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1화 (21/300)

21화

4. 아버지의 초상

“작품은 오늘 연회가 끝날 때까지 전시될 테니까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경매 시작가가 궁금하신 분들은 저희 회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확인한 한치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참석자들이 그림을 보기 위해 각각의 벽면으로 흩어졌다.

도윤은 부모님과 함께 천천히 연회장을 돌며 그림을 살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전체 그림의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이 끝났다. 그러나 그는 서연희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현소 갤러리에서 한국 유화에 대한 감정과 전시 기획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였고, 신안을 가졌다 뿐이지 작품 감정에 있어서는 그 역시 어머니의 경험을 따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연희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녀는 멀리서 그림 전체의 모습을 눈에 담는가 하면 코가 닿을 것 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당신이 보기엔 어때? 역시 아니야?”

서연희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세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침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단상 위에 걸린 저 자화상 말이에요. 저건 확실히 황 화백의 그림이 아니에요. 나머지 네 점은 저도 판단하기가 좀 애매하긴 한데, 역시 진작이 아닌 거 같아요.”

“애매하다고?”

“전체적인 화풍이나 붓 터치, 화면의 구성과 채색 방법 모두 황 화백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해요. 특히 캔버스에 흙을 발라놓은 것처럼 거칠거칠한 질감 말이에요. 저건 물감을 몇 번씩 덧칠해서 만들어내는 황화백 특유의 기법인데, 웬만큼 실력 있는 위조범들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하거든요. 근데 저 그림들에서는 그 기법이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어요.”

“그럼 황 화백의 작품이 맞는다는 얘기잖아?”

“하지만 격이 떨어져요.”

“격?”

“네. 단상 위에 있는 자화상 말고 양쪽 벽에 걸린 그림들을 한 번 자세히 보세요.”

그녀의 말에 따라 이세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양쪽 벽을 살폈다.

오른쪽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에는 허름한 판자촌들이 늘어선 변두리 동네의 골목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주변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해맑기 그지없게 묘사되어 있었는데, 그림 제목도 각각 ‘아이들1’과 ‘아이들2’였다.

반대편 벽에는 ‘우물가’와 ‘기다림’이라는 두 작품이 걸려 있었다. 공동 우물가에 앉아 수다를 떨며 채소를 씻는 아낙네들과,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여인네의 모습이 그려진 작품들이었다.

한동안 뚫어져라 그림들을 쳐다보던 이세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말한 격이라는 게 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황 화백은 평생 풍경화를 그린 적이 없어요. 항상 사람들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죠. 그런데 저는 그 분의 그림을 볼 때마다 언제나 화가 자신이 캔버스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해요. 거기서 그림 속의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정감이 느껴진다는 말이군.”

“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황 화백은 평생 모델을 따로 쓰지 않았어요. 언제나 자기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지요. 그래서 다른 화가들처럼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요.”

“그런데 저 그림들은 안 그렇다? 그걸 격이 떨어진다고 얘기한 거고.”

“그게 너무 추상적인 애기라는 건 저도 알아요. 그래서 선뜻 위작이라고 단정하지 못하는 거고. 하지만 저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서는 자신이 그린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만약 이번 경매의 위탁자가 저 그림들을 우리 화랑에 들고 왔다면 그냥 돌려보냈을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평가를 듣던 이세준이 도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손을 들어 단상 위에 걸린 자화상을 가리켰다.

“저한테 이 가운데 딱 한 점을 사라고 하면 저 그림을 택하겠어요.”

그 말에 서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베테랑 감정가라면 누구나 선택을 망설일 텐데? 화풍이나 기법이 황 화백과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어. 눈썰미 좋은 감정가라면 그걸 놓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그 양반은 자화상을 그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렇죠. 그래서 제 생각에도 저건 황일우 화백의 그림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저라면 역시 저 그림을 사겠어요. 누가 그렸는지와는 무관하게 좋은 그림이니까요.”

이세준이 주변을 둘러본 다음에 속삭이듯이 물었다.

“저 자화상에서 빛이 보이냐?”

“네. 여기 걸린 다섯 점 가운데 유일하게요.”

이세준과 서연희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품이 아닌데 빛이 난다고?

*   *   *

“저 자화상이 진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엄마 말에 의하면 저건 십중팔구 황 화백의 그림일 수가 없잖아? 그럼 도대체 누구 작품이라는 거야? 당신 혹시 생각나는 사람 없어?”

이세준으로서는 기가 막혔지만 서연희 역시 별로 다를 게 없는 심정이었다.

“전문가들도 헛갈릴 만큼 황화백의 진작과 거의 차이가 없어요. 자기 이름을 내걸고 그리는 진짜 화가라면 왜 남의 그림을 똑같이 흉내 내겠어요?”

“혹시 이름 없는 화가 지망생이 그린 건 아닐까? 외국의 큰 미술관에 가면 명작 앞에 이젤을 세워놓고 모사하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처럼 황 화백의 그림을 연습 삼아 베끼다가 저도 모르게 명작을 그리게 됐을 가능성은?”

“그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왜 그래요? 그리고 아까 도윤이하고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요? 황 화백은 죽을 때까지 자화상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니까요? 원작이 없는데 뭘 어떻게 베껴요?”

“답답하네. 그럼 저 그림은 역시 위작이라는 건데…, 하지만 도윤이가 빛을 봤다잖아? 당신도 알다시피 그건….”

“저 그림이 미술관에 걸어둘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죠.”

도윤이 이세준의 말을 받아서 결론을 지었다.

그의 신안으로 볼 때 빛이 흘러나오는 그림은 분명히 진품이다. 그러나 평범한 진품은 아니다. 진품을 개인의 순수한 창작품이라고만 정의하면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도 진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윤은 지금까지 그런 그림에서 빛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세준 부부와 조태석 교수는 도윤이 처음 신안을 각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숱한 실험을 반복했다. 그 결과, 설령 진품이라고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에서만 빛을 느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걸 네 사람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할 만한 작품’이라는 식으로 규정했다. 다시 말해서 도윤이 오늘 전시된 자화상에서 빛을 보았다는 것은 그 그림이 상당한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그림이라는 뜻이 된다.

“네 말을 들으니까 저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가 더 궁금해지네. 허, 참.”

혀를 쯧쯧 차던 세준이 포기한 듯 연회장을 떠나자고 했다.

“그만 집에 갑시다. 황 화백의 진품이 하나도 없다니까 갑자기 맥이 빠지네.”

하지만 서연희는 뭔가 미련이 남은 듯 자꾸만 벽에 걸린 그림들을 힐끔거렸다.

“그냥 이대로 가려니까 영 찝찝하네요. 저 그림들, 다음 주에 분명히 황일우 화백의 이름을 내걸고 경매에 올라갈 텐데.”

“그래도 뭘 어쩌겠어? 이 자리에서 저건 몽땅 가짜요 하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잖아? 그랬다가는 십중팔구 우리만 죽일 놈이 될 거야.”

그림이 위작으로 판단된다고 해서 그걸 공개적으로 떠들어대는 건 위험하다. 안목 감정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남의 옥션에 다른 갤러리의 대표가 와서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당장 비난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보았던 그림들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작의 경우, 베테랑 감정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전시된 그림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사람이 서연희 하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 사람이 연회장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도윤이 이세준의 팔을 잡았다.

“아버지. 저기 조금 전에 말씀하신 그 죽일 놈이 나타난 거 같은데요?”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 하나가 한치호를 비롯한 한성 옥션 측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모습이었는데, 그 중에 석훈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보안 팀 사람들이 동원된 게 분명했다. 그때, 서연희가 사람들 한 가운데에 갇히다시피 한 노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머. 저 분이 왜 여기를….”

그제야 도윤도 그 남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저 분, 김진만 화백 맞죠? 돌을 주로 그리시는 분.”

서연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는 사이, 노인을 둥글게 에워싼 보안 팀원들 사이를 뚫고 고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지금 내가 노망이라도 들었다는 거야? 그림이 가짜니까 가짜라고 하는 거 아냐?”

연회장이 넓다고는 하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순간 웅성거리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   *

“김 화백님. 점잖으신 분이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좀 진정하세요.”

김진만 화백의 앞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한치호가 서 있었다. 노인을 만류하는 그의 눈에 짜증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 불손한 눈빛이 김진만 화백의 화를 더 돋우었다.

“자네는 누군가? 나더러 뭘 진정하라는 거야?”

“한성 옥션 기획실장 한치호입니다. 그림에 대해 의견이 있으면 나중에 조용히 사무실로 찾아오시면 되잖습니까? 남들 다 보는데서 막무가내로 그림을 비난하시면 곤란합니다.”

“한치호? 아하, 자네가 한대길 의원하고 성진아 대표 아들이라는 그 친구로군? 마침 잘 만났네. 명색이 기획실장이면 경매에 올릴 그림을 제대로 감정했어야 할 거 아닌가? 저런 가짜를 팔았다가 나중에 들통이라도 나면 자네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야. 한성 옥션에 망조가 들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거라고.”

한치호의 얼굴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인데다 상대가 미술계의 원로인 탓에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여기 전시된 그림들은 모두 황일우 화백의 진품이 맞습니다. 전문가들의 감정도 이미 통과했고요. 김 화백님이야말로 뭘 근거로 자꾸 모함을 하시는 겁니까?”

“모함? 지금 내가 모함을 한다고 했나? 기가 차는군. 좋아, 근거가 궁금하다고 했으니 근거를 대지. 잘 봐. 여기 내 이마 아래 달린 두 눈이 바로 근거야.”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갈렸다. 저게 무슨 억지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한치호의 경우에는 전자였다.

“이미 감정을 받은 작품들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희도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김 화백님 눈이 근거라뇨? 아니 그럼 김화백님 눈만 눈이고 그 분들은 모두 눈 뜬 장님이란 말씀입니까?”

마침내 한치호의 자제심에 금이 간 게 분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 친구 실수하네.”

한쪽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서연희가 혀를 찼다.

“김 화백께서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신 건 사실이지만, 한 실장도 저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김진만 화백은 돌아가신 황일우 화백의 절친이셨어. 그 분의 그림을 평생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고. 저 분보다 황일우 화백의 그림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자신의 안목을 깎아내린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한치호의 말을 들은 김진만 화백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네가 말한 그 잘난 놈들이 도대체 누구냐? 누가 일우 그 친구의 그림을 감정했어?”

“그만 고정하세요. 저희가 알아서 믿을 만한 분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다 불러와. 도대체 어떤 병신들인지 내가 직접 낯짝을 확인해야겠다.”

“하, 정말.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안목 감정 결과만 가지고 저 그림들이 진품이라고 확신한 줄 아세요?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뭐? 다른 증거? 그게 뭐냐?”

“저 그림들은 돌아가신 황일우 화백의 유족에게서 사들인 겁니다. 위탁자께서 직접 구매하셨고, 서류에 유족의 서명까지 받았어요. 출처가 아주 확실하다고요. 아시겠습니까?”

김진만 화백의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뭐? 뭐시라? 유족에게서 사? 어떤 놈이 그런 거짓말을 해!”

그때, 김 화백을 둘러싼 사람들을 헤치며 누군가 나타났다.

“거짓말이라니? 당신이 뭔데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이 영감이 미쳤나?”

오광춘이었다. 그는 도끼눈을 뜬 채 김화백에게 마구 삿대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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