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4. 아버지의 초상
“넌 또 뭐냐? 어디서 나이도 어린놈이 어른한테 함부로 손가락질을 해?”
김 화백이 마주 삿대질을 하며 입에서 거품을 뿜자 오광춘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섰다.
“뭐? 어린 놈? 이 영감태기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어디서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들어? 내 나이가 올해 일흔 하나야. 지금 나하고 누가 먼저 관 뚜껑 덮을지 내기라도 하자는 거야?”
어른들 싸움에서 나이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대개 막장으로 치닫는 법이다. 한치호도 그걸 느꼈는지 얼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두 분 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한 실장도 들었잖아? 이 영감태기가 나더러 거짓말을 한다고 지껄이는 걸. 야, 이 늙은이야. 나는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이야.”
“이, 이… 네 놈은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거겠지. 뻔뻔한 놈 같으니.”
“뭐? 뻔뻔해? 너 오늘 뻔뻔한 놈한테 한 번 맞아볼래?”
한치호가 적극적으로 두 사람 사이를 떨어트려 놓으려 애쓰자 오광춘은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였다. 결국 먼저 한 발 물러선 것은 김 화백이었다. 상대가 막 나가기 시작하자 기가 찼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오광춘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네 놈이 저 그림들을 유족에게서 샀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일우의 유족이라고 해봤자 아들놈 하나밖에 더 있어? 그놈이 좀 못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지 애비 이름을 내걸고 가짜 그림을 팔 놈은 아니야.”
오광춘이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황 화백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굴더니 기본적인 가족 관계도 몰라? 그 양반한테는 아들이 둘이야. 마누라도 버젓이 살아있고.”
“하! 마누라? 지 남편 죽자마자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남은 그림을 몽땅 팔아치운 여자 말이냐? 그 돈 챙겨서 지 새끼만 데리고 호주로 도망간 년이 무슨 마누라야?”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당신이 뭐라 할 일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그 부인하고 아들한테서 분명히 황일우 화백의 그림을 샀어. 서류도 확실하게 작성했고.”
“그, 그런 망할 것들이….”
김진만 화백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손을 쳐들었으나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도로 내렸다. 보고 있던 도윤이 서연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저게 도대체 다 무슨 소리에요? 황 화백님 가족 관계가 복잡해요?”
서연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흔한 얘기지. 나이 든 유명 화가가 젊은 아가씨와 눈이 맞는 거 말이야. 황 화백의 첫 번째 부인은 그 양반이 유명해지기 전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황 화백 혼자 늦게 얻은 아들을 키웠다고 하더라. 당시만 해도 형편이 아주 어려웠을 거야. 남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간신히 먹고 사는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남의 초상화만 하염없이 그려대는 게 너무나 싫었던지, 황 화백은 나중에 유명해진 뒤에는 절대로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 중에 자화상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 황화백의 명작은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야. 작품 활동도 그 때가 더 활발했고. 정작 80년대 중반부터 그림 가격이 점점 오르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작품 활동이 뜸해졌지. 재혼을 한 뒤로는 발표된 작품이 거의 없고.”
“새로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할 즈음에 장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거야. 결혼한 이듬해에 둘째 아들을 낳았으니까 장남하고 거의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지.”
“가족 간의 갈등은 없었어요? 장남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못마땅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몰라. 아마 김진만 화백은 사정을 잘 알거야. 아주 가까운 친구였으니까. 저 양반 저러는 걸 보니까 뭐가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한치호의 필사적인 중재 덕에 당장이라도 노인들끼리 치고받을 것 같던 분위기는 한풀 꺾였다. 김 화백과 오광춘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지만 더 이상 고함을 질러대지는 않았다. 그때, 적절한 기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안경 쓴 중년 남자 한 명이 세 사람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오늘은 취재가 아니라 순수하게 작품을 감상하러 왔는데, 일이 좀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제가 세 분께 몇 가지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우, 우부장님!”
“자네도 여길 왔나?”
한치호와 김진만 화백은 새로 나타난 남자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특히 한치호의 얼굴은 대번에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변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부장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 사무실로 가시죠.”
“한 실장님 사무실 말입니까? 저야 편한 데서 얘기하면 더 좋죠. 그런데 여기 계신 두 분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그러자 오광춘이 뜨악한 눈빛으로 우부장을 쳐다봤다.
“이 사람이 누군데? 누군데 우리더러 오라 가라는 거야?”
한치호가 얼른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한강신문의 우재경 문화부장입니다. 미술계 동향에 빠삭하신 분이에요. 인맥도 넓고.”
“기자라고? 잘 됐네. 기자가 기사를 써주면 나야 좋지. 광고도 될 거 아냐?”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단 같이 좀 가시죠. 김 화백님도요.”
잠시 후, 한치호를 포함한 네 사람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번 일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궁금해 하며 웅성거렸지만 그날 사라진 네 사람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껏 홍보 수단으로 기획됐던 파티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 * *
도윤 일가족은 명목상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아침마다 함께 출근하지는 않는다. 이세준과 서연희가 맡은 분야가 서로 겹치지 않는데다, 업무상 아침부터 갤러리가 아닌 다른 곳에 먼저 들러야 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가 각자 자기 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반면에 도윤은 아직 차가 없었다. 이세준이 한 대 필요하지 않느냐고 은근히 물은 적이 있지만 사양했다. 그는 아직 벌이가 없는 탓에 부모님께 용돈을 타 쓰는 처지였다. 그것만 해도 민망한 일인데 자가용까지 몰고 다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가 없었다.
그 대신 이따금씩 이세준이나 서연희의 차를 타고 함께 출근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럴 때는 의례 도윤이 운전대를 잡았다.
“한성 옥션의 가을 정기 경매가 연기되었다는데요? 오늘 아침 신문에 기사가 실렸어요.”
도윤이 전방을 주시한 채 지나가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일가족 세 사람이 이세준의 차를 타고 함께 출근하는 길이었다.
“나도 신문 기사 봤다. 얘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더라.”
서연희의 말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기사에 나오지 않은 뒷얘기를 들은 눈치였다.
“심각한 문제요? 그럼 그냥 연기가 아니라 아예 취소될 수도 있는 거예요?”
“가을 정기 경매는 한성의 일 년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그쪽에서는 필사적으로 경매를 진행시키려고 할 거야.”
“하지만 이미 황일우 화백의 그림에 대해 위작 의혹이 제기됐잖아요. 그 우재경 부장이라는 양반이 아주 작심하고 터트렸던데요?”
파티가 있었던 것은 금요일이었다. 우재경 부장은 그날 일차적으로 세 사람을 인터뷰하고 돌아간 뒤, 다음날 집에서 쉬고 있던 기자들을 불러냈다. 덕분에 취재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한치호, 오광춘, 김진만 세 사람은 주말 내내 기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한성 신문은 거기에 더해 미술계의 관련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증언과 의견을 취합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아침에 게재된 특종 기사였다. 한치호는 우재경 한 사람만 잘 구워삶으면 큰 파장 없이 일을 무마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조금 심하게 때리기는 했더라. 기사 보니까 한 실장이 예전에 저질렀던 실수들도 일일이 다 까발렸어. 한 실장도 한 실장이지만 성진아 사장이 기사 보고 펄펄 뛰겠어.”
“이미 한성에서 기사가 나갔으니까 다른 언론사들도 달려들겠죠?”
“당연하지. 미술계에서 이만큼 대중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은 흔치 않으니까.”
“그럼 결국 경매를 진행시켜도 한성으로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잖아요?”
경매에서 그림을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단순한 미술 애호가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미술품이란 부피가 작으면서도 값비싼 투자 대상이며, 금이나 보석과는 달리 교양과 품격의 상징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나에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고가의 물건을 버젓이 드러내고 살아도 사치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이번 경우처럼 위작 논란에 휩싸인 작품에는 여간해서 사람이 몰리지 않는다. 한성이 경매를 강행하더라도 낙찰가가 크게 떨어지거나 유찰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성에서도 최대한 빨리 진품임을 다시 인정받으려고 할 거야.”
“재 감정을 받는단 말이죠?”
“그 수밖에 없겠지. 이미 자체적으로 감정이 끝난 작품에 대해 또 다시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게 억울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 어차피 할 거면 최대한 빨리 할수록 좋아. 그래야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어떤 사람들을 불러서 재 감정을 받느냐가 문제겠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도윤은 황일우 화백과 관련된 위작 논란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한성 옥션 측에서 젊은 미술사 박사에 불과한 그에게 감정을 부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다섯 점의 그림에 대한 진위 판단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하나 남은 궁금증이라면 오직 그날 전시된 자화상을 누가 그렸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위작 논란이 터진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묘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 명근이 형. 아침부터 웬 전화?”
전화를 건 사람은 조태석 교수의 아들인 조명근이었다.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의 검사로 재직하고 있는 그와는 흉허물 없이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도윤이 어릴 때부터 조태석의 집을 드나들며 공부한 덕에 서로 형 동생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너 인마.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
“자식이 말이야, 귀국 보고는 전화 한 통으로 끝내더니 한 번 인사를 하러 오질 않냐? 형이 대한민국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날마다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 알지? 그럼 동생이 찾아와서 밥도 사고 술도 사고 그래야 도리 아냐?
“아니, 밥은 형이 동생한테 사는 거지 왜 세상을 거꾸로 살려고 그래? 나 백수라는 거 몰라? 대한민국 검사가 백수한테 술을 얻어먹겠다고? 그런 건 김영란 법에 안 걸려?”
“너, 김영란 법보다 앞서는 게 아름다운 전통이다. 네가 외국에서 아가씨들을 흘깃거리고 다닐 때, 이 형은 여름 내내 휴가도 못 가고 온갖 양아치와 건달들에게 시달렸어. 그런 형한테 보답하는 것. 그게 바로 반만년을 지켜 내려온 우리의 미풍양속이라는 거 아니냐.”
“양아치와 건달들이 형한테 시달렸겠지. 헛소리하지 말고 말해. 용건이 뭐야?”
“그래. 너도 양심이 있으니까 용건을 묻는구나. 그거 보답하겠다는 뜻이지?”
“전화 끊는다?”
“아이, 자식 참 냉정하긴. 알았다, 알았어. 너, 네 입으로 백수라고 했으니까 요즘 시간 많지? 그 남는 시간 좀 쪼개서 내 일 하나만 간단하게 도와줘라.”
“어떤 일? 참고로 일당 비싸다는 건 알지? 나 박사야, 박사.”
“난 검사다, 이 자식아. 박사가 어딜 검사 앞에서 개겨? 대한민국에 박사 수보다 검사 수가 훨씬 적다는 거 몰라? 귀한 몸이야, 내가.”
“그럼 귀한 몸께서 혼자서 잘 해보시던가.”
“알았다, 알았어. 일단 좀 도와줘. 솔직히 검찰에서 정식으로 협조 의뢰하는 건 아니라서 따로 보수를 지급하는 건 불가능해. 대신 나중에 내가 거하게 살게. 황일우 화백 위작 논란 알지? 신문에 떠들썩하게 나온 사건 말이야.”
도윤은 잠시 휴대폰에서 귀를 뗐다. 어라? 이 형이 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알지. 근데 그게 왜? 아직 진위 판정이 끝나지 않아서 위조범 관련 수사가 들어갈 단계도 아닐 텐데?”
“위조는 아니고, 사기 사건으로 고발이 들어왔어. 한성 옥션에서 가짜를 팔려고 한다고.”
“고발이라니? 누가 고발했는데.”
“그건 말해줄 수 없고, 아무튼 거기서 연 무슨 파티에 우리 차장님이 참석했었나 봐. 그 양반 장인이 갑부라서 그림 모으는 취미가 있대. 처가가 빵빵한 그 차장님께서 고발을 받아들여서 덜컥 입건시키셨는데 하필이면 나한테 배당이 됐다.”
문득 김진만 화백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군가 고발을 했다면 그 양반일 가능성이 컸다. 도윤은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한테 부탁할 일이 구체적으로 뭐야?”
“내일 모레 한성 측에서 황 화백의 그림 다섯 점에 대해 재 감정을 실시한대. 그 자리에 우리도 종로 경찰서 특수 수사대 과장하고 형사를 몇 명 파견하기로 했어. 위작으로 판정되면 그 자리에서 수사에 들어가야 하니까.”
“거길 나도 같이 가 달라는 거야?”
“그래. 우리나라 경찰이 위작을 만든 놈을 잡는 건 잘 해도,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눈은 없잖아. 네가 가서 그 눈 역할을 좀 해 줘.”
“아니, 형.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난 미술사 박사야. 전문 감정인이 아니라고.”
그러자 조명근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 자식이! 네 눈에 귀신 달린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버지한테도 물어봤더니 네가 가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을 거라고 하시더라. 그러니까 괜히 빼지 말고 좀 가. 너 아니면 따로 부탁할 사람도 없어.”
조명근은 도윤이 신안을 가졌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에서 보아온 사이기 때문에 그의 감정 능력이 보통을 넘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태석 교수까지 추천하셨다면 마냥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재감정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은근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알았어. 내가 갈게. 근데 그 수사과장이라는 사람하고는 어떻게 만나면 돼? 내가 종로 경찰서까지 가야 하나?”
“재감정이 모레 오전 열 시에 시작한다니까 일단 내일 너한테 전화가 갈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고, 아마 모레 아침에 윤과장이 너희 집으로 데리러 갈 거야. 그 여자 차를 타고 함께 가면 돼.”
“윤 과장? 가만. 그 여자라니? 수사과장이 여자야?”
휴대폰 너머로 딸깍 하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