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6화 (16/300)

16화

3. 파베르제의 달걀

“몇 년 전에 아주 우연한 기회로 라스푸친의 부검 기록을 손에 넣었지.”

다니엘은 신이 난 듯 말을 계속 이었다. 드레스너도 슬슬 흥미가 일기 시작했다.

“그런 게 있었군요. 놀랍습니다.”

“당연히 있었지. 황실과 귀족들이 연루된 사건이었으니 부검의도 일을 대충 처리할 수가 없었거든. 아주 꼼꼼하고 세밀한 기록을 남겼어.”

“대단합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다니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자네가 신경 써야 할 건 뭐가 적혀 있었느냐가 아니라 뭐가 적혀 있지 않았느냐는 거야.”

“그 말씀은…, 반드시 있어야 할 내용이 빠졌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거야. 기록에는 라스푸친에 대한 검시 결과뿐만이 아니라 그가 죽을 때 입었던 옷이며 휴대했던 소지품 목록이 전부 적혀 있었네. 목걸이만 빼고.”

“목걸이가 없었다고요? 살해당할 당시에는 착용하지 않았던 겁니까?”

다니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드레스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라스푸친에 대한 온갖 기록을 다 조사했어. 조금이라도 그와 연관된 물건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확인했지. 그런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라스푸친은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다는 거야. 목욕을 하거나 잠잘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죽을 때조차 말입니까?”

“그래. 만약 그가 당시에 목걸이를 걸고 있지 않았더라면 청산가리가 든 과자를 먹는 순간 바로 죽었을 거야. 총알을 맞고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고.”

이제는 드레스너가 호흡을 가다듬을 차례였다. 그는 방금 다니엘이 한 말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겼다. 목걸이가 없었으면 과자를 먹고 바로 죽었을 거라고?

“도대체 그 목걸이의 정체가 뭡니까?”

드레스너의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반면에 다니엘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혔다.

“나는 라스푸친이 가졌던 모든 능력이 바로 그 목걸이에서 기인했을 거라고 추측하네. 그에 관해서는 몇 가지 근거가 더 있기는 하지만 그것까지는 자네가 알 필요 없어.”

“라스푸친의 능력이라면 혈우병 같은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능력 말입니까?”

“그래. 그는 그걸로 황태자를 살려냈지. 거기에 더해 몸의 상처를 급속히 회복시키는 능력도 있는 게 분명해. 라스푸친이 결국 죽은 것으로 보아 한계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몸의 상처를 급속히 회복시킨다는 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증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귀족들이 라스푸친을 죽였던 그날 밤, 그는 여섯 발에서 열 발 가량의 총알을 맞았어. 하지만 부검 기록에 나타난 총상은 네 군데뿐이었지.”

“총상 가운데 일부가 회복되었다는 뜻이군요. 물에 빠져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정도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적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남은 총상이 있다는 건 목걸이의 회복 능력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해.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도 마찬가지고. 만약 한 번에 완치가 가능했다면 라스푸친이 계속 황실에 머무르지 않았겠지. 한 방에 황태자를 치료했을 테니까.”

“그가 일부러 치료의 강도를 낮췄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더 대단한 물건이라는 뜻이야. 소유자가 원하는 대로 효과를 조절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드레스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굴렸다. 라스푸친의 목걸이가 어떤 것인지는 대충 알겠고, 다니엘이 어째서 그걸 찾는지도 쉽게 짐작이 갔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돈 많은 늙은이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목걸이를 찾으셨습니까? 어디 있는지 알아내셨나요?”

결국 그게 오늘 대화의 핵심이었다. 드레스너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당연히 노인네가 목걸이를 찾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미 그걸 찾았다면 굳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니엘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너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찾으셨다고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찾았다고 생각하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어떻게, 아니 어디서 찾았습니까?”

다니엘의 눈이 탁자 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드레스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파베르제의 달걀 안에 목걸이가 있다는 말입니까?”

다니엘이 마치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만지듯 달걀을 쓰다듬었다.

“나는 라스푸친이 죽을 때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고 확신해. 그런데도 이미 말했듯이 부검 기록에는 그 목걸이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지.”

“그렇다면 부검의가 목걸이를 빼돌렸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힘들었을 거야. 부검할 때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목걸이를 빼돌린 사람이 니콜라이 2세란 말입니까?”

“아마 황태자를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는 네 명의 딸을 낳은 후에야 간신히 아들을 얻었지. 그런데 유일한 계승자인 황태자가 혈우병에 걸렸으니 근심이 클 수밖에. 다른 건 몰라도 라스푸친의 목걸이만큼은 반드시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거야. 비밀스럽게.”

“비밀스럽게 전해준다고요? 왜 굳이 비밀스럽게 합니까? 그냥 주면 되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혀를 쯧쯧 찼다.

“자네는 명색이 세계적인 경매 회사의 사장이면서도 아직까지 권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황태자는 미래의 황제일세. 그런 사람이 목걸이 같은 물건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 사실을 숨겨야지. 그렇잖아도 라스푸친 때문에 주변에서 얼마나 말들이 많았는가?”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의 달걀을 톡톡 쳤다.

“이 달걀말이야. 이건 파베르제가 만든 마지막 달걀일세. 라스푸친은 1916년 12월 30일에 죽었어. 귀족들이 연말 파티 자리에 그를 초대했다가 살해했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지. 그리고 파베르제의 마지막 달걀은 이듬해 부활절에 완성되었고.”

“황태자를 위한 선물이었군요. 파베르제의 달걀은 원래 선물용으로 제작되었으니까.”

“맞아. 다른 것들과는 달리 마지막 달걀이 하필 ‘열리지 않는 달걀’이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걸세. 황태자 이외에는 아무도 열 수 없게 하고 싶었겠지.”

드레스너는 갑자기 니콜라이 2세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목걸이가 그렇게 탐이 났다면 라스푸친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냥 빼앗으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아닌가? 아마 자신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긴 니콜라이 2세는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좋은 이웃으로 남았을 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선량한 인간으로 유명했다. 그 멍청한 황제는 아마 라스푸친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굳이 목걸이를 빼앗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윤리 의식이 투철한 인간은 결국 유약하고 무능한 황제로 살다 혁명군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착하다는 건 무능함을 듣기 좋게 포장한 말일 뿐이지.’

입맛을 다신 드레스너가 다시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이 달걀 안에 라스푸친의 목걸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열어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긴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파베르제의 마지막 달걀은 지금까지 아무도 열지 못했어. 잘 만들어진 소형 금고나 다름없는 셈이지.”

“혹시 황실 일가가 처형당할 때 황태자가 목걸이를 차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자네라면 혁명군에게 잡혀가면서 이 정도 크기의 세공품을 몸에 지닐 수 있었겠나? 소문이 이상하게 나기는 했지만, 처형당한 황가의 유해가 발굴되었을 때 작은 금붙이나 보석조차 하나도 나오지 않았어. 그들은 빈 몸으로 끌려갔던 거야.”

“나중에 살아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기를 기약하면서 말이군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싶었겠지. 사람들은 남들도 다 자기 같은 줄 아는 법이니까.”

드레스너의 눈이 자기 앞에 있는 달걀 위에 머물렀다. 그의 눈이 갈망을 품고 반짝이는 것을 본 다니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왜? 달걀의 비밀을 알고 나니까 새삼 괜히 팔았다는 생각이 드나? 가격을 높이고 싶어?”

드레스너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큰일 날 뻔 했군.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크리스티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팔았던 물건을 먼저 무르자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나저나 그럼 이걸 여는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그랬으니 거액을 주고 이 달걀을 샀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다니엘은 드레스너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나도 그건 아직 못 찾았네.”

“그럼 혹시…, 부술 겁니까? 하긴 이천만 달러나 하는 비싼 물건이기는 하지만 아까울 것도 없겠군요. 말씀하신 대로 라스푸친의 목걸이가 들어있다면 말이죠.”

다니엘이 드레스너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물건 값으로 이천만 달러를 달라는 건가?”

“사실은 더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입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알겠네. 그렇게 지불하지. 하지만 당장 부술 건 아니야.”

“여는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있나 보군요.”

“그래. 그래서 자네를 직접 찾아온 거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들려준 이유도 그 때문이고. 내가 자네에게 중요한 의뢰를 할 게 있어.”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수락 여부는 그 뒤에 결정하지요.”

다니엘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결국 별말 없이 파베르제의 달걀을 가리켰다.

“세상에 이 달걀을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세 명 뿐이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들인 황태자. 그리고….”

“달걀을 직접 제작한 파베르제이겠군요.”

“그래. 그런데 파베르제는 이 달걀을 진상할 때 황제에게 따로 문서를 하나 만들어줬어.”

“달걀을 여는 방법을 적은 매뉴얼 같은 건가요?”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얘기하기가 편하군. 맞아. 그 문서를 찾아내게. 크리스티라면 아마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과분한 신뢰이긴 하지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남아있기는 합니까?”

“그것도 이제부터 자네가 알아봐야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그 문서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어. 이제 시간이 별로 없네. 지치기도 했고.”

“만약 그 문서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거라면 크리스티는 헛수고만 하는 셈이군요.”

다니엘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자네한테 1년 기한을 주지. 그 안에 쪽지를 찾아내서 가져오면 천만 달러를 주겠네.”

노인네가 제법 세게 부르네? 드레스너는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또나 마찬가지군요. 찾으면 천만 달러, 못 찾으면 당연히 꽝이겠죠? 하지만 그 의뢰 받아들이겠습니다. 경매라는 게 원래 도박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천만 달러짜리 도박이라면 크리스티가 운을 걸어볼 만 하죠.”

“어차피 1년 안에 방법을 찾지 못하면 나는 정말로 이 달걀을 깨버릴 작정이야. 나로서는 이 안에 확실히 목걸이가 있다고 믿지만 그것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지. 자네가 쪽지를 찾아주면 나도 천만 달러를 절약하는 셈이니까 나쁘지 않은 거래야.”

“계약서를 작성할 만한 거래가 아니니까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수고하게. 파베르제의 달걀 대금은 오늘 중으로 입금하지. 비서에게 원하는 계좌를 알려주면 될 거야.”

다니엘은 그 말을 끝으로 파베르제의 달걀이 든 상자를 들고 자리를 떴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드레스너는 건물 앞까지 그를 배웅했다.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던 드레스너는 문득 일주일 전에 달걀을 빌려갔던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젊은 놈이 달걀을 열어봤던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에 천만 달러가 걸리게 되자 갑자기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로서는 알 방법이 없지만 만약 도윤이 두 사람 사이의 거래를 전해 들었다면 초콜렛 과자가 이천만 달러짜리가 됐다며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다니엘과 드레스너로서는 처음부터 파베르제의 달걀 안에 라스푸친의 목걸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들어 있던 기묘한 천 조각은 도윤의 여행 가방 속에서 얌전히 잠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