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3. 파베르제의 달걀
“드레스너 사장님이 이렇게 빨리 약속을 지키실 줄은 몰랐네요. 아무리 일러도 내일이나 모레쯤은 돼야 물건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윤이 나무로 만든 상자를 받으며 말하자 아이린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돌려받을 물건이니 빨리 주고 빨리 받는 게 낫죠.”
그녀가 문서를 한 장 내밀었다.
“길에 서서 이러는 게 결례인 줄을 알지만 이미 물건을 전해드렸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수령증에 사인해 주시겠어요?”
“잠깐만요. 물건부터 확인하고요.”
상자를 열자 높이 이십 센티미터 가량의 청록색 달걀이 들어 있었다. 금사를 꼬아서 표면에 그물 형태의 문양을 만들어 붙이고, 각각의 그물눈 안에는 다양한 색의 보석을 박아놓은 형태였다. 파베르제의 달걀은 받침대가 함께 붙어 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이 달걀에는 받침대가 아예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상자를 도로 닫은 도윤이 수령증에 사인해서 건네자 아이린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상자를 열어 물건을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십여 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확인이 끝난 겁니까?”
“네. 진품이 맞네요.”
“……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이 굉장히 빠르시네요.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진짜는 척 보면 감이 딱 오거든요.”
상자를 열고 달걀에 정신을 집중시키자마자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확인은 그걸로 충분했다.
히죽 웃는 그를 잠시 노려보던 아이린이 수령증을 탁 하고 채갔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도윤이 물었다.
“언제 돌려드리면 됩니까?”
“하루 동안 대여하기로 한 거니까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게요. 묵고 계신 방으로 직접 찾아가죠.”
고개만 돌려 대답한 그녀는 곧바로 경호원들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
“내일 이 시간이라. 예상대로라면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아이린 일행이 떠난 것을 확인한 도윤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곧바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온 그는 문을 닫자마자 먼저 방 안의 커튼을 모두 내렸다. 그런 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후읍.”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서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안에 있는 달걀을 꺼내자 청록색의 외피 위로 박힌 금줄과 보석들이 실내의 조명을 반사시키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뛰어난 장인이 만든 명품인데다 황실과 관련된 물건이야. 분명히 잔류 기억이 많이 남아있을 거야.”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달걀 위에 올려놓았다.
* * *
도윤이 처음 물건에 남아 있는 기억을 읽어낸 것은 오광춘 회장이 가져온 가짜 그림을 만졌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워낙 어렸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로서는 그저 정신을 조금만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상이 신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뒤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물건들로부터 다양한 잔류 기억을 읽어내는 경험이 쌓이게 되자 도윤도 자신이 대단히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어떻게 해서 특정 사물에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 자신 외에는 잔류 기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니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기억도 남는 걸로 봐서는 물건에 귀신이나 영혼이 스며드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물건을 만질 때마다 사람의 영혼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것일 리도 없고.”
분명한 것은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소유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의 일부가 남겨진다는 사실이었다. 도윤은 평범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사물에 남겨진 기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가령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손을 댔을 때 문득 알 수 없는 친숙함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은 좀 더 선명하게 느낄 테고.”
도윤의 경우에는 그게 아예 영상의 형태로 눈앞에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사물에 남아 있는 잔류 기억은 소유자가 그 물건에 대해 깊은 감정적 연결을 느꼈을 경우에 더 강해진다. 그가 본 영상에 나타난 인물들 대부분이 물건에 대해 강한 애정이나 공포, 집착 같은 감정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뛰어난 예술품이나 명품들일수록 더 다양하고 선명한 잔류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광춘이 가져왔던 그림이 위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잔류 기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그린 김하선이 과도한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그림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하선은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오광춘을 떠나 도윤의 아버지인 이세준에게로 왔고, 지금은 현소 갤러리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 너는 어떤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줘 봐.”
도윤은 심호흡을 한 뒤 두 손을 달걀 위에 올려놓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상관은 없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집중이 잘 됐다. 특히 여러 가지 사념이 남아 있는 물건으로부터 원하는 영상을 골라내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가 달걀에 정신을 집중시키자 머릿속으로 다양한 영상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모니터가 붙은 커다란 벽면에 서로 다른 영상들이 동시에 플레이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떤 것은 흐릿하고 어떤 것은 선명했다. 그리고 각각의 영상들은 한때 달걀을 소유했던 이들이 경험했던 슬픔과 기쁨, 환희와 좌절의 느낌을 담고 있었다.
도윤이 제일 먼저 집중한 영상은 백발의 노인이 책상 앞에 수그리고 앉아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왼쪽 팔꿈치 옆에는 지금 도윤이 손을 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파베르제의 마지막 달걀 세공품이었다.
문서작성을 마친 노인은 의자 옆에서 곱게 칠해진 목함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 안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달걀 세공품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런 뒤 자신이 글을 적은 종이를 잘 접어 달걀 옆의 공간에 끼워 넣고 뚜껑을 닫았다.
“후우~.”
도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일단 달걀에서 손을 뗐다. 노인이 목함 뚜껑을 닿는 순간부터 잡음이 낀 것처럼 영상이 흔들리더니 그대로 끊어졌던 것이다.
“그 노인이 아마 파베르제일 거야. 근데 뭘 적어서 넣은 거지?”
손재주가 뛰어난 세공사답게 등 너머로 언뜻 보인 파베르제의 글씨는 마치 인쇄된 것처럼 반듯하면서도 유려했다. 이왕이면 내용이 무엇인지까지 정확하게 알고 싶었지만, 영상에서는 종이가 파베르제의 등에 가려져 전체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종이 왼쪽에 달걀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라비아 숫자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많았어. 분명히 달걀을 열고 닫는 방법을 적은 것 같은데,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아쉽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걀 위에 손을 올렸다. 또 다시 여러 가지 영상들이 차례차례 눈앞에 떠올랐다. 도윤은 그 가운데 턱수염이 무성한 남자의 영상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남자는 코밑에도 멋들어지게 휘어진 수염을 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초상화로 남아 있는 니콜라이 2세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근데, 저 양반 지금 벽난로 앞에서 뭘 하는 거지? 설마 파베르제의 달걀을 삶아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영상을 지켜보던 도윤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집중이 깨어질 뻔 했다. 영상 속의 벽난로에는 물이 팔팔 끓고 있는 커다란 솥이 걸렸고, 그 앞에 앉은 남자는 손에 예의 파베르제의 달걀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가 들고 있던 달걀을 솥 안에 풍덩 담가버린 것이다.
남자는 마치 달걀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참 동안 펄펄 끓는 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벽난로 옆에 있던 뜰채를 이용해 달걀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앞에 있던 조그만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뭘 하려는 거야?’
도윤이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두 손에 두툼한 장갑을 꼈다. 그는 왼손으로 달걀 머리를 잡은 상태에서 오른손에 쥔 자그마한 금속 막대로 겉면에 장식된 그물눈을 여기저기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어?’
보고 있던 도윤은 깜짝 놀랐다. 남자가 누르는 대로 그물눈 안의 달걀 표면이 안으로 쑥쑥 들어갔기 때문이다. 도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남자가 그물눈을 누르는 위치와 순서를 기억했다. 잠시 후, 남자가 달걀을 양손으로 쥐고 비틀자 한없이 견고하게만 보이던 파베르제의 달걀이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위아래 두 부분으로 쪼개졌다.
‘달걀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끓는 물에 넣어서 온도를 높여야 하는 거였구나. 그냥 불에 넣고 달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온도가 정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안에 있는 장치가 작동을 안 하는 것일 테고. 이러니 아무도 여는 방법을 찾지 못했지.’
파베르제의 달걀은 하나에 최소 천만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고가의 보석 세공품이었다. 아마 누구도 그런 값비싼 물건을 끓는 물에 빠트릴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달걀이 반으로 나뉘자, 그것이 충분히 식기를 기다린 남자는 미리 준비한 원통형의 금속을 안에 집어넣었다. 납작한 모양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것 역시 뭔가를 담은 통인 것 같았다. 금속 통을 달걀 안에 넣은 남자는 다시 위아래를 연결시킨 뒤 옆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달걀이 원래대로 결합되었다. 그러자마자 영상이 다시 흔들리다가 끊어졌다.
“푸하~.”
도윤은 달걀에서 손을 대면서 숨을 크게 터트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탓이었다.
“여기, 여기, 여기를 누르면 달걀이 열린다는 거지?”
영상에서 니콜라이 2세로 짐작되는 남자는 모두 여섯 군데를 눌렀다. 하지만 아직 가열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도윤이 손가락에 힘을 주고 눌러도 달걀 표면의 그물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물에 넣고 끓이느냐는 건데….”
호텔 방에 커피포트가 하나 비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파베르제의 달걀을 집어넣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샤워실에 있는 세면대에 물을 채우고 달걀을 옆으로 누이면 잠기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샤워용 온수로 달걀을 충분히 달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도윤은 전화기를 들었다.
삼십 분쯤 지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도윤이 문을 열자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커피포트 박스를 세 개나 든 호텔 종업원이 서 있었다. 그의 부탁을 받고 호텔 앞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급히 사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도윤은 종업원이 건네준 영수증을 힐끗 보고는 백 파운드 지폐 두 장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영수증에 적힌 가격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돌아서는 종업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윤은 가방에서 멀티탭을 꺼내 호텔에 원래 있던 것까지 네 개의 커피포트를 모조리 연결했다. 커피포트마다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 방의 배선 용량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이 다 끓을 때까지 안전 스위치가 내려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마 후, 포트마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세면대 바닥의 마개를 닫고 파베르제의 달걀을 얹어두었다. 그런 뒤 물이 펄펄 끓고 있는 포트를 들고 와서 하나씩 들이부었다. 네 개의 커피포트를 모두 비우자 예상대로 세면대가 가득 찼다.
“제발 열려라. 안 그러면 호텔 주방까지 뛰어가야 하니까.”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될 때, 도윤은 방에 비치된 긴 구두주걱으로 물에 빠진 달걀을 살짝 들어 올린 뒤 수건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그 자세 그대로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았다. 수건을 댄 상태에서 달걀의 머리 부분을 잡고서는 영상에서 보았던 대로 첫 번째 그물눈을 볼펜으로 세게 누르자 희미하게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그 부분이 살짝 들어갔다.
‘됐다!’
도윤은 기억해둔 순서에 따라 나머지 다섯 개의 그물눈을 차례대로 눌렀고, 그때마다 단단하던 달걀 표면은 어김없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마지막에 달걀의 양끝을 두 손으로 잡고 비틀자 아무런 저항 없이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열려라, 참깨!
안에는 영상 속의 남자가 집어넣었던 납작한 금속 통이 들어 있었다. 빛깔이나 광택으로 보아 순금으로 만든 통이 분명했는데,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높이에 지름이 10cm 가량 되었다.
다행히 순금 통은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어 손으로 힘을 주자 쉽게 열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도윤을 적지 않게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통 안에서는 예상 외로 둘둘 말린 천이 나왔다. 통의 높이 그대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폭을 가진 가늘고 긴 띠였는데, 말려있던 띠를 모두 풀자 길이가 5미터 가량 되었다. 띠의 앞뒤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색의 얼룩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뭘 그린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알파벳이나 키릴 문자는 아니었다.
“황당하네.”
도윤은 기가 막혔다. 차라리 보석이라도 하나 나올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