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0화 (10/300)

10화

3. 파베르제의 달걀

감정가들이 검증을 시작하자 최서라가 도윤에게 다가왔다.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 박사님은 걱정되지 않으세요? 저는 긴장이 돼서 죽겠어요.”

도윤이 씩 웃었다. 최서라로서는 여유가 넘치는 듯한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얄미운 생각까지 들었다. 말투가 저절로 뾰족해졌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설마 크리스티 감정가들이 고객들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애초에 모네의 수련 연작이 진품이라고 감정한 것도 저 사람들이잖아요.”

“이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경매 회사 전시실입니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세요. 저 사람들이 전부 순수하게 미술품을 감상하러 왔을 것 같습니까?”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맞습니다. 저 가운데에는 분명히 경험 많은 컬렉터나 미술 전문가들이 있을 거예요.”

“크리스티가 그들의 눈을 의식할 거라는 말인가요?”

“감정가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수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명백한 결과를 부정하는 건 곤란하죠. 그럴 경우에는 크리스티의 명성이 크게 실추될 테니까요.”

백만 달러라는 거액이 걸린 내기임에도 불구하고 도윤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최서라는 그게 기가 막혔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 정도까지 자신만만할 수가 있지? 자기 눈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나? 집이 부자라는 애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번 내기에서 질 경우 이도윤이 잃는 것은 단지 백만 달러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이 남자가 처하게 될 곤경에 대해 왜 이렇게 마음을 쓰는 걸까?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좋아요. 저 그림들이 위작이라고 해요. 그럼 여기 감정사들은 처음에 왜 그걸 진품이라고 착각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상당히 실력 있는 사람들인데요.”

최서라 자신은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저도 모르게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했다.

“그때는 미처 다른 그림에서 베꼈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최서라 씨는 그림 감정에 대해서 따로 공부하신 적이 없죠?”

“네. 청파에도 감정을 맡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작품을 구매할 때는 외부의 전문가들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아요. 굳이 저까지 감정을 공부할 필요는 없죠.”

“그림 감정이라는 게 생각보다 오류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모자이크 기법으로 위조할 경우, 위조범의 실력에 따라 감정의 난이도가 크게 달라지죠. 저 그림처럼 위조범의 실력이 뛰어나면 전문가들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의심하고 들어가지 않는 한요.”

“미술품 감정에서 확실한 객관성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대부분의 감정이라는 게 소위 전문가란 사람들의 눈썰미에 의존하는 안목 감정이니까요. 그래서 감정가들끼리도 많이 싸웁니다. 예술품 감정에 관한 국가 공인 자격증을 발부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죠.”

“그럼 현재 감정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뭐예요? 그림이나 도자기, 심지어 장신구 같은 분야에도 모두 전문 감정가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모두 무자격자라는 뜻인가요?”

“무자격자라는 평가는 너무 나갔네요. 감정가라는 명칭은 그 분야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들이 얻게 되는 일종의 권위 같은 거라고 이해하면 쉬울 거예요. 직업이 가수인 사람들이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 위해 무슨 자격증 같은 걸 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진위 감정에 문제가 생기다니. 저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건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죠.”

그 흔치 않은 일이 바로 당신 때문에 벌어졌잖아. 최서라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   *   *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전시장 한쪽 구석에서는 두 명의 백인 남자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 가운데 약간 통통한 몸을 가진 남자가 옆에 있던 동료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이봐, 존. 이거 재미있지 않아? 크리스티에 협조 요청을 하러 왔다가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마치 우리가 기획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실전 예고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존 카론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INB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작가인 그는 담당 피디인 알랭 클로드와 함께 새로운 장르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크리스티 런던 지점을 방문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자신들의 프로그램 성격과 부합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저 젊은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동양인 남자 말이야.”

알랭 클로드의 말에 존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닥터 리라고 부르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름까지는 모르겠어. 한 번 알아볼까?”

“알아 봐. 저 정도면 동양인 치고는 키가 큰 편이고 얼굴도 화면을 잘 받을 것 같아. 더구나 젊은 나이에 박사라면 어느 정도 전문성도 있을 테고. 말하는 걸 보니 영어도 능숙하잖아? 우리 프로그램에 딱 맞는 출연자가 될 수도 있겠어.”

“근데 아마추어 냄새가 너무 약하지 않아? 만약 이번 대결에서 저 친구가 이기면 완전히 프로라는 얘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티의 감정가들을 이긴 거니 말이야.”

존이 살짝 우려를 표시하자 알랭이 코웃음을 쳤다.

“이봐. TV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들 가운데 진짜 아마추어가 얼마나 될 것 같아?”

“하긴, 동양인들은 외모만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저 정도면 아무리 많아도 삼십은 넘지 않았을 거야. 시청자들도 이십대의 프로 감정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겠지.”

“사람들에게는 백퍼센트 젊은 천재로 보일 거야.”

“그리고 시청자들은 젊은 천재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니까 늦기 전에 얼른 저 친구 이름하고 전화번호를 따와.”

“오케이. 피디께서 하명하시면 분부를 받들어 모셔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만약 저 친구가 이 대결에서 지면 어떻게 하지? 모네의 그림이 진품으로 밝혀져도 저 닥터 리라는 사람을 섭외할 거야?”

“그럼 아쉽지만 후보에서 제외시켜야지. 예고편에서 패배한 사람을 본편에 등장시킬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당연히 그럴 순 없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전시장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만 달러짜리 내기가 그들에게는 그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   *   *

알랭과 존이 자기들 마음대로 도윤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놓고 저울질 하는 사이, 크리스티의 감정가들은 차근차근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도윤이 언급한 모네의 다른 그림 사진들을 스크린에 띄웠다. 그걸 전시장의 그림과 꼼꼼하게 비교하던 감정가들의 안색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흐려졌다. 도윤이 베껴 그렸다고 지적한 부분들을 대놓고 살펴보자 그 유사점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장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을 지르거나 다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최서라가 도윤에게 가까이 붙어 서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분위기가 우리한테 유리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요?”

“그냥 그렇다고요.”

그녀가 얼굴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는데 드레스너 사장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그림들도 사진 작업한 게 있지? 그걸 같이 띄워서 비교해 보게.”

오래 지나지 않아 전시된 수련 연작 가운데 첫 번째 그림의 사진이 스크린에 비춰졌다. 감정가들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 부분을 확대시켰다. 아울러 모네의 1899년작 ‘수련 연못’의 중간 부분 역시 확대된 상태로 스크린에 띄워졌다. 양쪽 모두 도윤이 정확하게 지적한 부분들이었다.

감정가들이 두 사진을 스크린 위에 겹친 뒤 조금씩 크기를 조정해가던 어느 순간, 전시장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림들 가운데 도윤이 언급했던 부분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드레스너 사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당황한 감정가들이 작업을 잠시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다른 부분들도 같은 방법으로 확인해 봐.”

먹이를 놓친 맹수가 분에 차서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였다. 감정가들의 손이 조금 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 사진들이 계속해서 스크린에 띄워지고, 그것들을 수련 연작의 특정 부분과 겹쳐서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작업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전시장 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람들도 보였다.

“신기하네요. 아무리 위작이라도 붓으로 하나하나 직접 그렸을 텐데 어쩌면 저렇게 똑같은 모양이 나올 수가 있죠?”

잠시 딴청을 부리던 최서라의 얼굴이 다시금 도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동양화 같은 경우에는 얇은 종이를 원화 위에 대고 거기에 비춰지는 모양을 따라 일차적으로 본을 뜨기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죠. 사진을 찍은 다음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캔버스 위에 실물 크기로 비추면 됩니다. 캔버스 위에 맺힌 영상을 따라 주요 선들을 그대로 스케치한 다음 붓으로 터치해서 마무리하는 거죠.”

“옛날 캔버스와 옛날 물감을 써서 말이죠?”

“안목이 낮은 컬렉터들을 속일 때는 굳이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어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위조범의 솜씨죠. 위조 대상이 되는 화가의 화풍을 제대로 흉내 내지 못하면 아무리 똑같이 그려도 어딘지 모르게 티가 납니다. 그런 어설픈 위작들은 전문 감정가의 눈을 속이기 어려워요.”

“그럼 저 그림을 위조한 사람은 솜씨가 좋은 편인가요?”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위작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러니까 크리스티의 감정사들까지 속일 수 있었겠지. 도윤은 문득 저 그림을 위조한 자가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아직 잡히지 않고 살아있다면 위험한 사람이 될 게 분명했다.

어느 덧 마지막 그림에 대한 감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리스티 감정사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고, 그 어둠의 깊이만큼 드레스너 사장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예정했던 모든 작업이 끝났지만, 감정사들 가운데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그 결론을 말하는 게 마치 자신들의 사형 선고문을 읽는 듯한 심정일 것이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드레스너 사장이었다.

“축하합니다. 아쉽지만 이 박사가 이겼군요. 저 그림들은 위작이 맞습니다.”

백만 달러짜리 내기의 승패가 판가름 났지만 누구도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다. 전시장 전체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도윤이 일부러 쾌활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왔네요. 크리스티는 위작을 경매에 올리는 실수를 피해서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됐고, 저는 원하던 작품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그 말에 몇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사실상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크리스티가 작품의 진위 감정에 실패했다. 그것도 일 년에 몇 번 나오지 않는 고가의 대작을 대상으로.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티의 사장이 이름도 없는 젊은이와 벌인 공개적인 감정 승부에서 무참하게 패했다.

“크리스티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군.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그림을 팔았다가 나중에 위작 시비에 휘말리는 편이 나을 뻔 했어. 그때는 우기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모든 과정을 지켜본 INB의 피디 알랭의 말이었다. 존도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협조 요청 대상을 소더비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여기 기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일이 언론을 탈 게 분명합니다. 최소한 이번 경매의 메인이었던 모네의 수련이 왜 갑자기 목록에서 빠졌는지는 설명해야 할 테니까요.”

그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있는 사이, 드레스너 사장이 도윤에게 다가갔다.

“약속대로 파베르제의 달걀은 빌려드리겠소. 마침 작품이 현재 런던에 있으니 직접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아니면 숙소로 배송해 드릴 수도 있고. 편하신 대로 해 드리죠.”

도윤이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더니 그 뒤에 뭔가를 적어서 드레스너에게 건넸다.

“현재 묵고 있는 호텔의 명함입니다. 뒷면에 제 방 번호를 적었으니 거기로 배송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래도 천만 달러가 넘는 물건을 직접 들고 다니는 건 부담이 돼서요.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만.”

도윤은 미련 없이 돌아서더니 최서라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서는 곧장 전시장을 떠났다.

“오스틴 씨. 죄송하지만 경매장 앞으로 차를 가지고 와 주시겠어요? 부탁드려요.”

오스틴이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최서라가 얼른 도윤의 뒤를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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