 피식 웃으며 약간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보기보다 충성스러운 하인이라 그건가?"

 그는 이미 란지에가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것을 생애의 보람으로 삼는 형태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란지에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제겐 이미 당신의 정체가 짐작되는군요. 일단은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겠지만, 도련

님을 지나치게 놀린다면 저도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넛은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조그마한 녀석이 다짜고짜 협박이군.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월넛은 어조를 낮추더니 다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행동은 지금 네 주인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돼."

 그러나 란지에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런 것은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독자적으로 증명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분명 아니었다. 월넛은 겉으로는 아무 것도 느

끼지 않은 양 가볍게 답했다.

 "단지 의무만을 행한다 그건가? 그것만을 최대한으로? 좋아.  난 너와 계약을 하지 않지만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마음은 나는군. 너도 좋을 대로 나를 지켜봐라. 무슨 결과가  오

든지 말이지."

 그러나 이어서 나온 란지에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제 자유 의지에 속한 일을 허락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소년은 돌아서더니 앞서 간 자기 주인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되짚어 따라갔다. 월넛은 그 

자리에 선 채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 의지? 자유 의지라고?"

 그 말은 어린 소년의 입뿐 아니라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평생 들어

보지도 못했을 단어였다.

 그러나 월넛은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2. 대륙의 검사들 

 다음 날부터 보리스의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보리스가 선생이 오기를 며칠 동안 기다리며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연습장

은 성 뒤쪽에 마련된 원형의 공터였는데 첫날 월넛은 백작으로부터 받은 소년용 검을 보리

스에게 내주어 허리에 차게 했다. 그러나 그 검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심지어 열

흘이 지나도 단 한 번 뽑아지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첫날, 맨 처음 보리스가 명 받은 것은 단순한 달리기였다.

 "급하게 할 건 없어. 적당한 속력으로 성 주위를 돌기만 하면 되는 거야. 멈출 시기는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실은 그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보리스가 성을  두 바퀴 돌 때까지 그

래도 월넛은 처음의 자리에서 자기 검을 뽑아 몸이라도 푸는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바

퀴 째 돌 무렵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겠거니 하고 네 번째 바퀴를 돌았다. 벨노어 성의 규모는 잘 알려진 

대로 벨크루즈 최대라고 이름날 정도라, 그때쯤이 되자 보리스도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

었다. 월넛은 또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돌아왔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간 것이겠지.

 그러나 다섯 바퀴, 여섯 바퀴, 그리고 일곱 바퀴 째를 돌 때도 그는 자취를 감춘 채 코빼기

도 내보이지 않았다. 몇 바퀴 더 추가되자 이제 이것은  단순히 선생의 나태함 정도가 아니

라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정도로 절박해졌다. 그만 뛰라고  해야 할 선생이 도대체 돌아오지

를 않으니 멈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정도면 이제 그만 해도 되련만, 보리스는 이런  점에서 묘한 고지식함이 있어서 월넛이 

돌아와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

날 밤 그 손에서 빛나던 윈터러를 본 후부터일까. 월넛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거나 

우스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생애 두 번째 계약을 했다. 내기란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라 그가 결코 

자신을 나태하게 가르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난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어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월넛이 대단한 검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상 정신상태는 형편없는 자여서 단지 보

리스를 속이거나 놀리려고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리스

는 그런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죽여 버렸다. 그런 것으로 불안해 할 바에는 처음부터 내기고 

계약이고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시작한 이상, 쉽게 꺾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검에 어울리는 주인이라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 뭐든 상대로부터 흡수해 내고 말리라는 것을.

 어쩌면 보리스가 심할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을 지닌 탓이었을까.

 그래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란지에였다.

 그러나 그는 지시 받은 일 이외에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차가운 눈으로 보리

스를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만  하라고 말리지도, 물이라도 한  잔 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월넛 선생을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점차 눈앞의 길이 아득해져 갔다. 보아오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

쓰면서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몸이란 건 형편없이 약해빠진 거구나. 겨우 한두 시간의 달리기만으로도 죽을 듯 괴

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좀더 계속한다면 정말로 죽기도 하겠지.

 아니면 의식이 끊기고 무의식으로 돌아서는 순간, 육체는 다시 살아남기 위해 모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다든가, 남이 권하는 휴식이나 물 따위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

겠지.

 끝까지... 살아 남기로 했는데.....

 휘청,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어느새 입가에 찝찔한 뭔가가 흘러 들어왔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충격을 느끼기까지는 오히려  시간이 걸렸다. 침을 몇 번  애써 뱉으며 다시 

정신을 차려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미 몇 바퀴 째인지는 기억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월넛 선생은 뛰라고 했지 기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뛰어서...  자신이 

살아남기에 적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 테다.....

 쿵!

 그렇지만 주위가 이렇게 어두워서는..... .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연습장으로 쓰이는 원형의 공터에 팔다리를 펼친 채 대자로  누

워 있었다. 눈뜨는 순간, 가을 햇빛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렬하는 태양 빛이 곧바

로 각막을 뚫고 들어왔다.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다시 감는 순간, 머

리 위에 찬물이 한통 뒤집어 씌워졌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고 해야 할까, 보리스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탄력으로 그 자리에

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에 란지에가 있는 것을 보았다.

 란지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물통을  내려놓고는 보리스를 향해 마른 수건을  내밀었

다. 그것을 받아 얼굴을 닦는데 란지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께선 아직 오시지 않는군요. 제 임의로 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용서하기 싫으면 어디 좋을 대로  해 봐라, 라는 듯한 말투에도  보리스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해 준 란지에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동안 고생을 해서 머리가 단순해진 탓이었을까.

 "알았어. 고마워."

 물이 옷 전체로 줄줄 흘러서 그는 허리에서 검을  풀어놓았다. 아무래도 물에 젖으면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본래의 코스로 돌아

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바퀴 정도 다시 뛰었을 즈음인가, 월넛 선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로즈니스를 곁에 데리고서.

 사냥복 차림의 로즈니스는 손에 얇고 가벼워 보이는 연습용 검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보리

스와는 달리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신나고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

되어서는 월넛 선생에게 끊임없이 종알종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가 든 검은 옷깃조차 베기 힘들 정도로 무딘  날에 장식만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허리에 꽂았다가 다시 뽑아 겨누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

문을 어느 정도 받아주고 있던 월넛 선생은 이윽고 저만치에서 달려오고 있는 보리스를 보 

았다.

 그리고 안색이 변했다.

 "멈춰!"

 서서히 느리게 뛰면서 드디어 월넛 선생 앞에 가 멈출 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선생이 

깜빡 잊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그런다고 진짜 계속 뛰고 있다니 너도 참 대단

한 고집이구나' 정도의 말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것은 뜻밖의 불호령이었다.

 "왜 검을 풀어놓았느냐!"

 보리스와 란지에 모두 월넛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로즈니스조차 움찔 놀라서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보리스는 잠시  멍해져서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고  설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네가 지금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네게 가르치는 것은 검이

다! 무겁다고 검을 풀어놓는 정신으로 무슨 검술을 배우겠다는 거냐! 이런 한심한!"

 물론 무거워서 검을 풀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 순간 대꾸도 변명도 필

요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당장 풀어놓았던 검을 집어든 채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

금까지 자기가 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은 일이  없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월넛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명백히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에 변명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말은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따위가 아니었다.

 "벌을 주십시오."

 월넛도 기다렸다는 것처럼 냉큼 대꾸해 왔다.

 "그래, 벌을 주마."

 로즈니스는 놀란 나머지 몇 걸음 물러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만치 캐미아가 

선 것이 보이자 얼른 이리로 오라고 정신 없이 손짓했다. 자신 또한 이 월넛 선생의 제자가 

되기로 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도 보리스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던 것이다.

 월넛 선생은 란지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보리스가 벨노어 성을 몇 바퀴 돌았느냐?"

 "열 다섯 바퀴입니다."

 월넛은 다시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딱잘라 말했다.

 "앞으로 매일, 똑같은 일을 아침마다 해라. 내가 이 성을 떠나는 날까지."

 로즈니스를 비롯해서 방금 달려온 캐미아의 얼굴까지 파래졌다. 이  성을 하루에 열 몇 바

퀴씩 돌라고?

 그러나 보리스는 어려서부터 강한 개인임과 동시에 정치적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트라바

체스에서, 응석을 받아주는 일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커온 소년이었

다. 그는 짧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로즈니스는 이 선생을 새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보리스와 이야기를 끝낸 월넛

은 고개를 돌려 두 꼬마 아가씨를 보더니 다시 실실  웃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다시 

장난감 놀이 같은 검술 지도를 위해 연습장 한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보리스가 몸을 돌리자 란지에가 어느 새 그가 마실 물 한잔을 받쳐 들고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이  시종의 손에서 물을 받아 마시면서  보리스는 그가 질기게 

버터야 하는 이 싸움의 동지라도 되는 양 느껴졌다.

 그러나 로즈니스와 캐미아가 검을 갖고 어울려 놀도록 해 버린 뒤 멀찍이 물러나 선  월넛

은 잠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 참... 내가 도대체 왜 쓸데없이  저 녀석한테 화를 낸 거지.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됐었

나."

 그 일이 있은 후로 보리스는 다시는 검을 허리에서 풀어놓지 않게 됐다. 연습을 끝내고 쉴 

때는 물론이고 식사를 하거나 백작 내외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잘 때에도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바로 머리맡에 놓아두고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리스는 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행동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정

확히 깨닫게 됐다. 이곳은 평화로운 고장의  아름다운 성, 하인들은 모두 그를 섬기고  백작 

내외는 겉으로 그를 아들처럼 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너무

도 당연한 일인데, 자꾸만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을 항상 몸 곁에 둠으로써 그것은  이제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분명한 사실이 되어갔다.

 자신은 적진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스스로가 아직 

약해빠진 나머지 이 이상 경계한다  해도 일어날 일을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사실을 

말하자면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언제 누가 다가와 목을 베어버린다 해도 지금의 그에게 막을 

방법이 있는가.

 그러나 그 검이 뽑혀지는 일은 도무지 없었다. 연습장에서조차,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와 캐

미아를 붙들고 시답잖은 놀이를 계속할 뿐, 보리스에게는 아무런  체계적인 지식도 주지 않

았다.

 명령한 대로 매일같이 달리기를 하는 생활만이 한 달도 넘게 계속되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나서도 시간과 기력이 남게 되자 마지못해 시킨 것이 검을 머리 위로 똑바로 올렸다가 아래

로 내려 겨누고, 다시 올리고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마치 일부러 지루한 것만 골라  시켜서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루한 일을 반복하는 보리스를 유일하게 지켜보아주는 것은 항상 곁에 있는 란지

에뿐이었다. 어떤 평가도 조언도 격려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지켜보아 주는 눈이 있다는 것만

으로도 보리스는 묘하게 힘을 얻었다.  그조차도 없었다면 정말 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란지에에게 하지는 않았다.

 "아가씨, 오늘은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아요."

 주방 아주머니에게 갔다가 이야기를 얻어듣고 온 캐미아가 자기도 뭔가 볼 줄 안다는 듯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즈음이 되자 캐미아가 아니라  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은 어슴푸레한 비구름을 품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

 로즈니스의 목소리는 일부러 월넛 선생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살짝 높아져 있었다. 예상대

로 선생이 곧장 대꾸해 왔다.

 "그럼 오늘은 연습 그만두고 들어가서 이야기나 할까?"

 "네!"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선생님?"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월넛은 보리스와  로즈니스를 드러내 놓고 차별했다. 로즈

니스가 뭔가 하자고 하면 뭐든 선선하게  들어주었지만 보리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

다. 보리스가 본래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소년이기도 했지만, 월넛은 심지어 그와 대화하

는 것조차 피하는 것 같았다.

 로즈니스까지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을 정도였다. 본래부터 남들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보리스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일단 한 가지만 생각해

도 그랬다. 보리스가 그 뭐라는  소년을 이기지 못하면 바로 자신한테  재앙이 닥치지 않겠 

는가! 백치한테 시집을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로즈니스는 여전히 검을 올렸다 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보리스 쪽을 흘끗 보더니  말했

다.

 "여기 있으면 비 맞을 텐데, 오늘은 오빠도 같이 들어가서 얘기 듣게 해요, 네?"

 "그럴까?"

 예상 대로였다. 로즈니스가 말하자 보리스와 란지에도 함께 성 안의 거실로 들어가게 되었

다.

 그들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비가 내렸다. 유리창 밖으로 푸른 직선의 비가 끊임없

이 그어지는 것을 보리스는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륙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또 많은 검사들이 있지. 오늘은 그들에 대한  얘기나 해 

줄까."

 드디어 월넛 선생이 입을 뗐다. 그러더니 사이를 두고 과자를 세  개나 집어서 한 입에 쑤

셔 넣었다. 그리고 목이 막히자 따뜻한 차를 물처럼 꿀꺽꿀꺽 마셔서 다 녹여버렸다.

 "아, 거 맛 좋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파지는데. 본래 뭔가  한참 먹고 있을 때 더 배가 고픈 

법이란 말이야. 넌 그런 거 느껴 봤냐? 한참 배고프다가 드디어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먹어

대는데, 어차피 자기가 다 먹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시라도, 더 빨리 먹고  싶어서 

초조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기분 말이다. 느껴 봤어?"

 보리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검사 이야기를 한다고 하다가 이야기가 엉

뚱한 데로 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배고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보

리스였지만 아직껏 그런 감정은 경험한 일이 없었다. 이미 먹고 있는데도 더 먹고 싶고,  이

미 자기 것인데도 그걸 어서 씹어 삼키지 못해 안달하게 된다고?

 실제로 배를 곯아본 일이 없는  로즈니스는 아예 황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귀족인 그녀가 

음식에 대해 저런 식으로 집착하는 것을 점잖게 느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월넛은 두 사람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식욕이란 것도 실은 대단히 강력한 욕망인데 말야,  거기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그걸 억누

를 수가 없고 충분히 만족스러운데도 자꾸만 더 탐닉하게 될  때가 있다. 게다가 인간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건 더 불안정한 욕망이지. '먹고 싶다!'라

는 것은 틀림없는데 조만간 더 먹지 못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란 말이야. 그러면 어

떻게 되느냐, 지금 먹고 있는 그것을 가능한 한 더 좋은 걸로 하려고 신경을 쓰게  돼. 한시

바삐 뱃속에 먹을 것을 쓸어 넣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 중에서도 최고의 맛, 최고의 조합

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서 골몰하게  되지. 평소 같으면 그냥 먹었을  맛없는 부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직 가장 나은 부분만 골라서 먹는 거야. 문제는 이렇게 식사를 끝내고 나면 쓰

레기가 많아져. 먹다 남긴 것 투성이가 되거든."

 보리스는 문득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식욕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그건 모든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가지고 또 가져도 더  갖고 싶고, 올라가고 또 올

라가도 더 올라가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식욕에는 분명 어느 순간  분명 한계가 오는 

것이 틀림없는데 다른 욕망들은? 그런 욕망들은 언제 한계가 그어져 끊기는 것일까?

 갑자기 월넛이 로즈니스를 보며 물었다.

 "로즈니스,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어냐?  이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원하는 게 있냐?"

 "네?"

 평소 갖고 싶은 것을 참은 적이 없는 그녀인지라  그런 질문이 낯설었던 듯했다. 아버지가 

'뭐가 갖고 싶으냐, 로즈?'하고 물을 때는 그 것을 주기 위해서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은 아니었다. '아마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소원이 있다면 그게 뭘까?' 라는 식의  생각

은 그녀에게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전 다 갖고 있어요. 또 뭔가 갖고 싶으면 아버지가 다 해주시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아닐 텐데. 아버지가 들어 줄 수 없는 '그 소원'이 있지 않으냐."

 "그게 뭔데요?"

 월넛은 고개를 젖혔다가 묶은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하하... 아니, 아버지가 좀 도와줄 수는 있겠군. 너, 켈티카의 궁정에서 데뷔하게  될 때 가

장 아름다운 처녀로 주목받고 싶다고 바라고 있지 않으냐? 그래서 수많은 귀족 청년들의 프

로포즈를 받으며 누구를 택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고 말이지, 안그래?"

 "네... 네에?"

 로즈니스는 어찌 보면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일 없다는 듯한 얼굴로,  또 달리 보면 

완전히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월넛은 이제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넌 어떠냐?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네 소원을 말해 볼 테냐?"

 그 즈음 보리스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누구의 은혜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할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월넛은 대뜸 말했다.

 "로즈니스의 소원보다는 이루어지기 쉽군. 적어도 경쟁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경쟁자라고요?"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로즈니스는 방금 전에 소원 같은 건 없다고 말하던 것은 그새  잊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월넛은 대수롭잖은 어조로 대꾸했다.

 "아, 너한텐 경쟁자가 있어. 딱 네 나이 또래인데, 벌써부터 켈티카 사교계에서 아노마라드 

최고의 신부감으로 자랄 거라고 소문이 자자 한 아이가 있거든.  그 애를 제치지 못하면 네 

꿈은 물거품이 되겠지."

 "게 누군데요!"

 정말로 화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로즈니스가 아무래도 오늘 안에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티나 공작의 딸, 클로에 다 폰티나라는 애지. 직접 봤지만 정말로 미인이 되겠다  싶은 얼

굴이었다고."

 "도 안 되잖아! 거짓말이야!"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를 놀리고 있었지만 로즈니스에게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처

음 왔을 때 호두열매 때문에 한 차례 속았다고 팔짝팔짝 뛰었던 적이 있는데도 월넛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리스는 솔직히 

월넛이 말한 저 클로에라는 소녀가 실제 인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하시고 하시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보리스는 월넛이 가끔 하는 장난을 달갑게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저 

자는 아직 속을 알 수 없는 경계 대상이었다.

 뽀로통해져서 더 말도 하지 않게 된  로즈니스를 쳐다보며 한 차례 키득거린 월넛은  남은 

과자를 우걱우걱 다 먹어버리고는 과자 가루를 곳곳에 흘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 최고라고 하는 기사가 누군지 아느냐?"

 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보리스였다. 당연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견문이 좁은 녀석이군. 강피르 자작이다. 기사답게 창을 잘  쓰고, 또 말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도 대적할 자가 없지. 벌써 마흔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아노마라드 안에선 아직 그에 

버금가는 기사가 없다고들 그런다. 현재 체첼 국왕 폐하의 근위 대장이고 폐하의 총애도 아

주 두텁지. 먼발치에서 봤는데 콧수염을 두 갈래로 날렵하게 기른 것이 무지 점잖아 보이는 

자였단 말이야. 과연 평판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히 부인네들한테 예의바르고 정도

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자라고 소문이 들었어."

 그 정도 설명만으로도 대강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월넛은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아노마라드 북쪽에 있는 오를란느(Orlanne)는 영토가 아주  좁지도 않은데도 공국을 자처

하며 아노마라드의 국왕 폐하를 죽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나라지. 그  방식의 편리한 점을 

일찍이 깨달아버린 자인 것 같아. 그 오를란느의 공작이란 자 말이야."

 또 옆길로 새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 오를란느 공작의 아들이 바로 그곳 최고의 검사라지. 이제 열여덟쯤 되었다고 했던가? 

나이답지 않게 겸손한 자라서 그걸로도 상당한 명성을 얻었지. 몇 년 전 하이아칸(Haiacan)

의 항구 도시 엠그란드에서 열렸던 '실버스컬(Silver Skull)'  에서 우승을 하고도 그 영예를 

주최국인 하이아칸의 소녀 여왕에게 돌린 일은 아주 유명하지.  그녀가 떨쳐 일어나 출전했

더라면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오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던가? 덕택에 젊은 공자가 하이아칸 

여왕에게 청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도 했고 말이

야."

 "실버... 스컬이 뭐죠?"

 보리스는 정말로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앞서 말한 소문 역시 듣도보도 못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월넛 역시 똑같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버스컬을 몰라? 열 다섯 살부터, 스무 살 생일을 넘기지 않은 대륙의 모든 소년 소녀들

이 루그란(Rugran) 국왕이 내리는 순은의 해골을 놓고 한  해에 한 번 무예를 겨루는 대회

라고! 본래는 루그란 전통의  풍습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전  대륙적인 제전이 된 경기지. 

설마 트라바체스 사람들은 실버스컬에 출전하지 않는 건가? 하긴 아직껏 트라바체스 출신이 

우승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긴 하지만 말이야."

 보리스는 정말로 트라바체스 사람들이 실버스컬 대회에 출전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몰

랐다. 그러나 형 예프넨을 떠올리지 않을 수 는 없었다. 형은 훌륭한 검술을 지니고  있었지

만 한 번도 그런 대회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트라바체스에서 그런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그리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그럼 그 옆의 렘므(Lemme) 왕국으로 가볼까. 거기엔 진짜 무시무시

한 자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렘므 국왕의 여동생인 지나파  공주고, 또 한 명은 바로  님

(Nym) 반도 끝과 엘베(Elbe) 섬 등지에서 지금도 흩어져 살고 있는 야만족 캄자크의 한 전

사다. "

 빗발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클로에라는 정체 모를 소녀의 일에 골몰하고 있던 로즈니스

도 슬슬 다시 월넛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어때, 공주와 야만족이라니 꽤나 이질적이지? 그게 렘므의 방식이야. 가장  강력한 캄자크

를 비롯해서 대략 네 부족의 야만족들이 북방영토 내에서 활개치며 살아가고 있는데 국왕은 

어느 정도 그것을 수수방관하지. 특별히  저들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야만족들은 저 

절로 렘므의 국경을 지켜 주거든? 물론 야만족들도 머리는 있는지라 강대한 군대를 가진 렘

므 왕국에게 정면으로 덤볐다가는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하여간에 이 별난 공

생관계 덕택에 북 렘므, 즉 님 반도 끝과 그 근처  섬들은 호위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는 감

히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야. 야만족들은 렘므 사람을 잡으면 몸값을 흥정하지만, 그 외  다

른 나라 사람을 잡으면......"

 월넛은 갑자기 로즈니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머리털이 붙은 채로 가죽을 벗겨서 썰매 장식을 만들지."

 "엄마야!"

 화들짝 놀란 로즈니스가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팔을 움켜잡았다가 다시 급히 놓았다. 그러

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있는 캐미아를 붙들어다 손을 꽉 쥐고는 한

숨을 휴 내쉬었다.

 월넛은 그저 씩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다지 만족한 웃음 같지도 않았다.

 "지나파 공주는 렘므 왕가의 전통적인 혈통대로 타고난 무골이라 키도 크고 체격도 대단한 

여자지. 한때 야만족들이 렘므 왕국의 통치에 반발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지나파 공주가 

선봉에 섰는데 그때 수많은 야만족들의 골통을 빠갠 걸로 유명해진 것이 바로 그녀의 플레

일(flail) '새비지이터(Savage Eater)'야. 무기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는 반항하

는 야만인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그런데 그런 그녀한테 끝끝내 굴복하지 않는 야만인이 또 

있으니 그 자가 캄자크 족의 시고누라는 자란 말이야. '꺾이지 않는 시고누', 들리는 바로 그 

자는 무기도 필요 없고 아예 맨손에 맨몸 자체가 그대로 무기인 자라는데, 직접 본 일은 없

지만 기가 막힌 주먹질과 발차기를 구사한다고 하더군. 둘은  4차 엘베 전투에서 직접 마주

칠 기회가 있었는데 결판은 내지 못했어.  그래서 아직도 누가 최고인지 가리지 못한  거지. 

둘은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해도 서로 결코 화해할 수는 없을걸."

 "야만인이 공주를 이기지 못해서 다행이에요."

 호르르 한숨을 쉬며 로즈니스가 말했다. 그녀는 지나파 공주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야만족

이 공주의 머리가죽을 벗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오싹해지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루그두넨스 연방이다. 뭐 말할 것도 없이  레코르다블 출신일 거란 사실은 뻔

한 거고...... 바로 용병대장 두르가나라는  잔데, 그 자가 이끄는  용병단 '청동 번개'는 천여 

명도 넘는 대규모 용병단으로 웬만한 왕들의 직속 부대보다 더한 규모와 전투력을 자랑하는 

조직이란 말야. 레코르다블은 강한 세력을 가진  용병단들이 정권조차 좌지우지하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청동 번개'는 첫째, 아니면 둘째로 꼽히는 강력한 집단이다. 청동  번개의 중요

한 인물들은 다들 한 번 이상 두르가나에게 도전해서 굴복당하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두르가나는 잔인하면서도 또 대단히 영리한 자라, 한 번 적대 관계가 되

었던 자는 언제라도 찾아내어 반드시 죽여버린다고 그래. 다만 그 자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웬만한 전투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는 일이 없어졌어. 그러니 실력은 좀 녹슬었을 수도 있겠

군."

 이야기가 맺어지는 분위기인데도 트라바체스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모국에 대한 

어설픈 애국심 같은 것은 보리스에게도 없었고, 다만 평소  항쟁으로 밤낮을 보내는 그곳에

서 이름난 전사 한 명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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