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4화 (24/300)

24화

4. 아버지의 초상

도윤은 나머지 그림들에도 슬쩍슬쩍 손을 대며 잔류 기억이 남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자화상 외에는 영상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더라도 너무 흐릿하고 짧아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같은 사람이 다섯 점의 그림을 모두 그렸다고 가정할 때, 화가가 특별한 정성을 기울인 건 자화상뿐이라는 뜻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군지는 알 것 같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건데….’

도윤은 이젤에 걸린 그림들을 다시 살피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그가 윤다솔 과장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보내고 먼저 전시실을 나섰다.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그녀가 얼른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저 안에 있는 그림들 말이에요. 누가 그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윤다솔의 안색이 확 변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알아냈다고요? 그게 누군데요.”

“황일우 화백에게 아들이 두 명 있다는 건 아시죠? 아마 장남이 그렸을 거예요.”

“황상연이요?”

“이름을 아십니까?”

“오늘 바로 수사를 하게 될지도 몰라서 가족 관계를 미리 확인해뒀어요. 황 화백의 장남이 황상연이고 차남은 황상호예요. 황상호와 함께 그림을 판 두 번째 부인은 장혜빈이고요.”

“혹시 사진도 가지고 있습니까?”

윤 과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가 화면을 넘겨가며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자, 도윤이 그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사람이 혹시 장남인가요?”

“맞아요. 그 사람이 장남 황상연이에요.”

“나이는 몇 살이죠?”

“올해 마흔 세 살이에요. 차남은 스물 네 살이고.”

역시 그렇군. 도윤이 기억하고 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잔류 기억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남자는 이십대 후반, 많아봤자 삼십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부인이 황 화백과 결혼한 시기를 생각하면 차남은 기껏해야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림이 최소한 몇 년 전에 완성되었다고 가정하면 나이가 맞지 않는다. 결국 장남이 자화상을 그렸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윤다솔이 보여준 사진에 의하면 그 짐작이 옳았다.

‘영상에서 보인 남자의 당시 나이로 볼 때 십 수 년 전에 그린 그림일 거야.’

도윤이 말을 않고 가만히 있자 윤다솔이 그의 얼굴 앞에 대고 손가락을 탁 튕겼다.

“생각 다 끝났으면 이제 좀 털어놓으시죠. 도대체 뭘 근거로 황상연이 범인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그림을 위조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도윤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황상연이 범인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요?”

아마 성질대로 했으면 한 대 쳤을 거다. 윤다솔은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 전에 그랬잖아요. 저 안에 있는 그림들을 황일우 화백의 장남이 그렸다고.”

“그랬죠. 그게 황상연이 범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장난해요?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애초에 저 그림들은 위작이 아닙니다. 황일우 화백의 그림이 아닐 뿐이지.”

짜증이 난 윤다솔이 손을 들어 자기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후!, 좋아요. 그러니까 이 박사님 말은 저 그림들은 모두 황상연이 그린 자기 그림일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애초에 범죄가 없었으니 범인도 없다?”

“범죄는 있었죠. 당연히 범인도 있고. 황 화백의 그림이 아닌 걸 그 분의 그림인 것처럼 속여서 팔려고 한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윤다솔이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흠, 이 여자는 역시 위험해.

“말을 빙빙 꼬아서 돌리는 악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 오케이. 정리해 볼게요. 저 그림은 황 화백의 장남인 황상연이 그렸다. 하지만 그는 원래 위작을 만들어 팔려던 게 아니라 그냥 아버지의 화풍과 유사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새엄마인 장혜빈과 의붓동생인 황상호가 그걸 가져다 황 화백의 그림인 것처럼 팔았다는 거죠? 오광춘 회장은 사기를 당했을 뿐이고. 제가 제대로 정리한 거 맞나요?”

“오 회장이 사기를 당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공모를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황상연 역시 자기 그림이 팔리는 과정에서 어떤 관여를 했는지 아직 모르고요. 하지만 나머지 얘기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윤다솔이 도윤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굉장히 재미있는 얘기군요. 좋아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나중에 조사하면 될 테고, 그럼 이제부터 근거를 내놓으시죠? 황상연이 저 그림들을 그렸다는 근거 말이에요. 지금 들은 얘기를 서에 돌아가서 그대로 보고하면 제가 미친년 소리를 들을 거라는 건 아시죠?”

도윤은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예전에 드 호리라는 헝가리 태생의 위조범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말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위작을 팔아치운 사람이죠. 드 호리는 초기에 주로 피카소의 소묘를 위조했습니다.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린 데생 말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유화를 위조할 때는 피카소가 아니라 모딜리아니나 마티스의 그림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들 그림이 자기 스타일이었나 보죠.”

“뭐,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모딜리아니나 마티스는 유화를 그릴 때 캔버스에 물감을 얇게 발랐어요. 전문적인 얘기는 생략하겠지만 그런 그림일수록 위조하기가 쉽습니다. 그와는 달리 피카소는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경향이 강했지요. 그래서 드 호리도 유화를 위조할 때는 피카소를 포기했어요. 그쪽이 거래는 훨씬 잘 됐는데도.”

“박사님. 강의는 고마운데, 되도록 본론만 간단히 얘기하시죠? 아니면 칠판까지 가져다 드릴까요?”

“흠흠, 황일우 화백은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서 꺼끌꺼끌한 황토 흙의 질감이 나도록 하는 기법을 썼습니다. 그분만의 독창적인 기법인데, 당연히 캔버스에 물감을 굉장히 두껍게 바르는 기법이기도 하죠. 그런 그림을 위조하는 건 무척 어려워요.”

“그렇다 치고요?”

“게다가 단순히 물감을 여러 번 칠한다고 해서 황토 흙의 질감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황 화백의 채색 기법은 흉내 내기가 지독하게 어렵기로 유명하죠.”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전시실에 그걸 똑같이 재현한 그림이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채색 기법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해도 저 정도 위작을 만들려면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작업을 해야 합니다. 물감을 바른 뒤에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칠하는 일을 반복해야 하니까요.”

“돈을 벌려면 당연히 그 정도 투자는 해야죠. 아무리 위조범이라도 날로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조범들은 대개 주거가 불안정한 경우가 많고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황 화백의 그림은 잘 위조를 안 하죠. 그 양반의 그림이 시장에서 아주 비싸게 거래되는데도 위작이 많이 나돌지 않는 이유가 그겁니다.”

윤다솔이 도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했어요. 일단 기법 얘기부터 해봐요. 그런 복잡한 기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화가가 그림 그리는 걸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야 한다는 거죠?”

“그림만 보면 기법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천재적인 위조범이 아니라면요. 더구나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애초에 위조를 목적으로 흉내 낸 게 아닐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그럼 저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황화백과 오랫동안 같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 동료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아니면 언제든 화실을 드나들 수 있는 가족이거나.”

“제가 아는 한 황 화백은 다른 화가와 화실을 같이 쓴 적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화가는 드물죠. 가난했던 고흐도 고갱과 같은 집에서 작업할 때 화실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결론은 가족이다? 그런데 부인은 그림을 그릴 줄 모르고, 차남은 당시에 너무 어렸을 테니까 결론은 장남이 범인, 아니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라는 건가요?”

“빙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다솔의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게 이럴 때는 좋았다. 그가 몇 가지 단서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추리를 완성해주니까. 만약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지면 그녀도 도윤의 논리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당장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넘어가 한 가지 일을 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과장님.”

도윤이 은근한 목소리로 윤다솔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황 화백의 부인과 둘째 아들은 호주에 있다니까 당장 부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장남은 소환을 해서 조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국내에 있을 테니까요.”

윤다솔이 피식 웃었다. 순간 도윤은 가슴이 뜨끔했다.

“이 박사님. 제가 그림의 위조 방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대충 지어낸 듯한 거짓말에 홀딱 속아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거짓말이라니요? 제가 왜 과장님을 속입니까?”

도윤은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적어도 드 호리에 관한 얘기나 물감을 두텁게 바른 유화를 위조하기 어렵다는 건 정확한 사실이니까.

“공무 방해죄로 체포당하고 싶지 않으면 거기까지만 하세요. 화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위조하기가 어렵다고요? 그게 그렇게 넘사벽으로 어려운 일이라면 시장에 돌아다니는 그 숱한 위작들은 다 뭡니까?”

윤다솔은 그 대목에서 혀를 쯧쯧 차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오늘 저 그림들이 위작이라는 결론이 나면 수사가 시작될 거예요. 그럼 늦든 빠르든 황 화백의 유족들은 한 번쯤 소환하겠죠. 당연한 절차니까. 다만 이번 경우에는 장남에 대해 조금 더 철저하게 캐보죠. 왜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박사님이 굳이 그 사람을 지목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윤다솔이 눈을 매섭게 뜬 채 도윤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왜 황상연이 저 그림들을 그렸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이유를 말해줘야 돼요. 말도 안 되는 소설 말고 진짜 이유를. 아셨죠?”

글쎄요. 그건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도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   *   *

점심시간이 지날 즈음, 임시 대기실로 쓰고 있던 회의실로 감정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지루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전시실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모 대학의 미대 교수라는 사람이 나서서 결과를 발표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재감정에서는 만장일치의 의견을 내는데 실패했습니다. 일단 황 화백의 자화상에 대해서는 모든 감정 위원이 위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는 2대2나 3대1로 의견이 갈렸어요. 위작이라는 의견이 더 많은 작품도 있고, 진작이라는 의견이 더 많은 작품도 있습니다.”

전시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재감정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무슨 감정이 이 따위야?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뭐가 이렇게 어정쩡해?”

오광춘이 제일 먼저 불만을 토로했다. 그로서는 자칫 잘못할 경우 적지 않은 돈이 그냥 날아갈 판이었으니 당연한 불만이기도 했다.

“성 사장. 애초에 한성에서 했던 감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이제 알겠지? 그때는 모든 감정위원들이 죄다 진작이라고 했다면서? 난 아직도 이 감정 결과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한성도 더 이상 저 그림들을 경매에 붙여서는 안 돼.”

김진만 화백이었다. 그의 말에 성진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김 화백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 일단 침묵을 지켰다.

“이렇게 되면 황일우 화백의 그림에 대한 위작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군요. 제 생각에도 경매는 일단 중단시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우재경 부장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맺혔다. 그로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터트린 특종의 가치가 더욱 공고해지는 느낌일 것이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지켜보던 윤다솔이 도윤에게 속삭였다.

“이상하네요. 같은 그림을 두고 한 감정의 결과가 왜 이렇게 다를 수 있죠? 지난번 감정 때는 만장일치로 진작이라는 결론이 나왔잖아요?”

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한성이라는 이름값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성 옥션 정도 되는 곳에서 선택한 작품이라면 가짜일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겠죠. 한성 쪽에서도 감정을 맡길 때 은연 중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을 거고요. 그런 선입관이 감정가들의 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안목 감정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의혹이 제기된 뒤에 실시한 오늘의 재감정에서도 만장일치로 위작이라고 판명된 건 자화상 하나뿐이잖아요. 솔직히 미술품 감정에 대한 신뢰가 팍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도윤도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저 정도로 황 화백 본인의 그림과 흡사한 위작은 정말 나오기 힘들다. 위작에도 등급을 매긴다면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변명할 수는 없다. 그럼 감정이라는 작업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재감정 결과에 대한 불만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 때문에 감정을 마친 감정가들이 전시실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성진아 한성 옥션 사장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전시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가득 찬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글쎄, 지금 거기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걸 옥션 직원들이 말리고 있는 모양이다.

“전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할 말이 있다니까요.”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도윤이 흠칫하는 순간, 거친 소리와 함께 전시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더니 뒤에서 잡아끄는 직원들의 손을 뿌리치면서 한 남자가 기어코 전시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저 사람은?”

도윤과 윤다솔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앞에 사십대의 중년 남자가 착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황일우 화백의 장남 황상연. 도윤이 스코틀랜드에서 하이랜드 트래킹을 할 때 만났던 남자. 산비탈에 이젤을 걸어놓고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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