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3. 파베르제의 달걀
“여기서 또 뵐 줄은 몰랐네요. 이번 경매에 관심이 있어서 오신 건가요?”
최서라의 물음에 이도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경매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수련 연작은 추정가 자체가 너무 높아서 제 능력을 훨씬 넘어서네요. 그냥 모네의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
“명작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지요.”
“맞습니다, 진짜 명작일 경우에는 확실히 그렇죠, 하하. 그런데 최서라 씨는 이번 경매에 참여하실 생각입니까?”
도윤의 말이 조금 묘했다. 하지만 최서라는 일단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제가 사려는 건 아니고, 모네의 수련 연작에 관심이 많은 친척 분이 계셔서요. 그 분을 대리해서 경매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두 사람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옆에 서 있던 이안 오스틴이 졸지에 어정쩡한 입장이 되었다. 그가 헛기침을 하자 실수를 깨달은 최서라가 얼른 양쪽을 소개했다.
“아참, 인사하세요. 이쪽은 아트 딜러인 이안 오스틴 씨. 이번 경매에서 저를 도와주실 분이에요. 그리고 저쪽은 이도윤 박사님. 후기 인상파가 전공이세요.”
소개를 받은 두 사람이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오스틴과 인사를 마친 도윤이 다시금 최서라를 보며 말을 꺼냈다. 여전히 한국어였다.
“친척 분을 대리해서 경매에 참가하실 예정이라면, 혹시 청파 갤러리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구매할 의향이 있는 겁니까?”
도윤의 말에 최서라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는 최서라를 향해 도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 그룹 최인탁 회장님의 막내 손녀가 런던에서 유학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사신 최수아 대표님의 뒤를 이어 청파 갤러리를 책임질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다더군요. 인사동과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소문이 파다합니다.”
“저를 예전부터 알고 계셨어요?”
“얼굴은 지난번에 처음 뵈었지만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도 인사동에서 조그마한 갤러리를 하나 열고 있거든요.”
“아, 그러신 줄 몰랐어요.”
“청파 갤러리는 소장품의 가치로만 따질 때 국내 최고 수준의 갤러리가 아닙니까?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입장이나 마찬가지니 들려오는 소문에 무심하기가 쉽지 않지요.”
최서라가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아리움 갤러리가 있는데. 그런데 인사동 갤러리라면 어떤….”
“현소 갤러리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부모님이 함께 운영하십니다.”
“아, 그럼 혹시 서연희 실장님 아들이세요?”
“네. 그 분이 제 어머니십니다. 아세요?”
“당연히 알죠.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드님이 계시다고 했는데, 그게 설마 이 박사님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때 멀뚱하니 서 있던 이안 오스틴이 아까보다 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세워놓고 두 사람이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만 대화를 나누자 마음이 언짢아졌던 것이다.
“어머, 죄송해요. 생각지도 못하게 아는 분을 만나는 바람에 결례를 했네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최서라가 결례를 한 건 맞지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에는 기침 소리가 너무 컸다. 오스틴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은 도윤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마침 오스틴 씨도 아트 딜러라고 하셨으니까 궁금해지네요. 이번에 나온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신 느낌은 어떻습니까?”
오스틴이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두 분께 외람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스틴이 최서라의 얼굴을 힐끗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말씀해 보시지요.”
“제 생각에는 모네의 수련 연작을 구매하는 건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 그림들, 진품이 아니거든요.”
최서라와 오스틴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엄청난 말을 잘도 태연한 목소리로 지껄이는 재주가 있구나. 순간 최서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오스틴이 발끈하며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다른 곳도 아닌 크리스티에서 위작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말입니까?”
“그야 크리스티에서는 당연히 진품이라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감정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물론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냥 참고만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도윤은 그 말을 끝으로 최서라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생각은 이미 말했으니 그만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결국 최서라의 몫이었다.
사실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지적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평소의 이도윤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최서라가 하필 그림을 구매할 계획이라는 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일이다.
모네의 그림 가운데에는 수천만 달러를 호가하는 고가의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당장 2018년에 뉴욕 크리스티에서 낙찰된 그의 수련 그림만 해도 최종 낙찰가가 3,200만 달러를 넘겼다. 이번 연작은 세 점이니까 최소한 오천만 달러 이상에 낙찰될 가능성이 컸다.
‘그냥 못 본 채 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크단 말이야. 아무리 청파 갤러리 뒤에 미래 그룹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비싼 돈을 지불하고 가짜를 사는 건 너무하잖아.’
그래서 굳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다만 거기까지만 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는데 자리를 뜨려는 그의 발걸음을 오스틴이 막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크리스티입니다. 더구나 여기는 런던 지부에요. 최고의 감정가들이 포진한 곳이란 말입니다. 말씀을 너무 함부로 하시는 것 아닙니까?”
눈빛을 보니 기분이 단단히 틀어진 게 분명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크리스티 런던 지부가 대단한 곳이라는 사실은 저도 잘 압니다. 세계적인 감정가들도 적지 않고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그림들이 위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작품의 진위 여부는 감정가의 명성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니까요.”
도윤의 단호한 말에 잠시 당황하는 듯하던 오스틴이 이내 코웃음을 쳤다.
“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얘기는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정에까지 조예가 깊으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아직 나이도 젊으신 분이 말이에요.”
“글쎄요? 제가 나이가 젊은 건 사실이지만 작품을 보는 눈까지 어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로서는 아직 작품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으셨다는 오스틴 씨가 왜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반응하는지 오히려 의아하군요. 정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직접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고 판단하시면 될 텐데요?”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이미 크리스티 쪽에서 충분히 감정을 마치고 진품으로 판단한 작품이에요. 예상이기는 하지만 제 판단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고요. 저로서는 이 박사님이 어떻게 그토록 자신 있게 저 그림들이 위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점이 아주 궁금하군요.”
갑자기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짙은 청회색 정장에 보타이를 맨 반백의 신사가 서 있었다. 신사의 얼굴을 확인한 오스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드레스너 사장님!”
오스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드레스너가 도윤에게 다가왔다.
“크리스티를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드레스너라고 합니다. 모처럼 런던에서 큰 경매가 열리는 터라 뉴욕에서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됐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의 신뢰성과 연관된 얘기라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습니다.”
도윤은 드레스너가 웃으며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손바닥 사이에서는 따뜻한 체온이 아니라 냉기가 흘렀다.
“사장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본의 아니게 크리스티의 험담을 하게 된 꼴이 됐군요. 사과드립니다.”
“글쎄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그렇지 않군요. 이미 이목이 많이 집중되어서요.”
드레스너가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최서라와 오스틴은 그제야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당수는 모레 있을 경매의 잠정적인 고객들일 게 분명했다. 어쩌면 경매를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도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입맛을 다셨다. 그로서는 간단하게 주의만 주고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오스틴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대화가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탓이었다.
“이도윤입니다. 일부러 영업을 방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드레스너는 도윤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얘기를 얼핏 들으니까 후기 인상파를 전공한 분이신 것 같더군요. 모네 역시 인상파 화가이니 그냥 아마추어의 견해라고 무시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이 박사께서는 정말 저 그림이 위작이라고 확신하십니까?”
거의 처음부터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군. 입맛이 씁쓸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아시겠지만 미술품 감정에 있어서 진품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짜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죠. 제 생각을 물으시는 거라면 저는 저 세 점의 그림이 가짜라고 믿습니다.”
“그건 우리 회사 감정가들의 견해와는 아주 다르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부러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드레스너 사장이 주변을 슬쩍 돌아봤다. 조금 전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의도가 어쨌든 이미 제 입장이 난처해진 건 사실입니다. 이왕 말을 꺼내셨으니 저 그림들이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해보자는 거지? 도윤이 가볍게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모네는 말년에 적지 않은 수련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조할 수 있는 대상이 많다는 뜻이지요. 저 세 점의 수련 연작은 기존의 수련 그림들에서 작은 부분들을 베꼈습니다. 그걸 하나의 그림으로 합친 거죠. 아시겠지만 흔히 모자이크 기법이라고 하는 위조 방법입니다.”
드레스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저 그림들은 이번에 처음으로 경매에 나온 겁니다. 제가 아는 한 도록이 발간된 적도 없고요. 그러니 이 박사께서도 아마 예전에는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저 연작들이 다른 그림에서 따온 모자이크라는 걸 용케도 알아보셨군요.”
“저 그림들을 직접 본 건 저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방금 하신 말씀처럼 저 연작이 다른 모네의 수련 그림들을 부분적으로 베껴서 합친 게 사실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알아보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 각각의 부분들을 원작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요? 사진을 놓고 비교하더라도 말입니다.”
“보통은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제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다르시다? 설마 이박사가 모네의 다른 그림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굳이 사진을 놓고 비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부적인 부분까지?”
“제가 기억력이 조금 좋은 편이라서요.”
설마 그걸 면전에서 인정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도윤이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걸 본 오스틴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슬쩍 쥐었다가 풀었다. 뭐 이렇게 뻔뻔한 자식이 다 있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드레스너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시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당신 말대로 저 그림들이 위작이라면 우리 감정가들은 모두 장님이나 마찬가지란 뜻이군요.”
“크리스티의 감정가들도 깜빡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림을 워낙 잘게 쪼개서 베낀데다 모자이크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했거든요. 모네의 화풍과도 거의 일치하고요. 누군지 솜씨가 대단하네요.”
“그렇게 대단한 솜씨로 만든 위작을 이 박사는 한눈에 보고 알아차렸다는 말이고요?”
“말씀드렸듯이 제가 기억력이 좋아서요.”
드레스너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오스틴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