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4. 아버지의 초상
월말이 가까울 즈음, 한성 옥션에서 연락이 왔다.
“파티라고요?”
“네. 다음 주 금요일에 저희 회사에서 실시하는 봄가을 정기 경매가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프리뷰 전시에 들어가는데, 그 전에 주요 고객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경매에 내놓을 주요 작품들을 미리 선보일 계획입니다.”
“아, 네. 근데 죄송하지만 저는 그 주요 고객에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사장님께서 이번에 교양 강좌를 맡는 강사님들을 모두 초대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혹시 참석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 알겠습니다. 참석하죠. 혹시 따로 유의해야 될 사항이 있나요?”
“드레스 코드가 엄격하지는 않지만 되도록 정장을 입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동반자가 있을 경우에는 초대장을 한 장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한 장이면 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문득 런던에 있는 최서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려나? 그동안 서너 번 전화통화를 한 적은 있지만 간단히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었다. 서로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니 특별한 일이 없이 자주 전화를 걸기도 조금 애매했다.
“이번 주말에 한성 옥션에서 파티를 연다는데 혹시 들으셨어요? 저한테 초대장을 보낸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교양 강좌 강사들을 다 부르는 모앙이에요.”
부모님께는 이미 한성 옥션에서 미술사 강의를 맡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무심코 얘기를 꺼냈는데 이세준이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도 간다. 엄마하고 나도 초대받았어.”
“두 분도 가신다고요?”
“주요 화랑 대표들한테 초대장을 보낸 모양이야. 딱히 참석할 생각은 없었는데 한성에서 이번 경매에 황일우 화백의 미공개작을 다섯 점이나 내놓는다더라. 파티 참석자들에게는 먼저 공개를 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보러 갈 생각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도윤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놨다.
“황일우 화백의 미공개작 다섯 점이요? 그 분 그림 중에 아직도 미공개작이 있어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서연희가 했다. 근대 이후의 한국 유화는 그녀의 전문영역이었다.
“나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해. 그 양반 돌아가시자마자 미망인이 남은 유작을 몽땅 팔아치우고 이민 갔거든. 근데 어디서 또 미공개작이 다섯 점이나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세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두 점이라면 황 화백이 살아 계실 때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어. 하지만 다섯 점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림을 경매에 맡긴 위탁자가 누군지 궁금해.”
“혹시 위작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계신 거예요?
도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이세준이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하던 그가 지나가듯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성에서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있겠냐? 마침 너도 간다니까 정 궁금하면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라.”
의심하고 계시는구나.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일우는 일본강점기 말기에 태어나서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독특한 이력의 화가다. 그는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전쟁 이후 산업화 되어가는 한국 사회 풍경을 개성 있고 토속적인 화풍으로 잘 그려낸 것으로 유명했다.
황일우의 그림은 그 독특한 미학적 깊이로 인해 미술 비평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예술품을 투자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컬렉터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는다. 언제든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환금성 높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싼 작가’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시장에서 자주 거래될 만큼 작품 수가 충분히 받쳐줘야 한다. 거래가 잦으면 시세가 안정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그림 값이 갑자기 등락할 위험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장수한 편에 속하는 황일우는 비교적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황일우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는 점도 그의 그림이 고유의 개성을 갖게 된 요인이었다. 일본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화가들의 상당수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이들이었다. 그 때문에 유화의 경우에는 일본 근대 회화의 영향이 은연중에 배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가 바로 황일우였다.
‘근데 아버지의 의심대로 그 그림이 모두 위작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모르긴 해도 한국 미술 시장에 큰 충격을 던져줄 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 * *
파티는 한성 옥션 빌딩 꼭대기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에서 열렸다. 평소에는 고급 식당으로 영업을 하지만, 오늘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연회장으로도 쓰이는 곳이다.
경매 작품의 선 공개를 목적으로 한 자리인데다 이세준과 서연희 모두 미술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 일가는 파티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사람들과 쉴 새 없이 인사를 주고받아야 했다. 부모를 따라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세우기를 반복하던 도윤은 생각지도 않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인물을 만났다.
“어이쿠, 이게 누굽니까? 이 대표 아니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오회장님 건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오광춘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만났던 사람이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신안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 사람. 그 때문인지 도윤도 보자마자 얼굴이 기억났다.
“근데 여기 이 훤칠한 젊은이는 누굽니까? 인상이 아주 좋습니다.”
짐짓 너스레를 떠는 오광춘의 말에 이세준이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도윤을 소개했다.
“제 아들놈입니다. 인사드려라. 오광춘 회장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이도윤입니다.”
도윤은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릴 때의 그 사건 이후로 오광춘은 한 번도 현소 갤러리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상대가 아직 자신을 기억할까가 궁금했는데, 오광춘은 다른 방식으로 그를 알고 있었다.
“아, 이 친구가 바로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아들인 모양이군요. 대견합니다. 훌륭한 아들을 둬서 마음이 든든하시겠어요.”
“공부는 이미 몇 년 전에 마쳤습니다. 학위를 받고 돌아오자마자 군대를 다녀오느라 이제야 조금씩 일을 배우고 있지요. 전역한 지 반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저런, 그랬습니까? 그럼 이제 완전히 어른이군요. 남자는 모름지기 군대를 다녀와야 어른이 되지요. 아무렴.”
저 양반 미필일 텐데? 남자든 여자든 모름지기 다녀와야 할 군대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도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오광춘이 갑자기 이세준에게 몸을 기울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황일우 화백의 미발표작 다섯 점이 공개된다는 얘기 들으셨습니까?”
조용히 서 있던 서연희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들었어요. 그렇잖아도 그 작품들을 경매에 맡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던 참이에요.”
“하하하, 그게 바로 접니다. 제가 그 작품들을 발굴했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하.”
도윤 일가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 위탁자가 이 양반이라고?
“아니, 그걸 어떻게 찾으셨어요? 누가 가지고 있었나요?”
서연희가 큰 관심을 보이자 오광춘이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천천히 하기로 하고 한 마디로 운이 아주 좋았어요. 혹시 현소 갤러리에서도 응찰할 생각이 있습니까?”
“네? 저희가요? 글쎄요. 그건 일단 그림을 보고 나서 생각을 해봐야지요.”
“좋은 작품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황일우 화백 그림은 투자 가치가 높아요. 아낌없이 지르셔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오광춘은 그 말을 하고서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세준이 아내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위탁자라는 건 누군가로부터 그림을 샀다는 소리겠지?”
“얼굴에 화색이 가득한 걸로 봐서는 분명 싼값에 후려쳤을 거예요. 그렇다는 건 원래의 주인이 그림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뜻인데…. 아니면 또 장난을 쳤거나.”
이세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도윤의 어깨를 짚었다.
“아무래도 네가 나중에 그림을 자세하게 봐야 할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알지?”
“네. 그나저나 저 양반은 과거에도 전력이 있으니 좀 걱정이 되네요.”
오광춘이나 한성 옥션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대작과 관련해서 악성 사고가 터지면 한동안 미술 시장이 얼어붙는 파급 효과가 생기기 십상이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일 수가 없었다.
“저 양반 때문에 갑자기 목이 타네요. 마실 것 가지러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우린 괜찮아. 여기서는 술 너무 마시지 마라.”
가볍게 눈을 흘기는 서연희를 향해 계면쩍은 미소를 흘리고 돌아서는데 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소 갤러리의 이 대표님과 서 실장님 아니십니까?”
한치호였다. 눈치를 보니 이세준과 서연희도 그를 알고 있는 듯 했다. 서연희가 먼저 한치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한 실장님이시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이야 당연히 초대해야지요.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이번 경매도 한 실장님이 총괄한다면서요? 모처럼 좋은 작품들을 경매에 내놓게 돼서 기쁘시겠어요.”
“네. 저도 황일우 화백의 미발표작이 다섯 점이나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회사로서도 이번 경매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서연희와 얘기를 나누던 한치호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도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 박사님과 두 분의 관계가….”
도윤이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나섰다.
“저희 부모님이십니다. 두 분도 초대를 받았다고 하기에 모시고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이쿠, 설마 세 분이 한 가족일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의외였던 모양이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한치호가 이세준 부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두 분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드님을 잠시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이 박사님이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여는 교양 강좌를 맡으신 건 아시죠? 저쪽에 마침 강사님들이 모여 계신데, 잠깐 얘기나 같이 나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세준과 서연희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도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자리를 떴다. 함께 걸어가는 동안 한치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현소 갤러리의 이 대표님과 서 실장님이 부모님일 줄은 몰랐네요. 어쩐지 장 박사님이 적극적으로 추천을 한다 싶더라니. 미리 말을 좀 해주지 그랬습니까?”
“이력서에는 부모의 직업을 적는 난이 없어서요. 그리고 장박사님이 저를 추천해주신 건 부모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까?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어찌 보면 집안 내력이 서로 비슷한 셈이니 친하게 지냅시다. 이 박사님도 나중에 현소 갤러리를 운영하실 거 아닙니까? 2세들끼리 협조하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겠어요? 이 바닥엔 워낙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아서, 하하하.”
“저는 3세입니다. 현소 갤러리를 처음 세운 분은 할아버지였거든요.”
도윤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 한치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강사들 무리에 합류했다. 그가 볼 때는 한치호야 말로 딱 이 바닥의 어중이떠중이였다.
한치호는 강사들이 대화하는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바로 떠났다. 도윤 역시 강사들과의 대화는 기대만큼 흥미롭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짜증이 났다.
네 명의 강사들 가운데 도윤을 포함한 두 사람은 서양 미술사 전공자였다. 다만 학위만 받은 반 백수에 가까운 도윤과는 달리, 서양 고대부터 르네상스까지의 미술사를 담당할 양의영은 현직 대학 교수였다. 그것도 사립대학 가운데서는 미대로 가장 유명한 곳의 교수인데다 연배가 가장 높아서 그런지 좌중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회화라는 개념은 원래 서양에서 온 겁니다. 동양에는 단지 서화가 있을 뿐이지요. 애초부터 그림과 글씨의 경계가 없는 게 동양의 서화 아닙니까?”
또 해묵은 논쟁을 시작하는구나. 도윤은 양교수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했다. 현직 화가로서 한국 회화사 강의를 맡은 고형도가 그 말에 발끈했다.
“그렇게 말하면 서양의 미술을 가리키는 fine art라는 말도 원래는 수사학과 음악, 물리학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개념은 예술과 함께 발전하는 겁니다.”
옆을 힐끗 보니 또 다른 대학 교수인 진성환 교수는 아예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대 미학과 소속의 진교수는 이번 강좌에서 중국 회화사를 맡았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파티장까지 와서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 다음 주에 있을 경매에서 가장 기대되는 작품들을 여러분에게 공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다행히 마침 들려온 소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일시에 한쪽에 마련된 단상으로 쏠렸다. 한창 열을 올릴 기세이던 양의영 교수와 고형도 화백도 얼른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단상 위에는 한치호가 활짝 웃는 모습으로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대부분 바로 이 작품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서 오셨을 겁니다. 저희 한성 옥션이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공개합니다. 황일우 화백의 미발표작 다섯 점입니다.”
그의 말과 함께 연회장의 세 면에 처져있던 다섯 개의 가림막들이 일제히 치워졌다. 정면을 제외한 양쪽 벽면에서 두 점씩, 그리고 한치호가 서 있는 단상 뒤에서도 한 점의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사람들의 탄성이 연회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