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9화 (19/300)

19화

4. 아버지의 초상

석훈과는 그날 밤 늦게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 도윤이 만취한 상태로 거의 기다시피 집에 들어오자, 서연희가 현관 앞에 팔짱을 낀 채 서서 혀를 찼다.

“쯧쯧. 신혼 초에 지 아버지 술버릇 고치려고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한동안 안심하고 살았더니 아들놈이 자라서 이렇게 또 뒤통수를 치네.”

“엄마, 끅. 사랑해요~~오오오.”

도윤이 히죽 웃으며 서연희를 끌어안으려던 순간, 등에서 짝 하고 찰진 소리가 났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얼른 씻고 들어가 잠이나 자.”

다음날 늦은 아침, 부스스한 모습으로 식당에 내려온 그에게 도우미 아주머니가 해장국을 차려줬다.

“사모님이 끓여놓고 가신 거예요. 드시고 속 좀 푸세요.”

술이 깨자 새삼 죄송했다. 평소에는 절대 과음을 하지 않는데 어제는 이상할 정도로 조절이 안됐다. 오랜만에 편한 동생을 만나는 바람에 마음이 한껏 풀어졌던 모양이다.

“아차! 한성 옥션.”

석훈이 녀석을 떠올리자 장예주 박사가 준 명함에 퍼뜩 생각이 미쳤다. 도윤은 아침을 후다닥 해치우자마자 곧바로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당연히 기획실장이라는 한치호 본인이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전화는 비서실로 연결됐다.

“이도윤 박사님이라고 하셨죠? 교양 강좌 강사 문제로 전화 주셨다고요? 알겠습니다. 연락이 왔다고 실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어, 이거 무슨 고객 안내 전화 같은 느낌이…. 한 시간 뒤, 비서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 두 시에 면접 약속이 잡혔습니다. 그 시간에 괜찮으시겠어요?”

기분이 확 틀어졌다. 이쪽 사정을 고려하는 척 하려면 약속을 잡기 전에 먼저 스케줄을 물었어야지. 게다가 면접이라고? 교양 강좌 강사가 너희 회사 직원이냐?

“죄송하지만 그 시각에는 제가 사정이 있어서 곤란하겠는데요? 모레 점심시간 전이나 글피 오후에는 가능합니다.”

“네? 안 된다고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거절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선약이 있어서 곤란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실장님께 물어보고 다시 전화주시겠어요?”

십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모레 오전 열 시로 약속 시간이 바뀌었다는 통보였다.

이틀 뒤, 도윤은 모처럼 정장을 걸치고 약속 시간에 맞춰 한성 옥션 빌딩을 찾았다. 비서에게 이름을 말하자 그를 살짝 흘겨보더니 기획실장 방으로 안내됐다. 옷차림이나 머리에 상당히 신경을 쓴 티가 역력히 나는 젊은 남자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생각보다 연락이 늦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막 다른 사람을 찾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도윤을 만난 한치호 기획실장이 내뱉은 첫 마디였다. 하마터면 ‘그럼 그러지 그랬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소개해 준 장예주 박사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다.

“죄송합니다. 귀국해서 당장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 보니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를 맡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바쁘신 분을 덥석 만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 건 아니었다.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세준이나 서연희가 아들에게 언제 뭘 시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치호가 ‘이것 봐라?’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희 회사에서의 강의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는 말이군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듣고 보니 그렇게 들리셨을 수도 있겠네요.”

한치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도윤은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런던의 장예주 박사님께서 극구 칭찬하시더군요. 하버드 출신의 젊고 유능한 인재라고. 더구나 미술품 감정에도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장 박사님이 그런 얘기도 하셨습니까?”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을 거라더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박사님이 너무 과대평가를 하신 모양이네요.”

한치호는 그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네가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되지. 그는 잠시 자기 책상이 있는 쪽으로 가더니 서류철을 하나 가지고 와서 펼쳤다.

“어제 이메일로 대략적인 강의 구성과 일정표를 보내드렸는데, 받아보셨죠?”

“네, 봤습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미술사를 모두 망라했더군요.”

“맞습니다. 그 모든 걸 16주 만에 끝내야 하니까 커리큘럼이 좀 빡빡하긴 합니다. 그래도 일반인을 위한 교양 강좌라서 그 이상 끌면 사람들이 중간에 떨어져 나갈 거예요.”

그 말에는 도윤도 동의했다. 물론 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강생들의 반응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세상에는 말재주가 좋은 전문가들이 의외로 적었다.

“이 박사님께는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미술사 강의를 부탁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데 오늘 아침에 보내주신 이력서를 보니까 이력이 상당히 독특하시더라고요?”

도윤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한치호가 손가락으로 들고 있던 문서를 쭉 짚어나갔다.

“고등학교까지는 모두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을 중국에서 다니셨네요? 졸업한 곳이 북경 중앙미술대학 맞죠?”

“맞습니다. 회화와 조소를 비롯해서 건축은 물론이고 고고학과 미술사 관련 학과들이 모두 모여 있는 대학입니다. 유물 복원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교수님들이 계신 곳이기도 하고요. 거기서 중국 미술사와 유물 복원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또 갑자기 또 미국으로 건너가서 후기 인상파 연구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것도 하버드에서요.”

“그게 이상하게 보이시는 모양이군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을까요? 다른 건 몰라도 관심 분야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확 바뀌었지 않습니까? 이게 흔한 일은 아닐 텐데요?”

“개인적으로 중국과 유럽의 미술사 모두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실제로도 그랬고요.”

한치호가 서류철을 탁 덮더니 도윤을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맺혔다.

“관심 분야가 너무 그렇게 다양하면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는 오히려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아, 물론 이 박사님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세상에는 간혹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천재가 나타나기도 하니까요. 아, 물론 제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치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매단 채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도윤을 노려봤다. 뭘 봐, 이 자식아. 도윤도 빙그레 마주 웃어주었다.

“전체 강의는 다음 달 첫 주부터 시작됩니다. 메일로 보내드린 일정표대로 매주 월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열 시까지 수업이 진행될 거예요. 이 박사님 강의는 5주차부터 8주차까지, 4회 분량입니다. 홈페이지에 공고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다음 주까지는 강의 계획표를 주셨으면 좋겠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저한테 강의를 맡기시겠다고요?”

도윤으로서는 의외였다. 서로가 상대에 대해 그다지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한치호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일어나면서 악수를 청했다.

“테이트 브리튼에 계신 장예주 박사님은 한성 옥션과 인연이 깊습니다. 그 분의 추천을 받으셨으니 저희로서는 당연히 이 박사님의 실력을 믿어야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로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장 박사의 얼굴을 봐서 강의를 맡긴다는 얘기였다. 그건 피차일반이네, 이 친구야.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수강생들이 실망하지 않은 강의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죠. 그럼 이만.”

그가 떠나자마자 한치호가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 강의는 이도윤 박사가 맡기로 했어. 그럼 이제 강사 선정이 완료된 거 맞지?”

“네. 그 강의만 강사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럼 홍보실에 이력서 내려 보내서 오늘 내로 강사들 이름과 약력을 홈페이지에 올리라고 해. 팸플릿하고 포스터 디자인도 서두르고.”

수첩에 지시사항을 받아 적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이도윤 박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강의를 맡기는 겁니까?”

한치호가 코웃음을 쳤다.

“장 박사에게 기름칠을 하는 셈 쳐야지. 그 양반한테는 앞으로도 부탁할 일이 많을 테니까. 가까운데 두고 보다가 톡톡 건드리면 반응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한치호의 눈이 서류철 맨 위에 올라와 있는 도윤의 이력서로 향했다. 건방진 자식 같으니. 거기에는 활짝 웃고 있는 도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   *   *

“형이 한치호 실장을 만났다고요? 에이, 그 사람 소문이 별로 안 좋던데…, 혹시 서로 멱살 잡은 건 아니죠?”

그날 저녁, 도윤은 안석훈과 통화했다. 비록 사무직과는 거리가 있는 보안 팀에서 근무하지만 그래도 같은 직장이니까 들은 얘기가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녀석은 한치호 얘기를 꺼내자마자 대뜸 싸운 게 아니냐는 걱정부터 했다.

“야, 인마. 내가 깡패냐? 초면에 무슨 멱살을 잡아?”

“들은 얘기가 있으니까 그렇죠. 솔직히 형 성질도 장난이 아니고. 다른 곳도 아니고 UDT에서 부사관하고 맞짱 뜨다가 영창 갈 뻔 한 게 누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주먹을 쥐었으면 제대로 때려보기라도 하던가. 다행히 마침 내가 옆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거기까지만 해라.”

“세상 사람들이 다 형한테 속는 거야. 학벌하고 겉모습만 보고는 영락없이 범생이라고….”

“거기까지만 하라고 그랬다? 내 성질이 어때서? 나도 점잖은 사람한테는 점잖게 대해.”

“점잖은 사람한테도 성질부리면 그게 미친놈이지 정상이오?”

아, 이 자식이 진짜. 남들이 왜 전역하면 같은 부대에 있었던 사람들하고 만나지 않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 한 실장이라는 친구가 소문이 안 좋다는 거지?”

“나야 부서도 다르고 직접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소문을 들었을 뿐이기는 한데, 젊은 놈이 싸가지가 없다는 얘기가 많아요. 독선적인데다 사람 차별도 심하고. 열 받으면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직원한테도 욕하는 건 물론이고 가끔씩 물건도 막 집어 던진대요.”

“그 정도면 거의 인생 막 가는 수준인데?”

“그러니까 웬만하면 부딪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걱정돼서 그래요.”

“알았다. 참조할게. 언제 한 번 보자. 저녁이라도 살 테니까.”

전화를 끊고 나자 괜히 입맛이 썼다.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같은 회사 직원들에게조차 이렇게 평이 나쁜 인간일 줄은 몰랐다. 서로 마주칠 일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석훈이 말마따나 되도록 얽히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성 옥션과는 달리 INB의 존 카론은 그의 전화를 진심으로 반겼다.

“이 박사님!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요. 계속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이트 브리튼의 장예주 박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저를 찾으셨다고요?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 INB가 이번 연말 방송을 목표로 아주 멋진 프로그램을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박사님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초대요? 어, 그러니까 지금 저를 방송에 출연시키겠다는 말씀입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더욱 황당했다.

INB는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대표적인 공중파 방송국들 가운데 하나다. 최근 들어 대형 케이블 방송국들의 영향력이 늘어나자 INB는 예능 프로그램을 강화해서 시청률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 다행히 이게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면서 방송 컨텐츠는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까지 프로그램 컨셉을 수출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저희가 이번에 준비 중인 프로그램도 방송국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담당 피디가 알랭 클로드라는 베테랑이죠. 저는 메인 작가고요.”

존 카론은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프로그램의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걸 요약하면 미술품 감정을 주제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거죠? 출연진들은 모두 무명의 젊은 감정가들이고요.”

“그렇습니다. 매 주마다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을 방문해서 주어진 작품들을 감정하는 거지요. 진위 감정은 물론이고 작품의 가격을 알아맞히는 가치 감정도 하게 될 겁니다. 그 결과를 점수로 환산해서 매회마다 낮은 점수를 얻은 두 명을 탈락시키는 방식입니다.”

“참가 인원은 몇 명입니까? 만약에 출연하게 되면 언제까지 촬영해야 되죠?”

“현재로서는 열두 명의 참가자들로 첫 경연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한 주에 두 명씩 탈락시키니까 7주차가 되면 마지막 두 명이 최종 결승전을 벌이는 거죠.”

어떨까? 만약 카론이 말한 프로그램이 실제로 방영된다면 도윤은 당연히 시청할 것이다. 자신의 관심 분야니까. 그런데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을까?

“글쎄요. 일단 좀 생각을 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INB에서 어떻게 저를 알고 연락을 주신 거죠?”

“몇 주 전에 크리스티 런던 경매장에서 놀라운 일을 벌이셨죠? 모네의 수련 연작이 위작이라는 걸 가려내신 사건 말입니다. 그 자리에 저와 담당 피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 도윤은 그만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웃음소리에서 부정적인 기색을 느꼈는지 카론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열두 명의 참가자 가운데 저희가 직접 초대하는 사람은 네 명뿐입니다. 나머지 여덟 명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죠. 그러니까 이 박사님은 그 네 명의 초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천되신 겁니다.”

카론으로서는 그를 부추기기 위해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윤은 오히려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출연자들 사이에 갈등 구조가 만들어지기가 쉽겠군. 험난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흑수저들과 편안하게 초대된 금수저들이라는 형식으로.’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일부러라도 그런 갈등을 만들어낼 사람들이 방송국 피디다.

도윤은 일단 즉답을 피했다. 연말 방송이 목표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상 겨울이 되어야 촬영을 시작할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문제는 부모님과도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이름뿐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그는 현소 갤러리 소속의 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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