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3화 (23/300)

23화

4. 아버지의 초상

전화로 얘기할 때는 잘 몰랐다. 상대가 어떤 여자인지.

재 감정 과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성 옥션으로 가는 날, 종로 경찰서 특수 수사과 소속 형사 세 명이 도윤을 데리러 집으로 왔다. 형식상으로는 단순한 참관에 불과하지만, 황 화백의 작품이 위작으로 판명될 경우 현장에서 곧바로 수사에 착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때 수사를 지휘하게 될 사람이 바로 조명근이 언급했던 윤다솔 수사 과장이었다.

생각보다 늘씬하고 예쁜 여자였다. 최서라처럼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 165cm 이상은 되어 보이는 키에 탄탄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분명 서른두 살이라고 했는데 어깨 아래까지 살짝 내려오는 머리를 하나로 동여매어서 그런지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왜 자꾸 힐끔 거려요? 여자 경찰 처음 봐요? 아니면 눈이 어디 안 좋으신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나타난 탓에 저도 모르게 자꾸 쳐다봤던 모양이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가던 윤다솔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네? 아, 죄송합니다. 경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눈은 괜찮은 것 같네요. 선발 기준에 용모가 없어서 그래요.”

“네?”

“경찰에서 저 뽑을 때 예쁘다고 탈락시키는 규정이 없었다고요.”

“아, 네.”

위험한 냄새가 난다. 어쩐지 오늘 하루가 평탄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일하는 형사 분들이 좋으시겠어요. 상사가 미인이라서.”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직격탄이 날아왔다.

“연상 취향이에요?”

“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전 연하 취향 아니에요. 애들은 좋아하는데 어린 남자는 싫어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쪽한테 마음 없다고요. 하버드에서 박사 받은 백수라면서요? 그럼 생활력도 없겠네.”

“마음은 저도 꼭 있는 건 아닌데…, 그리고 지금 백수라고 설마 평생 백수겠습니까?”

“그래서 백수를 탈출하면 나중에라도 한 번 도전해 보시겠다?”

“기껏 백수를 탈출하고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인생 포기하고 싶은 거 아니면 조용히 갑시다.”

“네.”

도윤은 등을 뒤로 기대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명근이 형, 두고 보자.

한참 동안을 묵묵히 거리 풍경만 눈에 담으며 가는데 윤다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쪽 계통은 잘 몰라서 그런데요, 미술품 진위 감정은 주로 전문가들의 눈에 의존하는 건가요? 그럼 감정의 신뢰도가 너무 떨어지잖아요? 눈은 주관적이니까.”

그래. 차라리 이런 얘기는 별 부담이 없지.

“작품 감정에 주관이 개입하는 건 맞습니다. 진위를 판정하는 안목 감정은 물론이고 작품의 시장 가치를 평가하는 가치 판정 역시 마찬가지죠. 그래서 감정 결과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종종 논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신뢰도가 너무 떨어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주관이 개입하는데도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건 너무 감정가들 입장에서만 말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요. 어차피 감정이라는 게 목소리만 듣고도 누가 부른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거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할 말은 없는 셈이죠. 전문가의 눈썰미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쉽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서 실제로 작품의 진위를 판별할 때는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참조합니다.”

“객관적인 자료라고요? 성분 분석 같은 과학적 검사 결과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요. 감정을 할 때 거기까지 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주 고가의 작품에 대해 큰 논란이 발생했을 때나 가끔 쓰이는 방법이니까요. 그보다는 문서 자료를 확보하려고 애를 쓰죠.”

계속 앞만 쳐다보며 게슈타포 흉내를 내던 윤다솔의 고개가 비로소 도윤을 향했다.

“문서 자료요?”

“네. 가령 그 그림이 언제 그려져서 누구에게 넘어갔는지에 관한 기록 같은 거 말이에요. 가령 화가가 쓴 일기나 편지에 작품에 관한 언급이 있으면 일단 그 그림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거나, 적어도 존재했던 겁니다. 작품을 사고팔 때 주고받은 영수증이나 거래 관련 서류가 있어도 감정이 편해집니다. 거래 이력을 통해 진위를 판정하기가 쉬워지거든요.”

“황일우 화백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위탁자, 그러니까 오광춘이라는 사람이 유족으로부터 구입했다고 그랬죠? 거래할 때 서류를 작성해서 유족의 서명도 받았고요. 그럼 진품일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닌가요?”

“네. 보통 가장 믿을 만한 판매자는 화가 본인이거나 그 가족이에요. 설마 가족이 위작을 만들어 팔아서 고인의 명예를 더럽힐 거라고 보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결론이 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도대체 왜 새삼 진위 여부가 문제되는 거죠?”

도윤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보통은 문제가 되면 안 되는 건데….

“가끔씩 바로 그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진위 감정에 큰 혼란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미술품 감정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화가도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요? 자기 작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고,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는 내 새끼를 내가 못 알아보겠냐고 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못 알아보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2007년에 윤 모 화백의 ‘아침’이라는 작품이 감정 결과 진품이라는 판정을 받고 경매에 나오게 되었다. 당시에는 화백이 생존해 있었는데, 경매를 맡았던 옥션이 이 그림을 윤 화백 본인에게 보냈다. 화가로부터 마지막 확인을 받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윤 화백이 자기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면서 캔버스 뒷면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위작’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그림 자체가 손상된 것이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은 나중에 법정까지 갔다. 결국 과거 전시회의 카탈로그에 윤 화백의 ‘아침’이 컬러 도판으로 실렸던 것이 확인되면서 그 그림은 최종적으로 진품임이 확인됐다. 끝까지 기억에 없는 그림이라고 버티던 윤 화백은 법원의 조정 명령을 받고서야 자기 작품임을 시인했다. 스스로 훼손한 자신의 그림을 배상해야 됐던 것은 물론이다.

“이 박사님도 파티에 참석했다고 하셨죠? 그림을 직접 보니까 어땠어요? 위작으로 보이던가요, 아니면 진품인 것 같던가요?”

도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판단이 잘 안 되던가요? 그럼 오늘 함께 가는 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이 여자 보게? 뻔한 도발이었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제가 보기에는 다섯 점 모두 황일우 화백의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화상은 제법 훌륭했지만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자화상을 그린 게 누군지 저도 궁금합니다.”

정면으로 돌아갔던 윤 과장의 시선이 다시 도윤에게로 향했다.

“자화상이 좋았다고요? 진품이 아닌데도?”

“황일우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위작인 건 아니죠.”

“적어도 의도적으로 황 화백의 그림을 흉내 낸 건 아니라는 뜻인가요?”

“모든 창작은 모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애초에 황 화백의 화풍을 흉내 내려고 했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국 창작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복잡하네요. 무슨 소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해요.”

“딱 부러지면 예술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전 오히려 이 바닥이 좋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안의 능력조차 진작과 위작을 0과 1처럼 딱 부러지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빛이 나는 건 모두 기본적으로 진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작이라고 해서 다 빛이 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 위작이라는 뜻도 아니다. 어릴 때는 그게 약간 불만이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신안은 말하자면 고도로 뛰어난 예술적 안목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재 감정 장소는 한성 옥션 빌딩 내의 소규모 전시실이었다. 도윤 일행이 들어서자 텅 빈 전시실 한쪽에 여러 개의 이젤을 세워놓고 그 위에 문제의 그림들을 올려놓은 게 보였다.

실내에는 이미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치호와 오광춘, 김진만 화백이 모두 참석했고, 한강 신문의 우재경 문화부장도 모습을 보였다. 그 밖의 사람들은 오늘 감정을 맡은 감정가들과 한성 옥션 측 인물들, 그리고 한강 신문을 비롯한 몇몇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이었다. 거기에 도윤 일행이 더해진 것이다.

재 감정의 시작을 알린 사람은 한성 옥션 사장인 성진아였다. 생각 외로 문제가 커지자 직접 나선 모양이었다. 한치호는 한쪽 구석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매서운 눈길로 슬쩍 노려본 성진아 사장이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에서 경매에 올릴 예정이었던 황일우 화백의 작품 다섯 점에 대해 위작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한성 옥션은 그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다섯 점의 유화에 대해 재감정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자리가 마련된 목적을 간단히 설명한 그녀가 참석자 가운데 네 사람을 소개했다.

“오늘 재감정을 책임지실 네 분의 감정 위원입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처음 위작 논란을 제기한 한강 신문을 비롯해 국내의 유수한 화랑들이 직접 추천하신 분들입니다. 오랫동안 감정가로서 활동하신 전문가들이시니 정확한 감정 결과를 주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아울러….”

잠시 말을 끊은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재감정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여기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을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위탁자인 오광춘 회장님과 처음 문제를 제기하신 김진만 화백, 그리고 이 문제를 기사화시켰던 한강 일보의 우재경 부장님도 모두 동의하신 사항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해 주시리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성진아 사장이 참석한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녀의 눈빛을 받은 사람들이 예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재 감정을 실시하겠….”

“잠깐만요.”

성진아 사장이 막 말을 끝내려고 할 때 느닷없이 윤다솔 과장이 손을 들었다. 성진아 사장이 살짝 눈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누구시죠?”

“종로 경찰서 특수 수사과 과장 윤다솔입니다. 잠시 건의 드릴 게 있는데요. 여쭤볼 것도 있고요.”

성진아 사장은 잠시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죠.”

“이번 논란이 위조 사건으로 전환될 경우를 대비해서 저희도 감정가를 한 분 모시고 왔습니다. 그 분도 그림을 직접 감정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진아의 시선이 윤 과장 옆에 서 있던 도윤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 얼핏 실소가 맺혔다. 젊은 도윤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진 게 분명했다.

“아마 미술계에서는 보기 드문 젊은 감정가이신 모양이군요. 그 분을 모시고 왔다는 건 경찰이 오늘 감정 결과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감정에서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저희도 나름대로 참고할 의견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여기 계신 감정 위원들과는 독립적으로 말이죠.”

“위작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당연히 수사에 들어가실 테고, 만약 감정위원들의 감정 결과가 진품이라는 쪽으로 통일되면요?”

“그럼 저희는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물러가겠습니다. 약속드리죠.”

“그 약속 꼭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물어볼 게 있다고 하신 건 뭐였죠?”

“오늘 참석자들 가운데 최초의 판매자가 안 보이네요? 오광춘 회장님께 그림을 판 유족들 말입니다. 그 분들은 참석하지 않은 건가요?”

성진아 사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렇잖아도 저희 역시 오 회장님의 도움을 받아 그 분들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계신데 항공료와 체제비용을 부담할 테니 방문해 줄 수 있겠느냐고요.”

“오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네.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부탁하셨나요?”

“오늘 하는 재감정은 저희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윤다솔은 입맛을 다시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살짝 미소를 지은 성진아 사장이 다시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위원님들은 감정을 시작하시죠. 다른 분들은 옆 회의실을 비워놨으니까 감정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원하시면 전시장을 둘러보며 저희 옥션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셔도 좋고요.”

사람들이 우르르 전시실을 빠져나가자 실내에는 네 명의 감정 위원과 윤다솔 과장, 그리고 도윤만 남았다. 하지만 도윤은 선뜻 그림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다른 감정 위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자신들과 함께 그림을 감정한다는 걸 불쾌하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저기, 저는 지난번에 이미 저 그림들에 대한 감정을 끝냈는데요? 또 해야 합니까?”

도윤이 공연히 불편해진 상황에 투덜대자 윤다솔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험 볼 때 답안지에 정답을 제대로 표기했는지 다시 한 번 체크한다고 생각하세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 사람들한테 뭔가를 한다는 시늉은 내야 하잖아요.”

입맛을 다신 그는 먼저 자화상이 걸려 있는 이젤에 다가갔다. 어차피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가 궁금하긴 하던 참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한 손을 슬그머니 액자에 가져다대었다. 신안과는 달리 사물에 남아 있는 잔류 기억을 읽으려면 반드시 물건에 직접 접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연회장에서는 그림 앞에 간이 울타리가 처져 있었기 때문에 바짝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모습이 잔류 기억으로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도윤은 그림이 상하지 않게 액자에만 살짝 손을 댄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시켰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뭐야? 왜 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지?’

그가 본 잔류 기억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모습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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