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3. 파베르제의 달걀
제법 북적이던 전시장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이도윤과 최서라가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관람객들까지 썰물 빠지듯 사라진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은 드레스너 사장을 비롯한 크리스티 관계자들뿐이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판매 의뢰한 놈이 누구였지?”
도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드레스너 사장이 이를 갈며 물었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해소시킬 대상이 필요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런던 지점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림의 주인은 안톤 서머스 경입니다. 하지만 경매를 직접 의뢰한 대리인은 막심 크로이츠라는 딜러입니다.”
“누가 너보고 대답하래? 왜 네가 아직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거야!”
고함 소리가 텅 빈 전시장을 쩡쩡거리며 울려 퍼졌다. 지점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너는 해고야. 다시는 내 눈에 띌 생각 하지 마. 만약 그랬다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드레스너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이린!”
“네. 사장님.”
몸에 살짝 달라붙는 청회색 정장을 입은 늘씬한 여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드레스너의 비서인 아이린 커였다.
“네가 맡아서 그 두 놈의 뒤를 샅샅이 캐봐. 감히 크리스티의 얼굴에 먹물을 끼얹었으면 자기들도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를 해야지.”
“책임지고 확실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그 젊은 친구 이름이 이도윤이라고 했지? 그 친구에 대해서도 알아 봐.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뭔지.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긁어모아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드레스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지점장을 돌아보지도 않고 전시장을 떠났다. 아이린이 얼른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 * *
“호텔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경매장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는 도윤의 뒤에서 최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급히 뛰어나왔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네. 시간이 다소 이르기는 하지만 일찍 돌아가서 쉬려고요”
“그럼 제가 호텔까지 태워 드릴게요. 같이 왔던 오스틴 씨가 차를 가지고 왔거든요.”
“고맙기는 하지만 괜히 수고를 끼치게 하는 것 같아서….”
“덕분에 수백억을 날릴 뻔한 위기를 넘겼어요. 그 정도 수고는 수고도 아니죠.”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틴이 몰고 나온 차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어깨를 으쓱한 도윤은 최서라와 함께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오늘 너무 고마워서 그런데 제가 식사를 대접해도 될까요?”
차가 출발하자마자 최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마트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밥을 먹기에는 시간이 좀 이르네요. 차나 한 잔 사주시면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묵고 계신 호텔이 리츠라고 하셨죠? 거기 티룸의 애프터눈 티 세트가 괜찮은데 그럼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건 어떠세요?”
“그럼 저도 편하고 좋겠네요. 그렇게 하죠.”
갑자기 대화가 뚝 끊겼다. 최서라가 곁눈질로 힐끗 살펴봤지만 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불편했다. 이 남자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데이트도 한 번 안 해 봤나? 여자랑 같이 있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건 뭐야?
“저기, 그런데 시계는 안 차고 다니세요? 남자의 로망은 시계라고 하던데.”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도윤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최서라를 쳐다봤다.
“시계요?”
“네. 조금 전에 스마트 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셔서요.”
“아, 저는 물에 들어갈 때 말고는 시계를 안 찹니다. 불편해서요.”
“물에 들어가신다고요?”
“미국에서 유학할 때 취미로 스쿠버를 배웠습니다. 어쩌다 보니 군대도 그쪽으로 갔고요.”
“스쿠버와 연관된 군대라면…, 아 그 유 뭔가 하는 부대 말인가요?”
“맞습니다. UDT. 덕분에 군 생활 내내 물에는 실컷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훈련이 힘들어서 후회 많이 했어요. 하하.”
“아, 그래서 테이트 브리튼에서도 그 흑인 남자를 가볍게 상대하셨나 보네요.”
“그거하고는 상관없습니다. UDT가 길거리 싸움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요. 그리고 사실 싸움은 잘 못해요. 그냥 그 친구가 허우대만 크고 속은 부실했던 거죠.”
명작을 감정하는 사내와 특수부대는 얼핏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 남자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할 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오스틴이 시선을 앞에 둔 채로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 사장인 제임스 드레스너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속이 좁고 독한 것으로 유명하죠. 아마 오늘 일 때문에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박사가 앞으로도 미술 시장에서 계속 일을 할 거라면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크리스티처럼 큰 회사의 사장이 됐죠?”
최서라가 불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물론 비즈니스 능력이 대단하니까요. 처음 크리스티에 입사한 이후로 지금까지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업이라는 게 꼭 착한 사람이 성공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대단한 사업가 때문에 제 앞길이 험난할 지도 모른다는 뜻이군요.”
도윤의 말에 오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도 오늘 이 박사님 덕에 망신을 좀 당하기는 했지만, 드레스너 사장이 느꼈을 모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그 사람 뒤끝이 질깁니다.”
“그렇군요. 충고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래도 이 박사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바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단, 너무 센 적을 만들지는 마세요.”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달랐지만 도윤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리츠 호텔에 내려준 오스틴은 곧바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도윤은 일단 데스크에서 열쇠를 수령한 뒤 방에 올라가지 않고 호텔의 티룸에서 최서라와 마주앉았다.
“오늘 큰 신세를 졌어요. 이 박사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제 손으로 수백억을 날릴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웠어요.”
최서라는 자리에 앉자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실제로 경매에 참가하지도 않았잖습니까? 너무 그러시면 오히려 제가 민망합니다.”
“민망한 건 저죠. 솔직히 처음에는 이 박사님 얘기를 반신반의 했거든요.”
“정체도 모르는 사람의 얘기를 반이라도 믿어준 게 어딥니까? 최서라 씨가 제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드레스너 사장도 그렇게 흥분하지 않았을 거예요.”
마침 주문한 티 세트가 나왔다. 밀크 티를 살짝 입에 댄 최서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국에는 앞으로 한 달 정도 더 계실 거라고 했죠?”
“네. 마음 같아서는 다른 나라도 더 둘러보고 싶은데 어머니가 그만 귀국하라고 성화예요. 아직은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쓰는 입장이라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하.”
“돌아가시면 뭘 하실 거예요? 혹시 대학 강단에 서실 계획인가요?”
“아뇨. 당분간은 집안일을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집도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어서요. 남을 가르치는 건 체질에 잘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혹시 여유가 될 때 청파 갤러리 일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고모님은 항상 실력 있는 감정가를 찾기가 어렵다고 투덜대시거든요.”
“저희 갤러리와 충돌되는 일만 아니라면 가능합니다. 물론 보수가 적당해야 하겠지만요. 말씀드렸다시피 아직은 백수나 다름없는 신세라서요. 돈을 좀 벌어야 합니다.”
“최고 대우를 해 드리라고 고모님께 신신당부할게요.”
“아니, 꼭 최고 대우까지는….”
“최고 대우를 해드려야죠. 최고의 감정가라는 걸 제가 직접 목격했는데요.”
도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최서라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내기의 대가로 언급하신 파베르제의 달걀 말이에요. 그게 뭔가요?”
“파베르제는 러시아의 유명한 세공업자였습니다. 혹시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아뇨. 사실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어요. 옥스포드에서는 전공을 바꿔서 미술사로 석사를 받기는 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렇군요. 아마 세공업자 가운데 파베르제만큼 유명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짜르의 총애를 독차지할 만큼 뛰어난 장인이었으니까요.”
러시아 제정 말기, 황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시절, 칼 피터 파베르제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보석 세공업자로 활동했다. 그는 집안이 넉넉했던 덕에 젊은 시절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세공 작품들을 견학할 수 있었다. 그러다 1882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판 러시아전에 출품한 금속 세공 작품으로 황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역사적으로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들이 많습니다. 파베르제는 금속과 보석 세공 기술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내기에서 이긴 대가로 빌리기로 한 그 달걀이 바로 파베르제가 만든 세공 작품이라는 뜻인가요?”
“네. 파베르제 공방은 알렉산드르 3세와 그 아들인 니콜라스 2세를 위해 모두 쉰 네 개의 달걀을 만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마흔 일곱 개는 주인이 있지만 나머지 일곱 개는 혁명의 와중에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그런데 몇 년 전, 사라진 일곱 개 가운데 하나가 헝가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걸 크리스티에서 재빨리 구입한 거죠.”
“근데 파베르제는 왜 하필 달걀을 만들었을까요? 보통은 목걸이나 팔찌, 아니면 왕관 같은 걸 만들지 않나요?”
“알렉산드르 3세는 매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부활절이 되면 아내에게 달걀 모양의 세공품을 선물했죠.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아, 그 달걀이 말하자면 이스터 에그였던 거군요. 부활절 달걀.”
“그렇습니다. 나중에는 파베르제의 달걀을 마음에 들어 한 황제가 부활절이 아닐 때에도 선물용으로 주문하면서 개수가 많아졌죠. 그 전통을 아들인 니콜라이 2세가 이어받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매년 두 개씩 납품받았습니다.”
“그럼 아까 그 달걀을 ‘열리지 않는 달걀’이라고 부른 이유는 뭐에요?”
“파베르제의 달걀은 안에 뭘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인형 아시죠?”
“네.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그 인형 안에는 다시 작은 인형이 계속 들어있는 거 말이죠? 러시아 여행 갔을 때 몇 개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어요.”
“그것하고 비슷합니다. 파베르제가 처음 만든 달걀은 그 안에 금으로 만든 노른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노른자를 열면 다시 정교하게 만든 소형 왕관 복제품이 나오는 식이죠. 달걀마다 크기나 외부의 장식이 각기 다르기도 하지만, 안에 들어있는 세공품 역시 저마다 특별한 이유와 개성을 가지고 있죠. 수집가들에게는 그게 또 큰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티가 가지고 있는 달걀은 열리지 않는다는 건가요?”
“네. 그 달걀은 니콜라이 2세가 파베르제에게 주문한 마지막 달걀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황실 전체가 몰살당했으니까요. 문제는 그 달걀만 유독 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슨 자물쇠 같은 게 달려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닌데, 특별한 방식으로 조작을 해야만 열 수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 특별한 방식이 뭔지를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안에 뭔가가 들어있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열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러면 애초에 물건을 집어넣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도윤의 설명을 듣던 최서라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저기, 그 달걀을 하루 동안 빌리기로 하셨잖아요. 혹시 달걀이 오면 저도 실물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설명을 들으니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졌어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도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크리스티 쪽에서 달걀을 가지고 오면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시간이 되면 제 방으로 오세요.”
말을 해 놓고 나니까 느낌이 좀 묘했다. 여자더러 남자 혼자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찾아오라고 한 셈이기 때문이다.
“아, 그게 함부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말씀드렸다시피 굉장히 비싼 거라서요.”
도윤이 황급히 변명을 하는데 최서라가 그의 앞으로 불쑥 자신의 스마트 폰을 내밀었다.
“여기 번호 찍어 주세요. 저장해 놓게.”
도윤이 번호를 찍어주자 통화 버튼을 눌러 신호가 제대로 가는지 확인한 그녀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일찍 쉬신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방해했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갈게요. 달걀이 도착하면 꼭 연락 주세요.”
도윤은 이상할 정도로 얼굴이 밝아 보이는 그녀를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줬다. 최서라가 따난 뒤 막 돌아서려는데, 호텔 앞에 검은 색 리무진이 서더니 안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늘씬한 여성을 선두로 몇 사람이 내렸다. 드레스너의 비서인 이아린 커와 크리스티의 경호원들이었다.
차에서 내린 아이린은 자신의 앞에 도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잠시 흠칫 하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내밀었다.
“마침 여기서 뵙네요, 이도윤 박사님. 드레스너 사장님의 지시로 물건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드레스너 이 양반 성격 되게 급하네? 박스의 크기로 볼 때 약속했던 파베르제의 달걀이 안에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