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9화 (29/300)

29화

다음날 오전, 도윤은 ‘뉴욕 현대 미술관’에 들렀다. INB의 존 카론이 온다고 한 오후 다섯 시까지 호텔에서 할 일 없이 죽치고 있기는 무료했기 때문이다.

흔히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뉴욕 현대 미술관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뉴욕의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도윤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곳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자동차를 타고 네 시간가량 운전하면 뉴욕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 정도면 미국에서 그다지 먼 거리라고 할 수 없었다.

입장료가 비교적 비싼 편임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안에는 적지 않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도윤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제1 전시실을 찾았다. 그곳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있기 때문이다.

후기 인상파를 전공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고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윤은 고흐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별이 빛나는 밤에’는 모마에 올 때마다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작품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다른 작품들을 젖혀두고 곧바로 ‘별이 빛나는 밤에’가 걸려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그림 앞에 수십 명이 몰려 있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도윤이 도착했을 때는 덩치가 큰 흑인 남자 한 명 만이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운동선수인가? 덩치가 굉장히 좋네.’

남자는 키가 거의 2미터에 가까운 장신이었다. 게다가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압박감도 상당했다. 아마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희끗 엿보이는 새치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현직 운동선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윤은 남자의 옆에 나란히 서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감상했다. 이 그림은 정말 좋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도 같은 제목의 연작 그림이 걸려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모마에 전시된 작품을 더 좋아했다. 이쪽이 오르세보다 일 년 뒤에 그려진 것이었는데, 그 사이에 고흐의 예술 세계는 조금 더 깊어졌거나, 아니면 광기의 끝에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다.

오르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그려진 별들은 안개에 가려진 뿌연 전등처럼 밤하늘에 흩어져 있다. 그것은 강물 위에 비친 마을의 불빛보다도 주장이 강하지 않다. 또한 그림에 묘사된 땅과 강, 그리고 하늘은 아직까지 사람이 디디고 설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다.

그러나 모마의 그림에서는 밤하늘 전체가 거칠게 소용돌이친다. 별들은 태양처럼 커지고, 어둠 역시 고요한 침묵이 아니라 거칠게 꿈틀대는 아우성으로 변한다. 도윤은 그림을 볼 때마다 고흐의 불안정한 정신이 하늘을 향해 꿈틀대며 올라가는 그림 속의 측백나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실제로 이 그림을 그린 지 불과 1년 만에 고흐의 심신은 올라올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고흐를 좋아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림 속에 몰입되어 있던 도윤의 정신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네? 뭐라고 말씀하셨죠?”

문득 정신을 차린 도윤은 옆에 있는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굽어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흐를 좋아하시는지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상을 방해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네.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에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박사님.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악수를 청해오는 바람에 도윤은 깜짝 놀랐다.

“저를 아십니까?”

“한국에서 오신 이도윤 박사님 맞지요? ‘트루쓰 앤 밸류’에 참가하기 위해서. 저도 같은 이유로 뉴욕에 왔습니다. 보스톤에서 온 게릭 올슨입니다. 이 박사님처럼 지명 참가자 자격으로 초대됐지요.”

“아, 그럼 댁이 바로…….”

도윤은 그제야 올슨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한대 맞으면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납작 뻗어버릴 듯한 느낌이 드는 큼지막한 손이었다. 출연자 명단에는 키와 몸무게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가 설마 농구선수를 방불케 할 만큼 엄청난 덩치의 소유자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의 눈이 자신의 몸을 살피는 것을 느낀 올슨이 씩 웃었다.

“큐레이터를 하기에 어울리는 덩치는 아니죠?”

에고, 깜짝이야. 도윤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하지만 확실히 몸이 좋기는 하시네요.”

“대학교에 농구 장학생으로 들어갔었습니다. 하지만 1학년 때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운동을 일찍 포기했지요.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덕분에 큐레이터가 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이 직업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랬군. 무릎을 다치기 전에는 덩크 슛을 뻥뻥 내리꽂았을 게 틀림없어.

“현직 큐레이터라고 하셨는데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궁금했다. 이런 덩치를 경호원으로 쓰지 않고 큐레이터로 채용한 곳이 도대체 어딜까? 그런데 올슨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입니다. 보통 가드너 미술관이라고 부르죠. 혹시 가보셨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학교 다닐 때 자주 들렀어요. 도심 속의 보석 같은 미술관이죠.”

올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보석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희 미술관을 그렇게 좋게 보셨다니,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군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직장입니다. 저는 그곳에 갈 때마다 건물 한 가운데에 있는 정원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냈어요. 내부 장식이 너무 아름다워서 회랑을 걷다보면 꼭 궁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요.”

올슨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이 사람, 자기 직장을 정말 자랑스러워하는군.

“전시실이 좀 어둡지 않았습니까? 가끔 그 점에 불만을 표시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글쎄요. 관람객들은 그림 앞에 서서 오래 전의 화가와 대화를 합니다. 그럴 때는 주변이 차분한 게 오히려 감상에 도움이 되죠. 저는 약간 어두운 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최근 들어 조명을 조금 밝게 하자는 쪽으로 큐레이터들의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각종 안내판과 건물 지도를 더 많이 배치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도 추가하기로 했고요.”

“그럼 관람객들이 확실히 예전보다 더 쾌적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군요.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들러야 하겠습니다.”

도윤은 되도록 올슨의 호감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비로소 처음부터 계속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근데 가드너 미술관이면 개인 소유의 미술관 중에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일하시는 분이 왜 굳이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결심하셨는지…….”

그러자 올슨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 점을 묻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우승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얻는 게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혹시 책임 큐레이터이십니까?”

“맞습니다. 오년 전부터 그 일을 맡고 있지요.”

“그렇다면 연봉이 최소한 우승 상금보다는 많겠군요. 십만 불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자칫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죠. 현재 상태에서 딱히 능력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리는 없고, 명성을 더 쌓는다고 해서 직장을 옮기실 분 같지도 않고요. 혹시 우승자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그림 때문입니까?”

올슨은 고개를 저었다.

“INB쪽에서 방송 출연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드너 관장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일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한 번 집중시켜 달라고요.”

“오래 전 일이요?”

“혹시 우리 미술관에서 발생했던 끔찍한 도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아, 네. 그럼 그 일 때문에…….”

도윤은 그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그때 잃어버린 작품들에 대한 가드너 가문의 집착은 아주 유명하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은 설립자의 풀 네임을 그대로 미술관 명칭으로 사용했다. 현재의 미술관 역시 초대 관장인 가드너 여사가 계속 늘어나는 예술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직접 설계를 부탁해서 만든 저택이었다.

1990년, 3월 18일 새벽. 보스턴에 위치한 이 미술관에서 희대의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먼동이 트기 전의 이른 아침, 경찰관 복장을 한 두 명이 비상벨이 울려서 왔다며 미술관의 문을 두드렸다. 범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던 경비원을 권총을 들이대며 협박해서 포박했고, 전시실을 돌아다니며 열세 점의 미술품을 훔쳐서 유유히 달아났다.

이들이 훔쳐간 그림들 중에는 렘브란트의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와 베르메르릐 ‘콘서트’가 포함되었다.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는 렘브란트가 그린 유일한 항해 풍경이었고, 베르메르의 작품은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합해도 서른네 점밖에 되지 않는다. 도난당한 그림들의 시가 총액은 무려 5억 달러에 달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도난 작품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범인들 또한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도난당한 작품을 되찾으려는 가드너 미술관의 노력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FBI 보스톤 지부는 아직까지 수사본부를 해체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으며, 미술관은 작품 회수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도난 미술품 시가 총액의 1퍼센트인 500만 달러를 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심지어는 누군지 모를 범인들에게 온도와 습도를 잘 조절해서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드너 관장님이 얼마 전에 상금을 천만 달러로 올렸습니다. 방송에 출연하면 저한테 그 얘기를 꼭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천만 달러! 도윤은 가드너 관장의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 작품을 되찾는다고 해서 미술관이 그걸 팔려고 내놓을 리는 없으니, 도움만 주면 천만 달러를 그냥 주겠다는 소리였다.

“그 정도 돈이면, 전 미국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작품을 찾겠군요.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의 그림은 구글만 검색해도 금방 사진이 나올 테니까.”

“관장님도 그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되도록이면 오래 살아남으려고 애쓸 작정입니다. 그럴수록 가드너 미술관과 도난당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테니까요.”

에이, 여보쇼. 가드너 미술관쯤 되는 곳의 책임 큐레이터가 그러는 건 반칙이지. 그냥 적당히 하세요. 애는 나 같은 젊은 놈이 쓸 테니까.

“마음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데,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그러지는 못하겠네요.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함께 좋은 대결을 벌였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박사가 제 결승 상대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하하, 그것참 살벌하도록 고마운 말씀이네요.”

도윤은 곧바로 모마를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강적이 등장했다!

* * *

“그 양반, 참. 덩치나 작던가. 다른 건 고사하고 물리적으로도 이미 압도적이네.”

호텔로 돌아와 생각하니 새삼 기가 막혔다. 농구 선수의 체격에 이십 년이 넘는 큐레이터 경력이라니. 가드너 미술관이 아무나 막 뽑았을 리는 없고, 농구 선수를 그만 둔 뒤에 공부에 올인했을 게 뻔했다. 딱 봐도 성실한 타입이니 현장 견학은 또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우리나라는 큐레이터를 전시기획자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큐레이터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모 대학의 대학원 전공 이름도 ‘전시기획’이다.

하지만 외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은 우리나라의 ‘학예사’ 쪽에 더 가깝다. 작품을 감정, 구입하고 연구하는 부분에 더 치중하기 때문이다. 큰 미술관의 경우, 작품 전시에 관한 구체적 업무는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게릭 올슨처럼 책임 큐레이터라면 작품 감정도 숱하게 해봤을 것이다.

“충성을 다하는 기사의 마인드라……. 다 좋은데 가드너 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면 자기 집이나 얌전히 지키고 있을 것이지 왜 애들 놀이터를 기웃거리는 거야.”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존 카론이 도윤을 인터뷰하기 위해 촬영 팀과 함께 호텔로 찾아왔다. 인터뷰 도중, 도윤은 이번 프로그램에 임하는 긴장감을 슬쩍 피력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당장 게릭 올슨 씨만 하더라도 무려 가드너 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잖아요. 명색이 지명 참가자인데 초반에 탈락할까봐 걱정입니다.”

그러자 존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게릭 올슨이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쟁 상대라니요? 그건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제가 참가자들의 면면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올슨 씨 정도면 일단 우승 후보자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우승 후보자로 이 박사님도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서류에 나와 있는 참가자들의 이력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불과합니다. 그 자료만 보면 누구도 이 박사님을 우승 후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자료만 보고는 파악할 수 없는 다크호스가 더 있다는 뜻인가요?”

“내일 오전이면 모든 참가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겁니다. 궁금하시면 그 자리에서 직접 확인하시죠.”

존 카론은 그 말을 남기고 호텔을 떠났다. 아, 뭐야? 사람 궁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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