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프롤로그>
1935년 여름, 서울.
식민지에 대한 일제의 수탈이 한창 본격화되고 있을 무렵의 어느 날, 보신각 사거리에 위치한 종로경찰서 뒷문으로 한 사내가 끌려 나왔다. 건장한 사내 둘이 양쪽에서 팔을 부축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 발로 걸음을 옮기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따가운 여름 햇살에 눈이 부신 사내의 고개가 저절로 푹 숙여질 무렵, 그의 뒤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뱀처럼 독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인하. 앞으로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고개 숙이고 살아. 총독부에서 협조 요청하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그래야 너나 나나 편하게 살 수 있잖아. 안 그래?”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반쯤 늘어져 있던 사내, 이인하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고등계 형사 노원형. 아니, 오카무라 가오루로 창씨개명한 개자식. 이인하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것을 본 놈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눈을 공손하게 뜨는 법도 배우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다음에 들어올 땐 그 눈깔부터 파줄 테니까. 네가 밖에서나 조선 갑부지 여기 오면 그냥 불량선인에 불과해. 알아?”
다시 고개를 돌린 이인하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자고로 지조 있는 부자는 드문 법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바로 그 희귀한 예가 되고 말았다. 세상이 바뀌지만 않았더라면 애초에 이리 지조 있는 척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여보!”
“도련님!”
문득 앞에서 울음 속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와 집사를 비롯해 집안일을 돕는 이들 사람들 몇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오늘 내보내겠다고 경찰서에서 미리 통보를 한 모양이다. 놈들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마음 약한 아내에게 또 얼마나 험한 소리를 해댔을까?
“괜찮으세요?”
성큼 다가와 이인하의 팔을 부여잡는 아내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난 괜찮아요. 피곤하니 일단 집에 갑시다.”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가 메마른 논두렁처럼 갈라졌다.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이인하는 등받이에 축 늘어져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려고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옆에 앉은 아내가 계속해서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몸도 씻지 않은 채 일단 자리부터 깔고 누웠다. 몸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인데, 머리는 누가 송곳으로 계속 쑤셔 파는 것처럼 날카롭게 욱신거린다. 물을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아내마저도 성가시게 느껴질 정도로 만사가 귀찮았다.
“팔도 천지가 온통 지옥인데도 내 집만은 천국 같군.”
그나마 집에 왔다는 안도감 덕인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인하의 집안은 역관인 조부 덕에 한때 조선 제일의 갑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았었다. 때문에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은근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양심을 팔지 않는 한 그 많은 재산으로도 자기 한 몸 지키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나라 없는 백성은 말 잘 듣는 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잡혀 먹힐지 몰라 떨며 살아야 하는 더러운 신세였다.
속으로만 울분을 삼키다가 남몰래 만주며 상해 등지로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름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키기는 했지만, 조선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모두 일본 놈들의 손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어디에나 감시의 눈초리가 닿았다. 그래서 노원형이 처음 순사들을 앞세워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는 그 일이 탄로 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천황폐하 덕에 벌었으면 나라를 위해 좀 쓰기도 해야지. 안 그렇소?”
취조실에서 노원형으로부터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인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나라를 위해 이미 쓰고 있다, 이놈아. 그게 덴노의 나라가 아닐 뿐이지. 그렇게 섣부르게 버틴 결과가 지금의 처참한 몰골이었다.
“의암 선생님이 많이 애쓰셨어요. 당신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문안 오시겠대요.”
아내의 말이었다. 이인하는 누운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또 그 친구의 신세를 졌군.
“애들은?”
“첫째는 아빠 걱정을 많이 했어요. 둘째야 아직 젖먹이니….”
“당신이 고생이 많았소.”
“고생은 당신이 했죠. 그 몹쓸 놈들이 사람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흑.”
아내가 기어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마음이 짠해 진 이인하가 이불 밖으로 팔을 내밀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이 무능한 가장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긴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일단은 한숨 자고 싶소.”
“쉬세요. 일어나시면 드실 수 있도록 죽을 준비시킬게요.”
얼른 마음을 추스른 아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평생 호강만 할 줄 알고 시집왔을 텐데, 뜻밖에 고집 센 남편을 만나 오히려 고생길이 열린 여자다. 미안했다.
아내가 방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인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려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맸다. 고문으로 인한 몸의 손상이 생각보다 지독했던 것이다.
양의와 한의가 번갈아 드나들며 정성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목숨이 위태로운 며칠이 지났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 열흘 동안 이인하의 몸에 뭔가 특이한 일이 일어났다. 그걸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은 바로 이인하 본인이었다.
‘뭐지? 누가 방에 불을 켜놨나?’
열흘 만에 간신히 눈을 뜬 그의 망막을 여러 개의 빛이 어른거리며 어지럽혔다. 처음에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간신이 눈꺼풀을 밀어올리고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그의 눈에 몽환적인 빛을 내뿜고 있는 물건들이 들어왔다.
“저, 저것들이 왜?”
이인하의 방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조금씩 모아온 각종 그림이며 글씨들이 걸려있었고, 청자나 백자같은 도자기들도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모두 귀한 진품들이었다.
그런데 사선에 한 발을 걸쳤다가 돌아온 이인하의 눈에 그것들이 모두 빛을 내뿜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창호지에 햇살이 비쳐들었을 때처럼 아련한 그 빛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미친 건가?”
이인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