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9화 (9/300)

9화

3. 파베르제의 달걀

“모네의 작품처럼 고가의 물건일 경우, 크리스티도 단순히 눈으로 확인하는 안목 감정에만 의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 물감의 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 정도는 거쳤겠지요.”

합리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미술품 감정에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건 생각보다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 그건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대형 경매 회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도윤은 일단 오스틴의 말을 인정했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 아마 캔버스의 연식도 확인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조 여부를 가려내지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까?”

“아트 딜러니까 잘 아시겠지만 19세기 말에 사용되었던 캔버스를 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설사 하얀 캔버스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려졌던 이름 없는 작품 하나를 구해서 물감을 깨끗이 제거하면 되니까요. 번거로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죠.”

“물감의 성분 검사는 어쩌고요? 모네 시대의 유화 물감을 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뚜껑도 열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이 간혹 있으니까요. 정 안 되면 옛날 그림을 구해서 거기 칠해진 유화 물감을 재활용할 수도 있고요.”

오스틴이 코웃음을 쳤다.

“미술사를 전공하셨다더니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한 번 굳은 유화물감은 다시 녹여서 쓰지 못합니다.”

“누가 다시 녹인다고 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오스틴 씨야말로 아트 딜러답지 않게 위조 기법에 어두우시군요. 녹이는 게 아니라 캔버스에 붙어 있는 물감을 긁어내서 고운 가루로 만드는 겁니다. 그걸 적당한 용제에 이겨서 쓰는 거죠. 그렇게 하면 품질은 떨어지지만 성분 검사를 통과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재활용한 물감으로 저렇게 큰 그림을 세 점이나 그리기는 힘들어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옛날 그림을 긁어낸다는 소립니까?”

도윤의 시선이 잠시 드레스너 사장에게로 갔다가 다시 오스틴에게로 향했다.

“만약 크리스티에서 진짜로 저 그림들에서 물감을 채취해서 검사했다면 어느 부분에서 그걸 떼어냈을까요?”

“그야 당연히 모서리에서….”

“그랬겠죠? 아무래도 그림 한 복판에서 물감을 떼어내는 건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테니까.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조범도 얼마 안 되는 옛날 물감을 어느 곳에 칠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거죠. 저라면 그림의 네 귀퉁이에 조금만 칠했을 겁니다. 그 정도면 검사를 통과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오스틴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서라가 점점 도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드레스너 사장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 박사께서 그토록 그림의 진위에 대한 의심이 크시니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죠. 저와 간단한 내기를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요? 어떤 내기 말입니까?”

“저기 있는 모네의 수련 연작 세 점이 다른 그림들에서 베낀 부분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조합했다고 주장하셨죠?”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감정가들을 이 자리에 부르겠습니다. 마침 저희 회사는 이미 공개된 모네의 그림 모두에 대해 디지털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해상도가 아주 높죠. 그걸 이용해서 저 그림의 각 부분들이 정말 모네의 다른 그림에서 베낀 것인지 검증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시간이 꽤 걸린 텐데요?”

“통상적인 검증이라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겠죠. 하지만 이 경우에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박사 스스로 한 얘기가 있으니까요.”

도윤은 드레스너 사장이 뭘 의도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진짜 끝까지 해보자는 얘기가 되는데….

“저더러 저 연작들의 각 부분이 모네의 어느 그림들에서 모사됐는지 말해달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전부 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몇 군데만 지적해주시면 되니까요. 그 정도면 검증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왜 그렇게까지…”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본인이 섣부른 얘기를 했다는 걸 인정하시면 됩니다. 그래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납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드레스너 사장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최서라가 도윤에게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국어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체면이 조금 깎이더라도 이 정도에서 물러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설사 이 박사님 말이 맞더라도 크리스티와 너무 척을 지는 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아요. 저 때문에 공연히 난처하게 되신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해요.”

도윤이 실소를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아가씨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무래도 청파 갤러리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작심하고 노리고 있다는 정보가 크리스티 측에 전해진 것 같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술 시장에서 청파 갤러리 정도면 상당히 큰 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 그룹이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응찰 경쟁에 큰 손이 뛰어들면 자연히 낙찰가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크리스티는 3백만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낙찰된 물품에 대해서는 12퍼센트의 수수료를 받지요. 낙찰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회사의 이익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최서라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저기 걸린 모네의 수련 연작은 예상 낙찰가가 오천만 달러 이상입니다. 파운드로 따져도 사천만 파운드에 가깝고 원화로는 오백 억이 넘죠. 최수아 대표님도 그 이상의 돈을 낼 생각 아니었습니까? 저 같은 서민은 꿈도 꾸기 힘든 금액이지만 청파 갤러리가 보유하고 있는 그룹 계열사 지분이 제법 된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잠시 망설이던 최서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고모는 1억 달러까지도 감수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일본의 NK 생명보험이 갖고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능가하는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래야 국내에서도 아리움 갤러리를 젖히고 최고의 갤러리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일본의 NK 생명보험이 가지고 있는 고흐의 ‘다섯 송이 해바라기’는 198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 받은 작품이었다. 낙찰가가 3990만 달러였는데, 당시로서는 역대 최대 금액이었다. 일본 버블 경제의 덕을 톡톡히 본 낙찰가였다. 그래도 지금 경매에 내놓을 경우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평가되고 있으니 성공한 투자인 셈이었다.

미래 그룹의 자산 규모가 NK 생명보험보다 크니, 청파 갤러리가 1억 달러까지 감수하면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게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도 저 그림이 진짜일 경우의 얘기지. 잘못하면 천억을 그냥 날리는 셈이 되잖아.’

이 정도 그림은 나중에 위작이라는 주장이 나온다고 해도 크리스티가 쉽게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런 전례가 적지 않기도 했다.

도윤은 최서라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재벌가의 핏줄이라는 게 좋긴 좋구나.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1억 달러를 내던지는 일을 맡길 수 있다니….

“만약 최서라 씨가 제 말을 믿고 이번 경매에 불참하게 되면 낙찰가가 적지 않게 떨어질 겁니다. 그럼 크리스티로서는 최소한 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게 되겠죠.”

그의 말에 최서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드레스너 사장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저처럼 젊고 이름 없는 사람이 한 말에 세계적인 경매 회사 사장이 내기까지 하자며 분개할 이유가 없죠. 아마 드레스너 사장은 저보다 제가 한 말에 최서라 씨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네. 하지만 드레스너 사장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죠.”

최서라와의 대화를 마친 도윤이 드레스너 사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내기 받아들이죠.”

도윤의 말이 떨어지자 전시장 내부에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드레스너 사장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조금 다른 결론을 예상했었던 게 분명했다.

“대단한 젊은이로군요. 그게 용기일지 만용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결과가 말해주겠죠. 제가 수련 연작 가운데 모사된 부분을 지적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한 점에 두 군데씩, 총 여섯 군데면 될까요?”

“시간제한도 있으니 그 정도면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원하시는 내기의 조건이 뭔지를 얘기할 때군요.”

그 말에 드레스너가 씩 웃더니 손가락 하나를 위로 치켜세웠다.

“저 작품이 경매에서 낙찰되면 우리 회사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최소한 백만 달러는 될 겁니다. 그걸 겁시다. 작품이 위작으로 판명되면 내가 이 박사에게 백만 달러를 드리죠. 반대로 진품이면 이 박사가 같은 돈을 내셔야 합니다.”

실내가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최서라와 오스틴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었다. 개인, 그것도 아직 젊은이에 불과한 사람을 상대로 너무 지나친 조건을 제시했다는 눈치가 분명했다. 그러자 좌중의 반응을 확인한 드레스너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그 돈을 제가 받겠다는 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이 내기에서 이기면 이 박사가 주는 백만 달러를 자선 단체에 기증하죠. 어떻습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네 돈이 탐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를 상대로 그런 소리를 하려면 백만 달러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분위기를 몰아가는 드레스너의 말에 최서라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는 순간,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지면 백만 달러를 드리죠. 단 제가 이겼을 때 받을 대가는 돈 대신 다른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재미있군요. 하지만 그 대가가 백만 달러보다 비싼 것이면 곤란합니다.”

“글쎄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들어봅시다. 내기에 이기면 뭘 받고 싶으십니까?”

도윤의 얼굴에 어찌 보면 다소 얄밉게 보일 수도 있는 미소가 맺혔다.

“지난달에 열렸던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유일하게 유찰된 물건이 하나 있죠?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크리스티에서 아예 사들여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드레스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파베르제의 ‘열리지 않는 달걀’을 말하는 겁니까? 그건 이번 내기의 대가로 걸기에는 너무 과하군요. 비록 유찰되기는 했지만 최소한 천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파베르제의 달걀을 달라고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그걸 사흘만 대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학자로서의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한번 연구해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백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하죠.”

“사흘씩이나 말이요? 그건….”

“사흘이 곤란하면 하루만 빌려주셔도 됩니다. 분실할 경우에는 배상하도록 하죠. 보험 회사에 신고한 액수가 있을 테니까 그걸 물어내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드레스너의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스스로 벌인 판이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그 자신은 물론 회사의 체면이 크게 깎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좋소. 그렇게 하죠. 하루면 충분합니까?”

“아쉽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문서를 작성할까요?”

“우리 회사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여 관련 문서가 있으니 거기에 사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증인이니, 혹여 분실이나 도난을 당할 경우 이 박사가 반드시 배상해야만 할 겁니다.”

“그야 물론이죠.”

내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드레스너 사장의 지시를 전달받은 크리스티의 감정가들이 여러 가지 장비를 들고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현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 검증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감정가들의 준비가 끝나자 도윤이 모네의 수련 연작 앞에서 섰다. 그는 약속대로 하나의 그림에서 두 군데씩 모두 여섯 군데를 지목했다.

“첫 번째 그림의 상단 오른쪽에 있는 나무는 1899년작 ‘수련 연못'의 오른쪽 중간에 그려진 나무를 베껴 그린 겁니다. 중간에 그려진 다리의 왼쪽 난간은 그 다음해인 1990년에 그린 '화가의 지베르니 정원'의 오른쪽 난간 부분을 거꾸로 뒤집었네요. …….”

그의 지적이 모두 끝나자 감정가들이 스크린에 해당 그림을 확대해서 투사했다. 감정가들이 스크린에 비쳐진 사진과 벽에 걸린 그림들을 검사하는 동안, 주변의 다른 관람객들이 숨을 죽이고 검증과정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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