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도윤은 안석훈과 함께 저녁 식사 겸 술자리를 가졌다. 강의도 끝났겠다, 한동안 서로 만나기 힘들 테니 오랜만에 마음껏 취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석훈이 그날따라 스트레스가 심한지 술을 마시면서 계속 한성 옥션을 씹어댔다.
“아니, 위작을 잘못 건드렸다가 사방에 쪽을 팔았으면 사람이 창피한 줄을 알아야지. 왜 애꿎은 보안 팀은 자꾸 건드리는 거야? 싸가지 없는 자식이.”
“누구? 한치호?”
“한성에 싸가지 없는 놈이 그 놈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엔 맞췄네요. 요즘 그 한 실장인가 뭔가 하는 놈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아주 엉망이에요.”
한치호는 여전히 한성 옥션의 기획실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회사 같으면 진즉에 목이 날아갔겠지만, 엄마를 같은 회사 사장으로 둔 금수저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물론 회사 내에서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황일우 화백 위작 사건 이후로 성진아 사장이 다시 업무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출근하면 사무실에 콕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듯하더니, 최근 들어 갑자기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아니, 황상연이 회사에 난입한 게 왜 보안 팀 책임이냐고요. 평소에도 전시실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출입을 제한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지가 물 먹은 게 그 사람 때문인가? 애초에 자기 눈이 삐어서 아들이 그린 걸 아버지 이름으로 팔려다가 난리가 난 거 아니에요? 꼭 못된 놈들이 남 탓만 해요.”
이 놈 이러다가 사고 치겠네. 술김이기는 하지만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평소에 한치호에 대한 불만이 꽤 쌓인 모양이었다. 녀석은 그 불만을 술로 달래려 했다. 야, 오늘은 네가 아니라 내가 취하려고 했던 건데…….
그날 밤, 도윤은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석훈을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녀석은 도윤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쓰러져서는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허이구, 이 자식. 그나마 코를 골지 않아서 다행이다.”
대자로 드러누운 채 입을 떡 벌리고 숨을 푹푹 내뿜는 석훈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미국 가기 전에 한 번 속 시원하게 취해보고 싶었는데, 취하기는커녕 술 취한 놈 시중을 들어주는 신세가 되었다.
“최서라 씨는 잘 있으려나? 다음 학기에 논문 제출할 거라고 했는데.”
술이 애매하게 취해서 그런지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윤은 전화기를 켰다가 입맛을 다시고 도로 껐다. 논문 때문에 굉장히 바쁠 텐데…….
다음날 아침, 잠시 눈을 뜬 석훈은 전화기부터 찾았다.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목소리로 뭐라고 떠드는 것 같은데, 대충 들어보니 회사에 반차를 신청하는 모양이었다. 통화가 끝난 뒤 전화기를 팽개치듯 내려놓은 녀석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씻고서 식당으로 내려가라. 아주머니가 콩나물 국 끓여놓으셨어.”
석훈이 거북이처럼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난 기다리다 벌써 먹었어. 너도 얼른 먹고 회사 출근해.”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한 녀석이 그제야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훈이 출근 준비를 마치는 동안, 도윤은 아침부터 꾸리던 여행 가방을 정리했다.
원래 일곱 주로 예정됐던 방송 스케줄이 네 명이 남는 준결승부터는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씩 탈락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촬영 기간이 한 주 더 늘어 여덟 주가 되었다. 최종 결승까지 올라가면 최대 두 달가량을 미국에 머물러야 하니 짐이 제법 많았다.
“이사 가요? 무슨 짐이 캐리어로 두 개나 돼요?”
식사를 마치고 올라온 석훈이 방 안에 놓인 여행가방을 보고 혀를 찼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미리 준비했던 물건을 내밀었다. 둥글고 납작한 철제 통이었는데, 구두약 통 두세 개를 포개 놓은 듯한 크기였다.
“나 없는 동안 이것 좀 보관해 줘라.”
“뭐에요, 이게?”
석훈은 뚜껑을 열더니 안에 돌돌말린 천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이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꺼낸 의문의 띠였다.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그게 뭔지는 나중에 말해줄게. 어쨌든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만 명심해. 널 믿고 맡기는 거니까 잃어버리면 절대로 안 돼. 알았지?”
“정체도 모르는 걸 맡으라고요? 가만, 이거 천이 얼룩덜룩하네? 잉크 얼룩이 졌나? 아무리 봐도 천 쪼가리인데 고작 이런 걸 맡기면서 너무 살벌하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농담 하는 거 아냐. 진짜 귀중한 거니까 잘 가지고 있어. 부탁한다.”
석훈은 도윤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철제 통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좋아요. 마약이나 폭발물도 아닌 것 같으니까 일단 가지고 있을 게요.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잘 보관할 테니까, 대신 돌아올 때 선물 알죠?”
“알았어. 너만 믿는다.”
도윤은 집에서 회의용 테이블을 책상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잠금 장치가 달린 서랍이 없었다. 그 동안은 천이 담긴 통을 책꽂이 선반 위에 올려뒀었는데, 막상 집을 오래 비운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제 통은 원래 사탕을 담아두던 통이었고, 안에 든 천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석훈이 말마따나 얼룩진 천 조각에 불과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나 어머니가 방을 정리하다 무심코 치워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재에 있는 아버지 금고에 넣자고 하려니, 이유를 설명하기도 복잡하고…….”
결국 택한 것이 석훈에 맡기는 것이었다. 아마 녀석이 어제 집에 와서 자지 않았더라면 그냥 미국까지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불편한 일이었다.
사실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나온 천은 적지 않게 골칫덩이였다. 오래된 물건인 건 분명한데, 그 자체로는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직까지 알 수가 없었다.
천을 잘 조합하면 하나의 문양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한동안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는 했다. 하이랜드 트래킹을 할 때도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을 보면서 연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암만 봐도 천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닌 것 같고, 결국 문양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건데…….”
그는 일단 미국에 다녀온 뒤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연구해보기로 했다. 잘 풀리지 않는 일은 미련스럽게 매달리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닌 법이다.
* * *
몇 년 만에 오는 뉴욕은 도윤을 이상한 방식으로 반겼다. 그는 뉴욕 케네디 공항의 입국장을 두 번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로 출구를 나설 때 그를 찍고 있던 두 대의 ENG 카메라를 보고 무심코 눈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Doyoon Lee’라는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피켓을 들고 있던 방송국 직원이 재빨리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참가자들이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촬영을 하고 있어서요. 미안하지만 입국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한 번만 나와 주시겠어요? 이왕이면 활짝 웃으면서.”
이 방송에서 나의 첫 등장은 환한 미소와 함께 시작하겠군. 도윤은 기꺼이 출입구를 다시 통과해주었다. 활짝 웃으면서. 이 사람들 참, 미리 얘기나 해 주던가.
그를 마중 나온 방송국 직원은 케이티 패럴이라는 이십대 중반의 인턴사원이었다. 아마 그녀가 맡은 오늘의 주요 임무는 도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인 듯했다. 케이티는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또 다시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참가자 숙소가 아니라 호텔로 가셔야 할 거 같아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들이 계시거든요. 이틀 정도 호텔에서 쉬시다가 참가자가 다 모이면 그때 방송국에서 예정된 숙소로 이동할 거예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도윤은 씩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프로그램 내내 참가자들이 같은 집에 머물 거라는 얘기는 이미 통보 받았다. 공동 숙소에서 경쟁자들 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카메라에 담을 의도인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인턴사원이라서 너무 긴장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케이티는 근본적으로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그녀는 차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케이티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호텔 프론트 데스크에서 키를 받은 뒤였다.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동안 제가 이 박사님의 조수 역할을 할 거예요. 궁금하거나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를 찾으세요.”
“조수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전담 스태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비서 같은 …….”
“제 스케줄을 챙겨주시는 분이라는 말이죠? 탈락하기 전까지 전담해서.”
케이티의 고개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렸다. 저러다 목 부러지지…….
“저는 이 박사님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꼭 우승하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두 주먹을 힘껏 쥐어 들어 보이는 그녀 때문에 하마터면 실소가 터질 뻔 했다.
“고마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도윤은 씩 웃으면서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순간, 케이트가 움찔했다.
“필요할 땐 언제든지 찾으라면서요? 그러려면 전화번호를 알아야지요.”
“아, 네. 그렇지요. 물론이에요.”
케이티의 전화번호를 저장한 도윤은 방까지 안내하겠다는 그녀를 로비에서 돌려보냈다. 짐은 어차피 호텔 측에서 방으로 옮겨줄 것이고, 프로그램 진행과 관련된 문서도 이미 받았다. 혹시 실수하는 게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인턴사원에게 설명을 듣느니 그냥 문서에 적힌 내용을 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방에서 샤워를 마친 뒤 짐을 풀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트루쓰 앤 밸류’의 피디인 알랭 클로드였다.
“호텔에 도착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지 않네요. 편의를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모레 오전에 모든 출연자들이 방송국에 모일 겁니다. 아침 아홉시쯤에 저희가 호텔로 차를 보낼 거예요. 그 차를 타고 오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은 아무런 일정이 없나요?”
“있습니다. 메인 작가인 존 카론이 내일 오후 다섯 시쯤 이 박사를 만나러 호텔로 갈 거예요.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요. 각 출연자들과 사전 인터뷰를 해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 시간에 맞춰 방에서 기다리죠.”
“그럼 편히 쉬십시오. 멀리서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화를 끊은 도윤은 룸서비스에 전화해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주문했다.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케이티에게서 받은 서류를 몇 장 넘기자 출연자 명단이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국적이 다양하네? 미국 방송이니까 영어에 능숙한 사람들로 뽑았겠지? 아니면 통역을 붙여줄 생각인가?”
통역이 필요한 출연자는 경쟁에서 핸디캡을 안고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후반부로 갈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방식으로 진행된다. 처음 다섯 주는 심사위원 세 명이 매긴 점수만으로 탈락자를 결정하고, 방송 역시 녹화로 방영된다. 하지만 최후의 네 명이 겨루는 6주차부터는 생방송으로 진행됨과 동시에 SNS와 전화로 받은 시청자들의 점수도 집계에 포함된다. 심사위원 점수 70점과 시청자 점수 30점을 더해서 탈락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럼 감정 능력 못지않게 시청자들에게 감정 이유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질 텐데…….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면 시청자 점수를 얻기가 쉽지 않을 거야.”
결국 미국인이거나 최소한 영어가 능숙한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출연자들의 사진과 이름, 간단한 이력이 적힌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열두 명의 참가자 가운데 미국인이 다섯 명이고 나머지 일곱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만 미국인 참가자 가운데 마이크 모리타는 이름과 사진으로 볼 때 일본계가 분명했고, 레프 오보린이라는 남자는 얼굴에서 러시아나 북유럽 쪽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도윤처럼 예선을 거치지 않고 올라온 네 명의 지명 참가자는 각각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독일에서 초대되었다. 미국 쪽 지명 참가자는 게릭 올슨이라는 흑인 남자였는데, 나이가 무려 마흔여덟 살로 참가자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다. 최연소자인 쉬주하오라는 중국인 지명 참가자는 도윤보다 한 살 적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천재인가? 이 나이에 어떻게 지명 참가자로 초대를 받은 거지?”
도윤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는 런던 크리스티에서 있었던 사건을 피디가 직접 목격한 덕분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연찮은 행운의 결과로 지명 참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설마 자신보다 한 살이 적은 지명 참가자가 또 있을 줄은 몰랐다.
미술품 감정은 절대적으로 많은 공부와 오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삼사십대였다. 이십대는 쉬주하오와 도윤, 그리고 벨라 베르나르라는 캐나다 여자 셋뿐이었다. 그나마 베르나르는 스물아홉으로 도윤보다 한살이 더 많았고, 예선을 통과한 참가자였다. 그가 최연소인데다 지명 참가자이기도 한 쉬주하오를 천재라고 추측하는 이유였다.
또 다른 지명 참가자인 독일의 할리나 도비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서른여섯 살의 어머니였다. 그밖에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에서 온 참가자들이 각각 한 명씩 예선을 통과했다. 직업은 도윤 같은 미술사가, 전문 감정가, 큐레이터, 유물 복원가 등으로 다양했다.
“다들 이번 경연을 기회로 생각하고 있겠군. 서류에 적힌 경력들도 화려하고. 우승하려면 만만치 않은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는 뜻이네.”
솔직히 말해서 진위 감정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신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예술품의 시세를 판단하는 가치 감정은 시장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도윤이 남들보다 낫다고 자신하기 어려웠다.
또한 위작을 짚어내는 것과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소위 말빨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번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출연자는 분명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래도 잘 해야지. 걸린 게 얼만데.”
이왕 참가한 경연이니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젊은 도윤으로서는 되도록 빨리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경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의 참가를 찬성한 이세준과 서연희 역시 대중적인 인지도가 주는 이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도윤이 진짜로 신경을 쓰는 건 우승상금과 함께 준다는 부상이었다. 피디에게는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그는 우승자가 고를 수 있는 그림을 진짜로 로또로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