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권. 2장 Haunted Land (17/21)

2장 Haunted Land

1. 진실을 찾아서 

“각하, 아가씨가 오셨네요."

섭정의 집에 오면 문 밖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나물을 다듬거나 생 

선을 손질하거나 하고 있는 절은 부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섭정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보통 그녀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 그러면 그녀 

는 손을 닦고 일어나 집 안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까지 가서 방문자 

가 왔음을 알리기 마련이었다. 때때로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없으면 

사람들은 그 평상에 앉아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음에 찾아오거나 하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가지 드문 예 

외를 제외하면 그녀를 거치지 않고 섭정을 직접 찾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 찾아온 것은 그 몇 안 되는 예외에 속하는 한 명이자 유일하게

그녀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 부인이 없는 

시간에 찾아와 다짜고짜 섭정의 방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하 

는데다 만일 있다 해도 심지어 무시해버리고 지나치는 일도 있었다.

어찌 됐든 명목상 자신의 어머니인데도 말이다.

"들어오래라."

턱끝을 까딱까딱 하며 기다리고 있던 리리오페는 방 안에 있는 섭 

정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문을 밀고 들어가 냉큼 닫았다. 양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싫으면 아침나절에 오려무나."

섭정도 리리오페가 부인을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묵 

인하는 것은 자신 역시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존중하는 것은 섬사람들로 족하며, 자신들 부녀는 그럴 필요 

가 없다는 이상야릇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침엔 스콜리에 가야 되잖아요. 아아 지겨워, 언제나 끝날까."

“한 해밖에 남지 않은 걸 뭘 그리 신경 쓰느냐."

"올 봄엔 정화 의식도 할 텐데, 내친김에 확 졸업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리 섭정의 딸인 리리오페라 해도 섬의 오랜 규칙을 멋 

대로 깰 수는 없었다. 리리오페는 헥토르와 마찬가지로 1월 태생인지 

라 올해 초에 I5세가 되었다. 따라서 헥토르가 그랬듯 정화 의식을 먼 

저 하고 그 다음 해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리리오페가 그토록 졸업을 바라는 것은 단지 귀찮은 일을 덜고 싶 

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화의식과 스콜리 졸업, 그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는 순간 그녀는 명실공히 섭정의 뒤를 이을 소녀로서 사람들 

앞에서 확고한 권위를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평범한 소녀처 

럼 행동하는 일은 지겨워졌고, 사제들과 같은 특권 계층이 될 수 있다 

는 희망만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요, 아빠, 이번에 저기 장서관에 불났던 일 말이예요.

그게 정말로 그냥 실수로 일어난 화재였을까요?“

섭정은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조금 뜨더니 리리오페의 얼굴을 살펴 

봤다. 그리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수가 아닌들, 뭐 별 일이겠느냐. 그런 걸 파헤쳐서 네게 득 될 것

이 없느니라."

"장서관이 탄 것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기에 있던 

책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을까요?“

섭정은 가만히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그곳이라면 내 언제고 한 번 손을 보아주려 했거늘. 이런 일을 두 

어 손대지 않아도 일이 풀려간다고 하지,"

리리오페는 장서관에 무엇이 있는지, 섭정과 일리오스 사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몰랐으므로 섭정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장서관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 

런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뭐 그럴 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좀 궁금한 것이 그 땅꼬마 녀석 

을 확실히 누가 때렸던 것 같은데 때릴 사람이라면 뻔하거든요? 아빠 

도 아실 테지만요. 그 애들이 혹시라도 화재랑 관련이 있다면 그걸 알 

아두는 것이 아빠한테 도움되지 않겠어요?“

리리오페나 섭정 역시 나우플리온과 다프넨이 가진 것과 비슷한 심 

증으로 에키온 일당을 지목하고 있었다. 다만 다프넨이 모두가 무죄 

라는 최초의 생각에서부터 이상한 점을 찾아 혐의를 차근차근 밟아나 

갔다면, 리리오페는 증거가 뭐 어찌됐건 평소 생각하던 대로 대뜸 혐 

의자를 찍은 셈이었다.

"에키온은 네 사촌인데 굳이 그들과의 관계에 골을 팔 필요는 없을 

것이야. 리리, 너는 아직도 헥토르가 못마땅한 것이냐?“

리리오페는 입술을 조그맣게 비죽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섭정의 말 

이 옳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헥토르와 인연을 맺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리리오페가 자신의 불만을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뜻밖 

으로 섭정이 먼저 말했다.

“헥토르와 너는 둘 다 청동 표범 지파에 속하니 전통적 관례에 맞는 

 혼인이랄 수는 없겠지. 정히 그가 싫다면, 그보다 나은 상대자로 적당 

 한 이가 있느냐?“

"아빠!"

리리오페는 예쁜 눈썹을 찡그렸을 뿐, 이어서 말하지는 않았다. 섭 

정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입에서 리리오페가 바라마지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택하고자 하는 것이 혹 검의 사제가 될 소년이라면, 그걸로도 

좋을 것이야."

리리오페의 얼굴이 순간 살짝 달아올랐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섭정 

의 말이 예전의 반대를 철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가 반드시 검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 속에서만 허락하고 있 

는 셈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조금 후 눈을 살짝 

치뜨며 대꾸했다.

“잘못된 말씀은 아니에요. 어쨌든 전 패배자는 원치 않으니까요. 내

게 어울리는 상대는 승리자가 아니면 안 돼요."

그것이 결투의 패배자였든, 실버스컬의 패배자였든, 검의 사제가 

되지 못한 패배자였든, 그녀가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손쓸 수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모르페우스 사제가 오이지스를 이제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생 

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후로 이미 이틀이 흘렀다. 그 동안 다프넨은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몇 번인가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무 

리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접곤 했다.

스콜리가 파하면 모르페우스 사제의 집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 

는 것이 요즘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 날도 그런 식으로 모르페우스의 

집을 거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직 낮인데 나우플리온이 먼저 와 있 

었다. 보아하니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소식이 좀 있어."

첫 번째 의혹이 제기된 후로 나우플리온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약간의 조사를 했다. 화재가 났던 날 다프넨 또래 소년들의 행적을 알 

아본 결과, 그 날 마을 사람들이 장서관으로 달려가기 전에 얼굴이 창 

백해진 한 소년이 좀 이상한 태도로 마을 어귀에 서 있었던 것을 기억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스콜리의 교장과 이야기해 보니 전날까 

지는 멀정하다가 화재 다음 날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스콜리에 나오 

지 않은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중 둘은 그 다음 날도 나오지 않 

았다고 했다. 다만 그들 가운데 에키온은 끼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너와 나의 심증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지목할 수 있 

게 된다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아무 소용이 없어. 기적이 일 

어나서 오이지스가 깨어나 모든 상황을 말해주거나, 그들이 스스로 

자백해 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겠지. 답답한 상황이야."

나우플리온은 깍지낀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 

다. 다프넨은 그가 굳이 직접 나서서 이런 조사까지 하는 이유가 다프 

넨 자신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녀석들을 은밀히 겁주는 것 정도랄까. 예를 들 

어 네가 장서관에 들어갔을 때 실은 오이지스가 약간 의식이 있어서 

뭔가 말을 남겼다던가, 그런 식이지."

"저, 나우플리온. 전에 벨노어 저택에 있을 때 말이에요..... 그 때 란 

지에 동생 란즈미 기억나시죠?“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하려는 말을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소통“ 이라는 것이지 오이지스에게 그걸 쓸 수는 없냐고 묻고 있 

는 거냐? 물론 써볼 수는 있겠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 

건 어느 정도 기력이 있는 상대일 경우에만 안전해. 란즈미와는 달리 

오이지스는 지금 몸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 

람의 영혼과 직접 맞부딪쳤다가는 그 충격으로 약하게 붙어 있는 숨 

이 끊어져버릴지도 모른다. "

다프넨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 때의 상황을 모두 목격하고 

있었거나....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달여왕을 말하는 거냐? 하지만 달여왕은 모든 것을 보았다 해도 

이런 경우 흔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달여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프넨은 우물쭈물하다가 다 

시 말했다.

“달여왕 말고.....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의 영혼 같은 것이 남아서 떠돌

고 있었다거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우플리온은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프넨의 얼굴을 정면 

으로 바라보았다.

“너, 그 날 장서관에서 오이지스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에?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잠깐, 너 만일에 정말로 그런 혼 같은 게 떠돌

고 있다고 한들 그들이 우리와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다프넨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말을 한들 나우플리온이 그 말을 

믿어줄 지 쉽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로 아저씨가 곁에 있었더라면 

좀더 이야기가 쉬웠을 터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나우플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 직접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 거구나? 적어도 그렇 

게 믿고 있는 거지? 내 말이 맞냐?“

"아니, 그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야, 임마. 네가 지금 방금 그렇다고 먼저 말했잖아. 네가 그렇게 말 

하니까 혹시나 싶어 묻고 있는 거 아냐."

"그게.......“ 

나우플리온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너, 지금까지 내가 네 얘기를 무작정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인 적도 

없는데, 방금 내가 네 말을 무조건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거 참 

도무지 신뢰라곤 말라버린 녀석이군."

“........” 

왜 이렇게 자신은 부정적인 결과만 미리 짐작하는지 몰랐다. 무안 

해져 얼굴까지 약간 붉힌 다프넨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오래 전부터의 이야긴데요.....“ 

맨 처음 섬에 도착해서 보았던 환각만은 나우플리온도 알고 있는 

터였다. 그 때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는데, 지 

금 생각해 보면 엔디미온을 비롯한 유령 아이들이 바로 그 발자국 소 

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 이후로 모르페우스 사제와 윈터 

러를 실험하던 도중 실종되었을 때 보았던 첫 번째 유령들, 그리고 두 

번째로 절벽에서 떨어졌던 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윗마을 

에서 벌어진 괴물과의 전투에서 자신에게 빙의된 엔디미온의 힘에 대 

해서 설명할 때 나우플리온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진 유령이로군, 안 그래? 소

년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존재일지 쉽사리 짐작하 

기 힘들겠는데. 게다가 그런 유령들이 한 명도 아니고, 더구나 그들보 

다 나이 많은 '어른 유령'들도 있다 그 말이지.....“ 

갑자기 다프넨은 꿀밤을 한 대 얻어맞았다.

"이 녀석아, 왜 지금까지 그런 중대한 걸 숨긴 거야? 이거 영 못 믿 

을 녀석이로세."

"그런 얘길 믿어줄 거라곤 생각도 안 한걸요."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이 '신뢰라곤 완전히 말라버린 녀석'아."

“한 번 더 말해주니 충격이 무지 크군요.......”

나우플리온은 생각에 잠겨 한참동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 

드렸다. 다프넨은 조금 생각하다가 화재가 나던 날 제로와 함께 갔던 

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로 역시 그런 유령들의 존재를 본 일 

이 있다는 이야기에 나우플리온의 눈이 좀 커졌다.

“내가 아는 한 제로 씨는 마법적 힘과 접촉하는 재능이 보통 사람들

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는 편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정말 

이지, 그 분은 과거 문명에 대한 향수가 대단했나 보다. 그래, 그렇다 

면 그들 유령을 혹 그 묘지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 

지, 다프넨 너, 그들을 다시 만나서 이번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사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어도 좋은 걸까? 지금까지는 네게 친절했다만 그게 그들을 

신뢰해도 좋다는 어떤 척도가 되는 건 아니지.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 

리 세계 밖의 존재들이고 그런 자들의 친절은 아무도 쉽사리 확신할 

수 없는 거니까."

신뢰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다프넨 자신이 반복해서 많은 사람들에 

게 당한 터라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을 믿고 싶 

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눈 

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눈치챘으나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사 그들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치자. 그렇지만 그 

건 여전히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어. 유령들의 말을 증거로 채택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역시 오이지스가 깨어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 

이 없어,"

“만일..... 그들에게 오이지스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요?”

"으응?“

나우플리온은 조금 후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것만은 그로서도 

확실히 반박하기 힘든 가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가능성은 적겠지.... 하지만 적더라도 시도는 해 보고 싶다,

그런 이야기냐? 깨어나게 해 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만.... 아니, 실제로 유령이라는 존재들은 여러 사람의 의식 속을 돌아

다닐 수 있으니 만큼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하 

지만.....“ 

말을 끌며 나우플리온은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말하 

고 말았다.

"그래..... 좋아, 보내 주겠지만 너 혼자서는 안 된다. "

"같이 가시겠다고요?“

“내게는 다른 누구의 사정보다도 너의 안전이 중요하니까,"

나우플리온이 같이 있는 가운데 엔디미온이 모습을 드러내 줄 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오래 전에 이솔렛과 함께 있을 때도 엔디미온 

은 다프넨의 몸 안에 숨어 있었을 뿐 그녀 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 

타나려 하지는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얼굴을 보고는 벨노어 성에서 그에게 검술 

을 가르치던 때처럼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불확실한 지금, 내가 어떤 도움이 된다고

확신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너를 혼자 보내는 것만은 나 자신이 용납 

못 해. 이래봬도 네 보호자니까 내 의무를 다할 거다. "

다프넨은 망설였지만 나우플리온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

장 큰 이유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의 결정을 존중했기 때문이었 

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그 뒤 일은 그 때 다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 날 저녁 제로가 알려 준 은밀한 묘지를 찾아 

가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다프넨은 자신의 의지로 윈터러 

를 꺼내 가지고 왔다. 물론 큰 천에 둘둘 말아놓은 상태였지만.

처음 묘지를 보았을 때, 나우플리온은 인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처음에 섬에 도착한 사람이 내 생각보다 많았나보군? 그 동 

안 기껏 불린 인구가 요것뿐이라니 우리들은 결정적인 임무에 상당히 

게을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

해가 서서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주위가 어두워지기 

전에 비석들을 몇 개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비석에 씌어진 옛 글자에 

대해 영 까막눈이라는 점에서는 나우플리온이나 다프넨이나 다를 것 

이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크흠, 하고 기침하며 이런 건 자신의 소명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을 흘끔 보며 이죽거렸다.

"사제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능력을 가지는 건 아니군요."

"그럼, 당연하지. 사제들마다 고유 영역이 있는 거야. 예를들면..... 

모르페우스 사제님처럼 심각하게 방을 어지를 수 있는 사제도 없을걸."

“그런 사람은 보통 사람 중에도 없는데요."

대충 넘어가려고 점잖게 비석의 모양을 감상하는 체 하는 나우플리 

온을 향해 피식 미소지은 다프넨은 가장 큰 비석 곁으로 가서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조금 있자니 해가 완전히 졌고, 나우플리온이 곁에 와 앉 

는 것이 느껴졌다. 램프나 관솔불 같은 것은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다.

"예전에, 엔디미온이 자기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윗마을에서 괴물과 혈전을 벌이기 전, 밤중에 갑자기 찾아왔던 엔 

디미온은 다프넨이 알의 동굴에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을 매개로 해 

서 자신과 다프넨의 의식이 맞닿는다면 두 사람 사이에 통로가 생겨 

나게 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억의 알을 깨뜨릴 정도로 강렬한 사건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윈터러의 힘으로 얼음 고치 속 

에 갇혔을 때, 그의 혼이 다시 엔디미온과 조우할 수 있었던 것도 윈 

터러의 역사가 그의 의식 어딘가에 강한 자극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지금 나우플리온의 곁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는 자신 

에게 그런 의식의 격변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 

면 좋을까.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설명을 듣고 나서 우울한 생각에 빠진 것처 

럼 말이 없었다. 다프넨은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제 어둠이 눈 

에 익어 윤곽이라도 보이기 시작하는 비석 꼭대기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제로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때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로 아저씨는 여기에서 푸른 돌로 지

어진 거대한 집을 보았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본 유령들은 그 집을 드 

나들기도 하고 또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하셨죠.....“ 

거대한 성전인 양, 또는 사라져버린 마법의 전당인 양 위엄 

있는 건물의 즐비한 기둥들이며 기둥 윗머리에 새겨진 덩굴 잎새 조 

각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대리석 주춧돌은 다섯 겹으로 올려지 

고 긴 회랑이 남쪽과 북쪽 사면을 감싸고 있는, 세모진 박공의 아름다 

운 단층 건물 안에는 예언자들의 성스러운 물이 담긴 돌그릇이 모셔 

져 있고......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상상을 멈추고 말았다.

제로는 그가 본 건물의 자세한 모양에 대해 다프넨에게 설명한 일이 

없었다. 어째서 이렇듯 구체적인 풍경이 떠오르는지 알수가 없었다.

“'나우플리온, 기분이 이상해요......”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하니 나우플리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하 

다가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얘기한 것처럼, 넌 맨 처음 섬에 왔을 때 마을 입구 

에서 이상한 환각을 본 일이 있잖아. 네가 그 이후에 보았다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오벨리스크, 그 유령 아이들과 뛰놀았다는 숲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이 나는 우리 세계 위에 덧씌워진 이 공간의 

풍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지금 네가 무심결에 단박에 

떠올리고 만 그 건물의 모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 너는 처음부 

터 이 섬의 이공간을 목격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네 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 안을 드나들기까지 했지. 의심할 바 없이 그건 윈터러의 영향 

일 거다. 너는 지금 그 검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몰라."

그 말에 다프넨은 상당히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상관없어요. 만일 그렇다 해도 저와 이 검이 서 

로 공생하고 있는 것인지 누가 알겠어요? 그 검은 저를 이용하고, 저 

는 검을 이용해서 각자 갖고 싶은 걸 갖겠죠."

상당히 위험스런 발언이었으나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얼굴을 잠 

시 보기만 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프넨은 눈을 강았다. 윈터러가 그에게 특별한 것을 볼 수 있는 눈

을 빌려주고 있다면,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이용할 것이다. 오늘과 같 

은 상황에 처하여 가질 수 없는 힘조차도 간절히 원할 터인데, 가질 

수 있는 것을 왜 마다하겠는가.

너의 힘은, 곧 나의 힘이다.

어둠이 반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는 것처럼 묽게 번들거렸다. 하늘 

아래 땅 위, 높은 절벽은 드레스 자락처럼, 산 흙 위에 죽은 자의 이름

을 갖고 우뚝 늘어선 묘석들, 검은 덩굴과 밤의 이끼, 무너졌다가 다 

시 세워진 포석의 도시 위를 나는 은청의 나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청색 밤과 달의 은으로 벽을 바른 키 큰 성전이 천 년 전에도 있었

고, 지금도 있다. 지금 그것은 그림자로 지어졌다. 밤 가운데 걷는 반 

투명한 자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그림자이다. 그들의 옷자락은 안개 

로 이루어졌다.

은빛 머리채를 지닌 한 사람이 천천히 걷다가 고개 돌려 그를 보았

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 무어라 말했다. 들리지 않았다. 들으려 애 

써 보았지만 사방이 고요한데도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

프넨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도 무어라 힘주 

어 말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다프넨은 상대의 입술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소리가 들 

리지 않는 데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손을 놓아, 그 사람의 손을 놓아.'

무슨 손을 잡고 있다는 걸까? 다프넨은 의아해하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무언가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나우플리온의 손이었 

다 눈 감기 전에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우플리 

온 역시 다프넨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안개옷을 입은 은색의 사람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손을 놔. 그의 

손을 놔.

다프넨은 잠깐 손을 놓아보려 했지만 나우플리온 쪽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 동안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어깨가 마구 뒤흔들리는 느 

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가 그의 귀에 닿으려 수없이 부딪쳐 왔으나 보 

이지 않는 휘장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한 단 

어가 막을 뚫고 그의 귀에 도달했고,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보리스!"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든 것은 물론 나우플리온이었다. 그의 이 

름을 부른 것도 그였다.

"아.... 왜 그래요?“

"옛 이름을 불러야만 정신이 드는 거냐? 잠들었던 거야, 아니면.....“ 

나우플리온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다프넨이 갑자기 손을 꿈틀거 

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는 걸 느끼고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그를 

깨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 번이나 불렀던 ‘다프넨'이라는 이름은 

그의 의식에 가 닿지 못했다. 그를 깨운 것은 옛 이름, 보리스였다.

다프넨은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새벽 안개처럼 빛 

나는 몸을 갖고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 봤어요."

“그들을?”

다프넨은 잠시 자신이 보았던 것을 눈앞에 떠올려 본 뒤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저를 불렀어요. 그런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그

는 내게 당신의 손을 놓으라고 했죠. 나는 손을 놓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그래서 손을 놓으려고 했어? 이것 참, 너란 녀석은 도대체.....“

나우플리온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놓았던 다프넨의 

손을 다시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쥐더니 말했다.

“내 손을 놓고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예전처럼 며칠씩 깨어

나지 않게 되거나, 심지어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도록 내버려 둘 생 

각은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프넨은 그냥 하늘을 을 

려다보았다. 머리 위의 하늘은 조금 전과 같았고, 불확실한 것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본래 죽은 사람은 얼마동안 자신을 잊고 욕망뿐인 상태가 된대요.

그들이 아무런 욕망 없는 상태로 산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되려면 아 

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봐요. 물론 제가 만난 그들은 그렇게 될 만큼 

아주 오래 살아왔고요."

"그것 역시 유령들이 이야기한 거겠지? 그들이 네게 아무 욕망을 

안 갖고 있는지 너 역시 확신할수 없잖아?“

“믿고 싶다는 말만으로는 항상 충분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밤바람이 찼다. 아직은 5월도 안 된 초봄이었다. 나우플리온은 가 

져온 담요를 다프넨의 어깨에 둘러 주고 쭉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농담처럼 한 마디 던졌다.

"이제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살까 모르겠네."

다프넨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잡고 있던 나우플리온의 손을 

조금 더 꼭 쥐었을 따름이었다.

이솔렛과 함께 할 수 있다해도 그게 나우플리온의 마음을 조금이라 

도 상하게 한다면 결국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었 

던 거다. 모두 처음 알았던 그 때 그대로,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도 

록 그냥 그대로.

이미 자신은 변했고 '예전처럼' 이라는 것이 더 이상 진실한 행복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프넨은 되풀이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려 했다. 자신만 견뎌내면 되는 것이다. 이솔렛 

도, 나우플리온도, 지금 그대로 좋을 테니까.

“나우플리온, 그러면 이번엔 이렇게 해요. 제가 당신의 손을 끌어당

기거든 그냥 나를 따라오는 거예요. 서로 손은 놓지 말고,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같이 가 주시는 거죠.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해도 뭔가 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해 

요."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등에 매어 놓은 윈터러의 감촉을 느끼며 비 

석에 기댔다. 왼손은 나우플리온의 오른손에 확 잡혀 있었다. 그런 상 

태로 그는 인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까 그 사람은 바로 그의 눈앞에서 기

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손짓하며 뭐라고 말했다. 다프넨은 손을 

놓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그는 조금 멀어지면서 다시 뭐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 

로 둘은 천천히 이공간의 땅에 세워진 청석의 성전 앞까지 갔다.

가끔 정신이 아득해져 나우플리온의 손을 놓을 뻔할 때에도 나우플 

리온 쪽에서 그의 손을 놓지 않았기에 계속 같이 갈 수 있었다. 아마 

도 나우플리온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 

신의 앞에 흡사 절벽과 같은 높이로 솟은 육각의 기둥들을 보고 있었 

다. 달빛 가루를 바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푸른 돌의 집이었다.

좌우로 십 미터나 뻗어 있는 계단의 한가운데를 올랐다. 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단단하면서도 미끄러웠다. 다섯 겹의 주춧돌을 모두 

올라 정면의 홀에 이르니 수많은 그림자 인간들이 그 안에서 이리저 

리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질서는 없었지만 그들의 걸음은 

느리고 몸짓은 부드러웠기에 서로 부딪치거나 뒤엉키는 일은 일어나 

지 않았다.

다프넨은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돌아보 

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맨 처음 그를 이곳으로 인도한 자 역시 그들 사 

이에 섞여 들어가 버려서 다시 찾을 길도 없었다. 마치 느린 윤무 

를 구경하러 온 철모르는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그 때, 그렇게 미끄러지며 떠도는 혼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명이 빠 

져나와 곧바로 그의 앞으로 달리다시피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보고 

다프넨은 크게 놀랐다. 다름 아닌 엔디미온이었던 것이다. 기대는 했 

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

“......”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매우 놀란 듯 

한 얼굴이었고 계속해서 빠른 말로 그에게 뭐라 지껄였지만 한 마디 

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프넨 역시 질문을 퍼붓고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가 닿는 것 같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금방 이유를 눈치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다프넨의 손 

을 가리키더니 또렷한 입술 모양으로  ‘손을 놓아' 라고 말했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엔디미온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을 떠나 나 

우플리온의 뜻을 어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엔디미온은 더욱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마음을 

고쳐먹고 입술 모양과 손짓으로 그에게 말했다. 몇 마디는 몇 번 되풀 

이하고서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들어오지 마. 저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냥 과거의 그림자일 뿐, 실제

 로 인간의 혼이었던 나 같은 유령은 고작 몇 명 뿐이야. 지금은 저들 

 의 생각에 잠겨 너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만일 보게 된다면 결코 간 

 단히 보내주지 않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유혹하는 그림자'였지? 그 

 는 실체가 없는 자야. 그를 따라온 건 안전하지 못했어. 어서 밖으로 

 나가. 네 손을 잡은 사람 때문에 너는 어느 쪽 공간도 아닌 경계에 걸 

 려 있구나.

다프넨도 엔디미온과 비슷한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하려 했지만 한 

쪽 손이 묶인 꼴이라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대강 알아 

들은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나가라며 입구 쪽을 가리 

켰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만으로 말했다. ‘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엔디미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앞장서서 나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 

다. 다프넨은 방향을 바꾸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주춧돌을 다 내려오 

니 긴 포석길이 아주 먼 곳까지 깔려 있었다. 끝은 안개에 가려져 보 

이지 않았다. 그들 둘은 포석길에 들어섰다.

걷다가 문득 보니 엔디미온의 옷차림이 예전에 보던 것과 많이 달 

랐다. 치렁치렁한 옷자락 곳곳에 흰 보석가루 같은 것이 희미하게 뿌 

려졌고, 소매에는 은빛 매가 수놓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 사 

이로 단순하게 생긴 금빛 관도 언뜻 보였다.

잠시 후 엔디미온은 포석길을 벗어났다 언제부터였을지, 걷던 길 

왼쪽으로 비탈진 골짜기가 따라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골짜기 자락 

안쪽에 뚫린 동굴 입구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에는 네모진 벽돌로 허리 높이 정도의 벽을 둥그렇게 돌 

려 쌓아 흡사 물 마른 우물 같기도 하고 욕탕 같기도 한 장소가 있었 

다. 머리 위가 뚫려 검푸른 하늘이 엿보였고, 흡사 어둠속에서 나타 

난 듯한 녹색 덩굴손들이 죽죽 늘어져 어깨까지 닿았다.

엔디미온은 벽 가장자리에 가볍게 올라앉아 발을 내리고는 다프넨 

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라고 말했다. 다프넨 

역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보다 먼저,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니?‘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

다프넨은 다시 물었다 '어째서지?‘

엔디미온의 입술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네 검의 

힘은 너만을 허락할 뿐이야. 차라리 그 손을 놔, 나와 이야기한 다음 

그에게로 돌아가면 되잖아.'

이번엔 다프넨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그와 약속했어. 미안해.'

다프넨은 엔디미온처럼 욕탕 비슷한 곳의 가장자리로 가 걸터앉은 

다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얼마 전 우리 세계에서 일어난 큰 

화재에 대한 거야. 너도 그걸 보았니?‘

엔디미온은 ‘못 보았을 리 있겠어. 그건 큰 사고였어' 라고 대꾸했다. 

다프넨은 다시 '그 사고로 한 아이가 거의 죽어가고 있어. 그 때 본

것이 있다면 뭐든 정확히 얘기해 줄 수 없을까?‘ 라고 말했다.

엔디미온은 잠시 다프넨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더니 이렇게 말했 

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대화하기가 너무 어렵구나. 잠깐만 양해해 

줘. 내가 네 의식과 직접 접촉하는 편이 낫겠다.'

엔디미온은 앉았던 곳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프넨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뻗어 뺨을 감싸쥐었다. 동시에 눈을 감으며 이마를 맞 

댔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썰물이 쓸어간 모래밭처 

럼 휑해진 의식 속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줄기차게 그를 부르더니 드 

디어 도달했다.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직 둘의 목소리만이 

크게 울리며 번갈아 되풀이되었다.

“말해. 평소 말하던 것처럼 하면 너와 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거쳐

서 서로에게 닿을 거야. 화재에 대해서 묻고 싶댔지?“

“응. 그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불을 낸 것이 누구인지도 궁금해.“

“확실한 것은 몰라. 하지만 그 아이는 불을 지르지 않았어. 불이 났 

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머릿속에 화재의 현장이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더 

니 엔디미온이 방금 말해 준 상황이 빠르게 펼쳐졌다. 엔디미온이 자 

신의 기억을 다프넨의 머릿속에 부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장서관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보지는 않았던 듯 

했다. 불타는 장서관으로부터 몇 명의 아이들이 뛰쳐나와 십여 걸음 

쯤 뛰더니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확실히 나우플리온 

의 예상대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뒤따라왔다. 소년들은 서로 무어 

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을이 아닌 다른 쪽으로 사라져 갔다.

“내가 본 것은 이게 전부야.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너는 알아볼 

있겠지.“ 

“물론이야. 그래....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그 아이는 이제 정말로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한 사람이 시력을 잃었어. 그들 

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혹시 너는.... 그들을 도와줄 방법을 

알고 있니?“

“글쎄.....” 

쉴새없이 흘러 들어오던 엔디미온의 의식이 잠시 멎었다. 그가 흐 

름을 끊고 생각에 잠긴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후 다시 새로운 목소리 

가 흘러 들어왔다.

“시력을 잃은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의식을 잃은 아이는 도와줄 

수 있어. 그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 어른들이 금세 내가 한 일을 알아차리실 거야.

그건 작은 힘이 아니니까 말이지.... 네가 정 그 아이를 되살리길 원 

한다면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어.“ 

“그게 뭐지?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 줘.”

“너,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는데도, 우리 어른들을 만나 

러 갈 수 있겠어?“

“뭐라고.....?”

다프넨은 순간 당황했으나 조금 후 마음을 다잡았다.

“일이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건, 아무 일 없을 수도 있다

는 말이겠지. 지금 난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안전한 걸 찾아 도망 

칠 입장이 아니야. 불확실한 것에 걸겠어. 그 아이를 살려 달라고 네 

가 말한 그 분들에게 직접 부탁하겠어.“

“넌 왜 네가 직접 그 분들에게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니?”

“아니.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어?”

“그래.” 

그 순간, 엔디미온은 손을 놓고 이마를 뗐다.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 

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너를 지켜보아 왔어. 그들은 이제 네 존재가 위협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해. 가서 너 자신을 증명하고, 그들로부터 네가 원하는 선물 

을 받게 되길 기원하겠다.'

엔디미온은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가더니 마지막으로 다프넨을 돌 

아보며 짧게 말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는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프넨은 눈을 떴다.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지는 바람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 

면서도 동시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프넨은 더듬거리다가 

문득 나우플리온을 불렀다.

"여기가 어디죠?“

갑자기 두 개의 팔이 그의 몸을 와락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다프넨 

은 자신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나우플리온의 손에 이끌려 몇 걸음 걸어나오고 보니 방금까지 그가 

엔디미온과 앉아 있던 곳은 현실에서는 거대한 나무 뿌리 속이었다.

온 몸과 머리에 나뭇진과 썩은 잎새가 묻어 있었고 발은 무엇을 밟았 

는지 발목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2. 첫 번째 진실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스콜리에서 돌아온 다프넨은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마 

음을 고쳐먹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집안에서 목욕할 방법도 

없었고, 이왕 젖은 강에 아예 강으로 가서 흠뻑 젖으리라 생각했다.

강이라기보다는 시내에 가까운 작은 샛강이 마을 바깥쪽에 자리한 

숲 가장자리를 감싸며 흘렀다. 섬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까운 강은 여기뿐이었기에 사람들은 별다른 이름도 붙이지 않 

고 그냥 ‘강'이라고 불렀다. 

강가에 다다라 다프넨은 웃옷을 벗어 내던져 놓고 짧은 바지 차림 

인 채로 물 속에 들어갔다.

폭우는 아니라 해도 사흘 간 꾸준히 내린 비로 물은 많이 불어나 있

었다. 전에는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던 곳에 들어갔는데 허벅지가 다 

잠겼다. 그곳에 서서 다프넨은 고개를 들고 비를 맞았다. 비는 어쩐지 

따뜻했다.

조금 후에는 몸을 물에 잠그고 천천히 팔을 저어 좀더 깊은 곳으로 

갔다. 가장 메마른 계절에도 그의 키를 넘는 곳을 지나면 강 가운데 

솟아 있는 조그마한 바위가 있었다. 낚시에 제격인 자리였기에 날이 

맑을 때는 아이들의 쟁탈전이 심한 곳이지만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다프렌은 섬에 온 후에 수영을 제대로 배웠다 섬사람 치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빨리 배우려고 상당히 노력했 

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때 그는 섬을 택한 이상 어떻게든 적응하 

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강을 따라 내려갔다. 이제는 섬의 웬만한 아이들보다 나은 

수영 솜씨였다. 그에게 수영의 기초를 가르쳐 줬던 아이보다 나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아이는 그리 좋은 실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 마음써서 뭔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소년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오이지스 단 한 

명밖에는.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조금 세어진 빗발이 싫 

증도 내지 않고 수면을 때리는 모양이 보였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조금 더 깊이, 강바닥에는 생명의 찌꺼기들 

이 흙과 섞여 흘렀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억의 찌꺼기들처 

럼 결코 사라지지는 않고 흐르고만 있었다. 자신 또한 그 흐름에 실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방향을 바꾼 그는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랐다. 숨이 모자랐지만 눌 

러 참으며 저 흐르는 찌꺼기들과 반대로 헤엄쳐 갔다. 갈 수 있는 한 

먼 곳까지, 더 참을 수 없게 된 후에야 그는 몸을 뒤집으며 빛 없는 수 

면을 향해 올라갔다.

"후우.......“ 

회색 하늘 아래 회색 강이 흘러갔다. 그는 어느새 처음 물에 들어섰 

던 기슭 근처, 바위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미끈거리는 바위 위로 을 

라간 그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금 비를 맞았다.

퐁.

갑자기 낯선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다시 한 번, 퐁.

속눈썹의 물을 씻어내고 강변을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그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일부러 맞히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부 

르려 한 듯했다. 빗줄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디딘넨!"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 순간,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를 맞고 있는 키 큰 소년은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이제 

는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묘하게도 그는 다프넨을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 

프넨은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망설였다.

"좋은 자리를 잡았구나,"

헥토르가 이번에는 돌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그의 손에 닿도록 던

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탁 받아내고 보니 그것은 반질반질하 

게 닦은 사과였다. 다프넨이 사과를 손에 든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 

자 헥토르는 물 속으로 몇 걸음 들어와 서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독은 안 들었으니 안심해."

“내게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나?”

다프넨의 목소리가 친절하지 않은데도 헥토르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또 하나의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와 

삭와삭 씹어 삼킨 다음 그는 다시 말했다.

“네가 날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아까부터 너를 보고 있자 

니 그냥 말을 걸고 싶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 마라. 네가 날 싫어하 

는 것에 난 아무 불만 없다. 그렇긴 해도 너와 나는 같이 할 이야기가 

많을 거 라고 생각하는데"

다프넨은 헥토르가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 

는 인상을 받았다. 동시에 장서관 사건의 배후에 에키온, 또는 헥토르 

본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을 기억해 냈다. 지금 그와 이야 

기하는 것은 다프넨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말을 실 

수하거나 유도 심문에 걸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프넨은 자신도 사과를 깨물어 먹는 것으로 대화에 응하겠다는 뜻 

을 보였다.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가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열 두세 걸음 정도 되었지만 빗발이 가늘어져 있어 대화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 강가까지 나와 그들의 이 

야기를 엿들을 사람도 없었다.

"실버스컬에서 말이야, 너도, 나도, 실제로는 서로에 대한 결판을 

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멋지게 무산되고 말았지. 솔직하게 말하는 거 

지만, 그 때 내가 너와 싸웠다 해도 별로 승산은 없었을 거다. 그게 너 

자신의 능력이든, 너의 검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나온 능력이든, 어쨌 

든 내 실력 이상인 것만은 확실했지. 그 자작의 아들은 처음부터 네 

상대가 되지 못했어."

"그 말은, 내가 다시 싸우자고 한다 해도 이젠 거절하겠다는 뜻인가?“

"훗, 글쎄. 그런 건 네가 정말로 그런 요청을 했을 때 진지하게 생각

해보기로 하지."

뺨에서 쉴새없이 흐르는 물을 훔치고 있자니 마치 눈물을 닦는 것 

같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헥토르는 최근 머리를 조금 길러서 뒤 

로 묶고 있었는데 말을 하면서 버릇처럼 머리꼬리를 비틀어 물기를 

짜곤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긴데 말이지. 대륙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 너 

를 찾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대륙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 

긴 했다. 그러나 그 자들을 헥토르가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그 땐 나도 놀랐으니까. 아, 어떻게

그들을 만났는지 알고 싶겠지? 희한한 일이지만, 그들은 꽤 일찍부터 

나를 추격하고 있었어. 어이없게도 그들은 내가 너인 줄 알았나 보더 

군."

다프넨과 헥토르는 전혀 닮은꼴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헥토르를 쏘아보는 순간 다음 말이 들렸다.

"물론 얼굴을 보고 너로 착각한 것은 아니야. 그들이 찾은 건 렘므 

의 엘베 섬 일대에 상륙한 우리 또래의 낯선 소년이었어. 아마도 엘베 

섬 전체에 감시망을 펼쳐 놨던 것 같다. 엘베 섬의 원주민들은 외지인 

을 금방 알아보니까 말이지. 어쨌든 내가 탄 배는 실버스컬에 참가하 

려고 떠났던 배 가운데 두 번째로 렘므에 상륙한 배였는데, 너는 모르 

고 있겠지만 첫 번째 배에 탔던 아이들도 똑같은 추격을 받았다고 들 

었다. 그들은 아예 엘베 섬에 상륙하자마자 그들에게 붙들렸지만 어 

떤 렘므 야만인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벗어났나 보더군. 그 다음으 

로 내가 속했던 무리가 걸렸는데, 그 때 이미 우린 실버스컬에 참가했 

다가 다시 렘므를 거쳐 돌아오던 도중이었어. 얼마나 집요한 자들이 

었는지, 내가 아노마라드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것까지 다 알더군."

다프넨이 그들과 함께 실버스컬 원정단이 되어 대륙에 나갔더라면 

영락없이 붙들렸으리란 것을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에키온의 음모 

때문에 대륙으로 나가는 날짜가 늦어진 것이 오히려 추적자들을 속이 

는 계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들이 먼저 상륙한 원정단을 잡으려 

고 아노마라드까지 떠난 사이에 그와 이솔렛이 렘므를 통과한 셈이 

아닌가.

".... 계속 이야기해 봐."

“나는 그 자들이 우리 섬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긴장했 

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붙잡은 다음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우리 중에 네가 없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 

야. 그 다음에 그들은 ‘보리스 진네만’ 이라는 소년을 아느냐고 묻더군."

헥토르는 두 손을 비비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 전에 내가 너를 화나게 했을 때, 네가 저 이름을 말한 일이 있

었지. 그래서 그들이 너를 찾는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거야. 다행히 다 

른 녀석들은 아무도 그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연기력이 필요한 건 나 

뿐이었다."

그제야 다프넨은 해야 할 질문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 서른 초반의 여자 하나와 몸집이 크고 피부가 검은 남자 한 

명의 일행이 아니었나?“

"아니, 그렇지 않았어. 둘 다 남자였고, 둘 다 호리호리하게 말랐지.

성격은 정반대인 것 같았지만 잠깐, 너도 그럼 누군가를 만나긴 한 

모양이군?“

이제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노프가 붙잡혔을 때, 근처에 동료가 있

기라도 한 듯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동료들이 따로 

떨어져 있던 이유가 바로 헥토르 일행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만일 그들을 만났더라면 너도 살아나기 힘들었을 거다. 내가 만난

두 남자는 정말로 신속한 자들이었지. 넌 어떻게 달아났지? 그들이 너

를 알아보았을 텐데."

다프넨은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았어."

“하긴, 대륙에서 10년도 넘게 산 너니까."

조금 불편했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말이 있었다. 다프넨은 망설이 

다가 불쑥 말했다.

“날 숨겨 준 셈이 됐군."

"고맙다는 말은 일러. 아직 두 번이나 남았으니까."

헥토르가 마음만 먹었다면 추적자들이 다프넨을 따라잡을 수 있도 

록 도와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자신이 다프넨 

을 세 번 돕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첫 번째를 지키려 한 

듯했다.

두 사람은 사과를 다 먹었다. 다프넨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면 좋 

을까 궁리하다가 그가 에키온의 계략에 걸려 절벽에서 떨어졌던 사건 

도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나우플리온이 펠로로스 수도사 

와 단독으로 협상한 결과 그 일은 묻어두기로 했지만, 다프넨은 나우 

플리온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어 알고 있었다. 

“네 동생이 내게 갖고 있는 악의는 지난 봄의 사건으로부터 지금까 

지도 여전하다고 알고 있어. 내가 그를 이번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하 

는 것이 부당한가?“

단도직입적으로 해 버린 말이었다. 그런데 헥토르는 뜻밖으로 냉소 

하며 대꾸했다.

"부당하지 않지."

“내가 무슨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말하는 거냐?”

"물론 장서관의 화재 이야기겠지. 죽어 가는 오이지스 이야기일 거고"

헥토르가 무슨 의도로 저렇게 술술 말하고 있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왕 꺼낸 이야기, 끝까지 밀어붙이자고 생각했다.

"쉽게 답해 주니 나도 편하군. 그렇다면 그런 의심이 사실인지도 말

해 줄수 있나?“

"아, 물론 어떤 사실이 존재하긴 하지. 네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가 멎으려 하고 있었다. 젖은 채 몸에 달라붙은 옷이 비를 맞고 

있을 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얼굴에서는 열이 피어올랐 

다.

"좋아, 정확하게 묻지. 에키온과 그 밖의 일당들이 장서관에 불을 

질렀고, 심지어 오이지스를 안에 가둔 채 달아난 거냐?“

헥토르는 천천히 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조금 깊어지자 헤엄을 

쳐서 가까이 왔다. 그는 물론 매우 능숙하게 헤엄쳤다. 다프넨이 있는 

바위 근처에 물 속에 잠겨 있는 야트막한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에 올 

라서면 물이 무릎 정도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헥토르는 예상대로 그 

곳으로 와서 일어서더니 다프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찾아내려는 것처럼 

“..... 역시 그런가."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본 헥토르는 이제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웠다. 얼굴이며 몸 전부가 애티를 완전히 벗고 있었다. 그렇게 보 

아서일까, 눈동자에 서린 빛 역시 과거의 오만함보다는 자부심에 가 

까운 것으로 변한 듯 싶었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다. 내 동생 에키온은 그 일과 관계가 있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 불을 지르거나, 오이지스를 일부 

러 안에 가둔 것은 아니야."

"잘못은 모두 다른 녀석들에게 떠넘길 셈인가?“

헥토르는 웃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어? 지금 얘기를 듣 

는 사람은 너와 나 둘뿐인데."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나 다프넨도 곧 헥토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헥토르는 지금 

솔직하게 말하긴 하되, 마을로 돌아가서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작정이었다. 어찌 보면 다프넨을 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소년이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이 다프 

넨을 딱히 더 신뢰할 까닭은 없었다 오히려 나이도 들었고 섬의 좋은 

가문 출신인 헥토르를 더 믿어줄 것이다.

"예나 다름없이 교활한 수단이로군. 나를 조롱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뭐지?“

"오해하지 마. 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내가 모든 진실을 

안다 한들 너에게 그걸 말할 입장인가 말이다. 오히려 이런 편법으로 

라도 네게 진실을 들려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는 게 나을 거다. 이것도 

일종의 호의라는 걸 모르나?“

그렇게 말하고 헥토르는 입을 다물었다. 다프넨은 그의 윤곽 뚜렷 

한 입술이 꽉 닫힌 것을 보며 그가 진심을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비 

록 돌아서는 순간 부정 당한다 한들,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나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꾸준히 알고자 갈구하지 않았던 

가?

"에키온은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 녀석은 

아이들에게 오이지스를 때려서 너의 화를 돋우고, 결국 그들 앞에 직 

접 나서도록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야.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아이들은 오이지스를 너무 심하게 때렸고, 심지어 장서관에 불까 

지 내고 말았지. 그건 확실히 의도적인 방화는 아니었어. 그런 상황에 

서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였겠나? 당연히,

유일한 목격자인 오이지스를 안에 가두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겠지."

다프넨은 목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은 전부 확인된 거냐? 너 자신의 추측이 아니고?“

"뭐, 그 녀석들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이상에는. 만일 모든 일

이 밝혀진다면 녀석들의 처벌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최초에 그들에게 이 일을 시킨 에키온 역시 끌려 들어가지 않 

을 수 없게 될 거다. 따라서 에키온과 녀석들은 서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고, 만일 조금 소문이 나게 된다 해도 나의 아버지나 몇 명의 

유력자들이 여론을 잠재우게 되겠지. 그 보호를 받기 위해 녀석들은 

나와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 "

너무 화가 치민 나머지 귓속까지 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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