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8화 (18/300)

18화

4. 아버지의 초상

장예주 박사는 메모를 전해준 뒤 점심만 먹고 바로 떠났다. 말로는 급한 일이 있다고 했지만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다만 그녀는 떠나기 직전, 명함을 하나 건넸다.

“서울 가거든 시간 있을 때 이 사람한테 한 번 연락해 볼래?”

명함을 들여다보니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성옥션 기획실장 한치호? 이 분이 누굽니까?”

“이름 못 들어 봤어? 요즘 미술 시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젊은 친구 가운데 하나잖아. 이 박사 집에서도 갤러리를 운영하니까 알만도 할 텐데?”

“아시잖아요. 저 열여섯 살 때부터 외국으로만 떠돌아다닌 거. 유학 마치고서는 바로 군대 갔다 오느라 아직 우리나라 미술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래? 그럼 귀국하면 한 번 만나 봐. 겸사겸사 젊은 유망주들끼리 안면도 익힐 겸.”

“젊어요? 몇 살인데요?”

한성 옥션은 한국에서 제일 큰 경매회사였다. 그런 곳의 기획실장이라면 경매와 전시, 기업의 구매 대행 등을 총괄하는 위치다. 그런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젊다는 게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미술 시장은 특히 경험이 중시되는 곳이었다.

“올해 서른하나나 둘 정도 되었을 거야. 아직 미혼이고. 아버지가 국회의원 한대길이고, 엄마가 거기 사장이잖아. 성진아 사장 이름은 들어봤지?”

“아, 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름은 몇 번 들어봤어요.”

그제야 이해가 갔다. 사장 아들이었군.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요. 아무리 사장 아들이라도 그 나이에 벌써 기획실장이라니.”

슬쩍 운을 떼 봤다. 그러자 장예주의 표정이 약간 묘하게 변했다.

“업계의 평가는 반반이야. 비즈니스적인 능력은 뛰어난 편인데 작품을 보는 안목은 글쎄…? 화가의 유명세에 너무 집착한다는 평이 있기는 해. 하지만 솔직히 안 그런 옥션이나 화랑이 어디 있어?”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느낌으로 볼 때 장예주 역시 후한 평을 주는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분한테 연락을 하라는 이유는 뭐예요?”

“한성 옥션에서 최근에 일반인을 상대로 한 미술사 강좌를 기획하고 있나 봐. 옥션이 너무 상류층만을 위한 폐쇄적 시장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많으니까 그걸 무마하려는 뜻이겠지. 얼마 전에 한 실장이 나한테 전화를 했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미술사 전문가가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그래서 이 박사를 추천했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요? 꼭 집어서 그렇게 말을 했습니까?”

도윤의 표정이 다소 뜨악하게 변하자 장예주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말했잖아. 유명세에 집착한다고. 이왕이면 외국에서 학위 받은 사람을 쓰고 싶은 거겠지. 아마 강의 전체를 혼자 맡는 건 아닐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락해 봐. 예전에 받은 명함이기는 하지만 전화번호는 안 바뀌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요? 전공 학생들보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강의가 더 어렵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알지. 근데 서라 씨한테 돈 벌어야 된다고 했다면서? 강사료를 제법 두둑하게 준다고 들었으니까 한 번 만나 봐. 만나보고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때 가서 거절해도 되잖아.”

듣고 있던 최서라가 움찔했다. 도윤은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인문학 분야 전공자는 학위를 받아도 강의 자리 얻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추천한 장예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냥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얼마나 줄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알겠어요. 귀국하면 일단 전화는 해 볼게요. 아, 그리고 이 존 카론이라는 사람도요.”

INB 소속의 작가라는 존 카론의 주소지는 미국으로 되어 있었다. 어차피 당장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국에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나는 할 말 다 했으니까 이만 일어날게. 서라 씨 눈치가 자꾸 보여서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겠다.”

“장 박사님! 제가 언제….”

최서라가 펄쩍 뛰었지만 장예주는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박사 귀국이 내일이라며? 런던에서 데이트 할 시간이 오늘밖에 없으니까 되도록 알차고 재미있게 보내라고. 알았지?”

그녀는 도윤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최서라가 눈을 살짝 내려 깔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괜한 소리라니요?”

“돈 버셔야 한다는 거 말이에요. 장 박사님하고는 워낙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무심코 말이 나왔어요.”

“괜한 소리는 아니에요. 저 돈 벌어야 하는 거 맞아요.”

“그래요? 그럼 다른 강의 자리도 한 번 알아볼까요? 청파 갤러리도 일 년에 한 번씩 두 달에서 석 달 과정으로 단기 강좌를 열거든요. 제가 강사로 추천해 드릴게요.”

에이, 이 아가씨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도윤은 그냥 웃고 말았다.

청파 갤러리는 옥션이 아니라 상설 미술관이다. 거기서 열리는 강좌는 대개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미술사를 강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대중적 강의의 형식을 띤 갤러리 홍보수단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해도 부모님이 다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도윤이 가서 강의할 자리는 아니었다.

“배도 채운 것 같으니까 저희도 슬슬 나가죠? 뭐 특별히 구경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도윤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권했다. 그가 모시겠다고 하자 최서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이런 면에서는 참 마음을 알기 쉬운 여자였다.

“저 레미제라블 보고 싶어요. 런던에 처음 왔을 때부터 계속 보러 간다고 하면서도 아직 못 봤거든요. 그거 굉장히 평이 좋더라고요.”

“뮤지컬이요? 알겠습니다. 마침 극장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천천히 걷죠. 표부터 사요.”

그날 도윤은 밤늦게까지 최서라와 시간을 보냈다.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을 견학하고 런던 아이에 몸을 싣는가 하면 런던 브릿지를 함께 걷기도 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 관람한 레미제라블은 저절로 기립 박수를 치게 될 정도로 훌륭했다. 도윤으로서도 정말 오랜만에 여자와 단둘이서 데이트를 즐긴 시간이기도 했다.

뮤지컬이 끝난 뒤 그는 최서라를 그녀의 아파트까지 바래다주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최서라는 다시 한 번 거듭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오늘 덕분에 너무 즐거웠어요. 정말 감사해요.”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저도 부탁하나 해도 되죠?”

“그럼요. 어떤 부탁인데요?”

“요즘 금속 공예 연습하신다고 했잖아요. 혹시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장 박사님 말고 저도 하나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은근히 그런 걸 좋아해서요.”

사실은 파베르제의 능력을 물려받은 그녀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제대로 능력을 각성한다면 재벌가에서 태어난 천재적인 금속공예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최서라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걸로 드릴게요. 꼭이요.”

“기대할게요.”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서 최서라가 소리쳤다.

“이번 연말연시를 한국에서 보낼 생각이에요. 서울 가면 전화 드려도 되죠?”

“물론이죠. 그럼 나중에 서울에서 봐요.”

다음날, 도윤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   *   *

서울로 돌아온 도윤의 일상은 비교적 한가했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몹시 반기셨지만, 당장 갤러리 일을 맡기려고 하지는 않으셨다.

“당분간은 시차적응도 할 겸 편히 쉬어라. 여기저기 구경도 좀 다니고.”

두 분이 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저 지난 반 년 동안 계속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왔잖아요. 구경은 물리도록 했고 시차적응도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시키실 일 있으면 그냥 시키세요.”

“지난주에 기획 전시가 끝났어. 당분간은 특별히 시킬 일 없다.”

그래도 아들을 백수로 만들 생각은 없으셨는지 명함을 만들어 주셨다. 현소 갤러리 전시기획 팀장 이도윤. 팀원이 하나도 없고 당장은 따로 맡은 일도 없는 이름뿐인 자리였다. 당연히 월급도 없었다.

몇 군데 인사를 다니기는 했다. 그 중에서도 어렸을 때 한문과 서예를 가르쳐주셨던 조태석 교수가 가장 그를 반겨주었다. 조 교수에게 배운 것들은 도윤이 중국에서 유물 복원학을 공부할 때 큰 도움을 주었다.

“학위가 아깝기는 하지만 대학 강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강권할 수도 없고, 그럼 앞으로 부모님 일을 도울 거냐?”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이에요. 아들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셨으니 이제 제가 도와야죠.”

“너 같은 아들이 있으면 부모가 고생할 게 뭐 있냐? 세준이 그 친구가 복이 많은 게지. 내가 다른 건 안 부러워도 그 녀석 자식 복은 부러워.”

“명근이 형도 공부 잘 했잖아요. 잘 나가는 검사 아들을 두신 분이 웬 엄살이세요, 하하.”

“대학 졸업하고 삼 년만에 간신히 사시 패스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놈 그때 합격 못했으면 사시가 없어지는 바람에 로스쿨 가야 했어. 장가라도 일찍 가든지, 쯧쯧.”

조태석 교수의 아들인 조명근은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에서 근무하는 검사다. 대학 졸업 후 삼년 만에 붙었으면 합격이 늦은 게 아니었고,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연수원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윤의 말대로 조태석의 엄살이었다.

한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끝에 일어서는 그에게 조태석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나중에 고서 감정 의뢰가 들어오면 연락하마. 가끔씩 나도 좀 도와줘.”

“그럼요.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이 세상에서 도윤의 숨겨진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의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조태석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에게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다.

어른들에게 두루 인사를 마치자 당장 사람 만날 일이 사라졌다. 남들 같으면 친구들을 만나서 술이라도 마실 텐데, 서울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릴 때의 연필 사건 이후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대학도 외국에서만 다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는 동창이나 은사가 전혀 없었다. 차라리 대학을 다닌 중국과 미국에 친구들이 훨씬 많았다.

다소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를 구제해 준 인간이 바로 안석훈이었다.

“형! 서울 왔다면서요? 그럼 저한테 먼저 연락을 했어야죠.”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그는 당장 나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어려울 것 없지.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안국동에 있는 삼겹살집에 마주 앉았다.

“그렇잖아도 조만간에 전화하려고 했었어. 근데 내가 귀국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도윤의 말에 석훈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크 소리와 함께 입술을 닦았다.

“형이 하도 연락을 안 해서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현소 갤러리에 전화했잖아요. 대표님 아들 왔냐고. 혹시 외국에서 비명횡사했으면 장례식장에라도 가야 할 거 아니에요.”

“이 자식이? 장가도 안 간 사람한테 비명횡사라니!”

“사고란 게 뭐 호적 확인하고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총각인지 유부남인지 알게 뭡니까? 외국에서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라면서요? 아무리 형이라도 눈 먼 총에 잘못 맞으면 그냥 가는 거지 별 수 있어요?”

“미국은 그렇지만 다른 나라라고 해서 총기 소지가 다 합법인 건 아니야.”

“내가 형이 엄한데서 외국 놈들한테 맞고 다닐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거긴 기본적으로 덩치가 유단자인 애들이 많잖아요.”

“야, 인마. 내가 아무리 그래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겠냐? 나도 어릴 때부터….”

“아~, 복싱하고 주짓수 배우셨다고요? 내가 형 군대 있을 때부터 입이 닳도록 얘기했잖아요. 그 알량한 걸로 어깨에 힘주고 다니면 큰일 난다고.”

큭큭 대고 웃는 녀석의 얼굴이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다른 건 몰라도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이 자식한테 당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도윤이 입맛을 다시는 걸 본 녀석이 불쑥 소주잔을 내밀었다.

“보고 싶었어요. 무사히 생환한 걸 기념해서 한잔 합시다.”

도윤도 그만 웃고 말았다. 예전부터 그러기는 했지만 확실히 엉뚱한 녀석이다. 그래도 정이 많고 꿍꿍이가 적어서 속을 터놓고 지내기에는 이만 한 놈도 없었다.

석훈은 도윤이 UDT 생활을 할 때 가깝게 지낸 같은 팀의 일원이었다. 한 팀 7명으로 구성된 UDT 팀에서 도윤은 척후, 석훈은 자동화기 사수였는데, 석훈이 도윤보다 나이도 어리고 계급 역시 낮았기 때문에 형 동생처럼 지냈다.

“집이 수원이라고 했지? 전역하면 술 사줄 테니까 서울로 한 번 찾아와. 사회에서 만나면 형이라고 부르고.”

부대를 떠날 때 그런 말과 함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하지만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속 외국에 나가 있느라 그 동안 전화 통화만 몇 번하고 정작 얼굴을 맞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근데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 전역한 지 벌써 석 달 됐잖아.”

석훈이 손에 들었던 잔을 비우더니 자기 머리를 탁 하고 쳤다.

“아참. 그 얘기 한다는 걸 잊었네. 저 취직했어요. 한성 옥션에. 거기 보안 팀에 들어간 지 이제 한 달째에요.”

뭐, 어디? 그제야 아직 한성 옥션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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