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4화 (14/300)

14화

3. 파베르제의 달걀

“서라 씨가 한 번 파베르제의 달걀을 열어보실래요?”

갑작스러운 말에 최서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봤다.

“네? 이거 아무도 못 연다면서요?”

“그래도 혹시 알아요? 서라 씨의 섬세한 손길이 기적을 낳을지.”

“푸훗! 그게 뭐예요?”

최서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나도 내가 이렇게 느글거리는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도윤은 민망함을 꾹 참고 최서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잡아 달걀 위에 살짝 얹으면서 정신을 집중시켰다. 순간 달걀과 그녀에게 맺힌 붉은 빛이 동시에 환해졌다. 최서라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으차.”

도윤은 재빨리 쓰러지는 그녀의 등을 받친 뒤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유물을 직접 만질 수 있어서 금세 끝났네.”

링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인의 신체와 접촉해야 한다. 다만 유물을 직접 만질 필요는 없었다. 그럴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력의 소모도 심하기는 하지만 유물과 1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도 링크 자체는 가능했다. 물론 거리가 그 이상 멀어지면 링크가 힘들어진다.

최서라를 침대에 눕히고 시계를 보자 벌써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크리스티 측에서 사람을 보내올 때까지 대략 네 시간 남짓 남았다.

“그 전에 깨어날까? 힘들 것 같은데….”

유물의 주인은 능력을 전해 받는 순간에 강한 정신적 충격을 느낀다. 대개의 경우 이번처럼 기절하는데, 짧으면 몇 시간, 길 때는 며칠씩 깨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도윤 역시 중간에 잠시 눈을 뜨기는 했지만, 처음 다산의 능력을 물려받을 때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도윤은 쓰러진 최서라의 이마를 짚었다가 손목을 잡고 맥박을 체크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열이 발생하고 맥박도 빨라졌다.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신체든 정신이든 한 단계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윤의 경우에는 깨어난 다음날부터 천재적인 기억력을 발휘했지만, 보통은 정신을 차린 뒤에도 며칠에 걸쳐 신체를 변화를 경험한다. 심한 사람은 반년이 넘어서야 변화가 완료되는 경우도 봤다.

“으음.”

누워있던 최서라가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열이 오르면서 숨이 답답해지는 모양이었다. 저럴 때는 본인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굳이 병원에 데리고 갈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병원에서도 가벼운 체온 상승과 맥박 수의 증가 이외에는 특별한 증상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 가장 큰 문제는 불필요한 치료를 하다가 오히려 정상적인 신체 변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였다. 도윤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여기서 재우는 거야 어려울 게 없지만, 잘못하면 오해를 사겠는데?”

그가 묵고 있는 방은 싱글 침대가 두 개 있는 2인실이었다. 마침 1인실이 없어서 그냥 잡은 방이었는데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덕분에 최서라가 하루 종일 깨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게 됐다. 다만 다 큰 처녀를 남자가 있는 방에서 재워야 한다는 게 다소 껄끄러웠다. 게다가 재벌 가문의 일원이니 소문이라도 나면 스캔들이 될 가능성이 컸다.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설마 소문이 나겠어? 크리스티 쪽에서 사람이 오면 침대 시트로 얼굴을 잠시 덮어놓으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이 아가씨는 도대체 무슨 능력을 얻었을까?”

유물로부터 무슨 능력을 얻었는지는 그 주인 이외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인 역시 깨어난 뒤에 생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 얻은 능력을 자각하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직접 확인하고 느껴야 한다는 얘기다. 심지어 받은 능력이 미미하거나,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일 경우에는 아예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파베르제는 뛰어난 장인이었으니까 손재주를 물려받았을까? 아니면 예술적 안목? 그 양반이 인간 말종이었다는 얘기는 없으니 설마 흉악한 능력은 아니겠지?”

능력에는 선악이 없다. 도둑질을 잘 하거는 것도 나름 능력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도윤이 링크 시켜줬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새로운 능력을 바탕으로 희대의 사기꾼이 된 사람도 있었다. 같은 능력이라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나는 다섯 시까지 뭐하지?”

갑자기 든 생각에 난감해졌다. 고가의 보석 세공품과 자기 힘으로는 깨어나지 못하는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다. 함부로 방을 비우기 어렵게 됐다는 말이다. 크리스티 쪽에서 사람이 오는데 네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네 시간이나 남았다.

*   *   *

도윤은 누워 있는 최서라에게 방해가 될까 봐 TV도 켜지 못한 계속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가운데 시계가 어느덧 다섯 시를 가리켰다. 이미 삼십 분 전에 아이린 커라는 여자로부터 파베르제의 달걀을 회수하러 가겠다는 연락이 온 상태였다.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고프네. 달걀을 돌려주고 나면 룸서비스라도 불러야겠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젖혀 기지개를 켜는데 갑자기 침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누워있던 최서라가 몸과 팔을 마구 떨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떠는지 침대가 함께 진동할 정도였다.

도윤이 얼른 침대로 다가가자 최서라의 얼굴에서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신체 변화에 따른 증상이 분명했다. 사람마다 능력을 각성할 때 겪는 신체변화가 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아이린이라는 여자가 곧 올 텐데.”

약을 먹이거나 납치를 한 게 아닌 이상, 건강한 청년 방에 여자가 누워있는 것 자체는 큰 흠이 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서라는 재벌가의 일원이었고, 아이린은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스캔들이 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사실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원래 도윤은 최서라의 얼굴을 잠시 시트로 덮어놓은 상태에서 손님을 맞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몸을 떠는 상태에서 그랬다가는 당장 의심을 받을 게 뻔했다. 아이린이 그를 밀어내고 시트를 젖힐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큰일이네. 그렇다고 지금 깨우는 것도 불가능하고.”

초조해서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아이린이었다.

“지금 호텔 로비에요. 방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도윤의 머리가 급속도로 회전했다. 그는 재빨리 여행가방을 열고 안에서 긴 천을 꺼냈다.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빼낸 바로 그 띠였다. 평소에 밧줄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다행히 아마천은 제법 튼튼하고 질긴 소재였다.

도윤은 미안함을 무릅쓰고 최서라의 몸을 천으로 꽁꽁 묶었다. 그녀의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뒤 몸통을 통째로 둘둘 감아버린 것이다. 잠시 후, 상반신이 미이라처럼 변한 그녀가 몸을 떠는 것을 멈췄다. 도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옷을 벗어버리고 샤워실로 뛰어 들어가 꼭지를 틀었다. 그는 머리만 간단히 적신 뒤 재빨리 목욕 가운을 걸치고서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짐작대로 아이린 커가 몇 명의 남자 경호원들과 함께 서 있었다.

“분명 미리 연락을 드렸던 것 같은데….”

아이린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도윤을 보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이 상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침대를 훑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시트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의 길이로 봐서는 여자가 누워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조금 안 좋은 때를 택해서 왔나 보군요.”

도윤은 억지로 무안함을 참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실상은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게 분명하지만 확실히 안 좋은 때인 것은 맞았다. 그는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들어 아이린에게 건넸다.

“잘 봤습니다. 덕분에 연구에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성과는 좀 있으셨나요?”

상자를 열어 꼼꼼하게 물건을 확인한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도윤은 그녀가 묻는 게 뭔지 짐작했지만 그냥 모른 척 했다.

“전공과는 무관하지만 평소에 근대 러시아의 금속 공예품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언제 시간을 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 볼 생각입니다. 거기에 파베르제 박물관이 있으니까요.”

아이린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침대를 훑더니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군요. 뭐 파베르제의 달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럼 이만.”

도윤은 그녀가 호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입에서 저절로 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첩보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게 무슨 짓이냐.”

침대로 다가가 시트를 걷자 얄미울 정도로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최서라가 보였다. 그 사이에 몸 떨림이 멈췄는지 몸도 많이 안정된 듯 했다. 도윤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이 아가씨를 처음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이상하게 사건 사고의 연속이네. 악연인가?”

일단은 몸을 묶었던 천을 풀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던 도윤은 얼굴을 흠칫 굳히며 손을 멈춰야 했다. 최서라의 몸에서 이상한 문양이 보였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몸을 묶고 있는 천에서 이상한 게 보였다.

“이게 뭐야?”

도윤은 최서라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살폈다. 확실했다. 다른 곳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얼룩의 연속에 불과했지만, 최서라의 가슴 부분은 달랐다. 빙빙 돌아가며 겹쳐진 천의 문양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가만, 이거 혹시?”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도윤은 일단 최서라의 몸을 묶었던 천을 모두 끌러냈다. 그런 다음 옷장을 뒤져 두 개의 옷걸이를 꺼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옷걸이 두 개를 떨어뜨려 놓고 양쪽 가로대를 오가며 천을 감았지만 당장은 아무런 모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옷걸이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조절하며 서로 겹친 부분을 주시하자. 어느 순간 단순한 얼룩처럼 보이던 문양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됐다. 되긴 됐는데…, 이건 또 뭐지?”

띠처럼 긴 천에 그려진 얼룩들이 아귀가 딱 맞게 연결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 전체가 뭘 그린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에 코를 박고서 한 시간 넘게 살펴보았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도윤은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산 넘어 산이군. 니콜라이 2세가 이렇게까지 수수께끼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는 일단 스마트 폰으로 완성된 모양을 찍은 뒤 옷걸이에서 천을 빼내 챙겼다. 당장은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지만 그래도 천이 담고 있는 비밀의 실마리 하나는 푼 셈이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 천천히 연구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도윤은 고민 끝에 다른 때와는 달리 최서라를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녀가 또 중간에 경련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경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묶어두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큰 호텔이라서 그런지 데스크에 전화를 하자 신속하게 조치가 이루어졌다. 오래지 않아 구급대원들이 방까지 직접 찾아와 그녀를 병원으로 옮겨주었던 것이다.

병원에 실려 간 최서라를 검진한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체온이 약간 높고 맥박도 다소 빠릅니다. 하지만 그 밖에 특별히 염려하실 만한 증상은 없네요.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게 걱정되기는 하는데 뇌파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어요. 그냥 잠이 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추가 검사를 하면 조금 더 정확한 걸 알 수 있겠는데, 하시겠습니까?”

그는 최서라의 보호자를 자처한 도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보죠. 내일도 깨어나지 않으면 그때 가서 검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서라가 깨어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 훨씬 지나서였다. 도윤은 그녀의 옆에서 병실을 지켰고, 다행히 밤사이 추가 경련은 없었다. 깨어난 그녀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기겁을 하긴 했지만.

“제, 제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거죠?”

도윤은 머리를 잡아 뜯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달랬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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