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다음날 아침, 도윤은 INB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방송국에 도착했다. 그의 전담 스태프이자 비서를 자처하는 케이티가 차 안에서 오늘 진행될 일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촬영이 시작될 거예요.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이는 장면을 모두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에요.”
“이번에도 활짝 웃어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청자들에게 밝은 이미지를 주는 게 좋잖아요.”
다크 나이트 역할은 없는 건가? 까짓 거 웃어주지 뭐.
“리키 배런스와 제임스 페이건이 공동 사회라는 건 아시죠?”
“서류에서 읽었어요.”
케이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뭐지, 이 분위기는?
“혹시 두 사람이 누군지 모르세요?”
“알아야 하나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탑 모델과 탑 배우를 모른다고요? 제임스 페이건은 INB에서 방영된 ‘리걸 저스티스’의 주인공이라고요. 이미 다섯 번째 시리즈까지 나왔는데…….”
“제가 아는 가장 유명한 모델은 모나리자고요, TV 드라마는 한국 것도 잘 안 봐요.”
“아, 네. 역시 공부를 하느라…….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 박사가 되셨겠죠. 대단하세요.”
분명히 칭찬인데, 말투에서 호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내가 여주인공도 아니고 남자 주인공 배우의 이름까지 알아야 해?
방송국에 도착하자, 케이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실은 캐리어를 끌어내리기 위해 끙끙댔다. 도윤이 얼른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짐을 낚아챘다.
“스케줄만 확실히 챙겨주세요. 짐꾼 노릇을 할 생각은 말고.”
약간 뚱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감격으로 물들었다. 역시 감정 변화가 빠른 아가씨라니까. 그나저나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 거 확실하지? 케이티가 말한 대로 도윤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이미 ENG 카메라를 든 촬영 스태프들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도윤이 방송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두 명의 참가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이 하나둘 도착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촬영한 뒤에 두 명의 공동 사회자가 번갈아가며 참가자들을 한 사람씩 카메라 앞에 세워서 소개했다. 도윤을 소개한 사람은 세계적인 탑 모델이라는 리키 배런스였다.
처음에는 무난했다. 리키는 도윤이 한국인이라는 것과 젊은 나이에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임을 밝히고, 이어서 그의 훤칠한 외모를 칭찬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그녀가 막판에 갑자기 대본에 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이 박사님은 미술사를 공부하셨잖아요? 그럼 역사를 전공하셨다는 얘긴데, 그런 분이 미술품 감정까지 한다는 건 참 특이한 것 같아요. 어떻게 감정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참가자들 사이에서 쿡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지 마라. 모를 수도 있지. 하긴 질문이 좀 난감하기는 했다.
“모든 미술사가들이 미술품 감정을 하는 건 아니지만, 감정을 제대로 하려면 미술사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전문 감정사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요. 대개 저 같은 미술사가나 복원 전문가, 큐레이터 같은 사람들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감정하는 거지요. 과학자들이 그 일을 맡을 때도 있고요.”
“아, 그럼 이 박사님 같은 미술사가도 충분히 감정을 잘 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미술사가는 말이 많은 감정가고 감정가는 과묵한 미술사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작품을 보고 역사적 배경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직업은 크게 다르지 않지요.”
“아, 그렇군요. 덕분에 새로운 걸 알았네요. 교양이 쑥쑥 늘어나는 느낌이에요.”
당신이 다른 프로그램의 사회자였다면 그렇게 말해도 무난하겠지. 하지만 방송이 나간 뒤에 인터넷 댓글을 보면 교양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쑥쑥 늘어나는 느낌을 받을 걸? 피디에게 편집을 잘 해달라고 미리 부탁해야 할 거다.
참가자 소개가 끝나자 다들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숙소로 이동했다. 도윤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는데 뒷자리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리키 배런스 말이에요. 얼굴하고 몸매는 끝내주는데 너무 무식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왜 저런 여자를 사회자로 캐스팅했나 몰라?”
이 목소리는…, 아까 소개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로지나 레빈이 분명하다. 예선을 뚫고 올라온 미국 참가자. 나이는 서른네 살. 플로리다 출신이고 본업은 화가라고 했었나?
“그 정도 몸을 가지고 있으면 그 여자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걸요? 특히 남자들 말이에요. 미술관에 와서 누드 그림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변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요.”
이건 에이미 그리넘이다. 런던에서 온 마흔한 살의 복원 전문가. 좀 차가워 보이기는 하지만 차분한 흑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입은 보기보다 그리 우아하지 않은 모양이다.
‘잘못 얽히면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높은 여자들이네.’
미국 예능 방송에도 이른바 악마의 편집이 심하다. 가끔은 한국 방송에서 하는 게 애교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도 최소한 사회자는 보호한다는 점이다. 도윤은 두 여자의 이름 앞에 지뢰 표지판을 꽂아두었다.
* * *
참가자들의 숙소는 뉴욕 근교에 위치한 3층짜리 고급 빌라였다.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인공 폭포가 설치된 커다란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었고, 1층 거실 한쪽은 전체가 통유리였다. 참가자들은 2층과 3층의 방을 각각 배정받았다. 한 방에 두 명씩이었다.
도윤은 최연소자인 쉬주하오와 한 방을 쓰게 됐다. 룸메이트가 어떤 사람일까 은근히 걱정했는데, 다행히 쉬주하오는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있는 친구였다.
“북경중앙미술학원을 졸업했다면서요? 저는 상해미술대학을 나왔어요. 같은 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셨다니까 고향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반갑네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쉬주하오가 먼저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웃음이 맑은 친구였다.
“나도 반가워요. 대학에서는 뭘 전공했어요?”
“패션 디자인이요. 조금 특이하죠?”
“어, 그러네요. 디자이너 출신의 감정가는 저도 처음 봐요.”
정말 뜻밖이었다. 그때 두 사람을 따라다니던 카메라맨이 촬영중지를 외쳤다.
“죄송하지만 두 분 모두 영어로 대화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그러면 나중에 자막 처리를 해야 돼서요. 부탁드립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쉬주하오 씨는…….”
도윤이 약간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순간, 쉬주하오의 입에서 능숙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저도 괜찮아요. 중국어가 통하는 분을 만나니까 저도 모르게 모국어가 나왔네요, 하하.”
“영어를 상당히 잘하네요?”
도윤이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쉬주하오가 겸연쩍게 웃었다.
“상해 미대는 파리의 국제패션 대학 모다르(Mod'Art)와 MOU를 맺었어요. 그래서 패션 디자인 전공자들은 3년 동안 영어로만 수업을 받아요.”
“불어가 아니라 영어라고요?”
“네. 조금 특이하죠? 아무튼 덕분에 영어는 익숙해요.”
쉬주하오의 설명에 의하면 상해 미대에서 3년 과정을 마친 학생은 파리로 가서 다시 1년 반 동안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게 끝나면 학사가 아닌 석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다.
“근데 파리에서 미술관을 드나들다가 엉뚱하게 미술품 복원에 흥미를 갖게 됐어요.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다시 전공을 바꾸고 처절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학업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온 쉬주하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일어난 고액의 미술품 위조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에는 워낙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라 INB에서도 특별히 젊은 그를 지명 참가자로 초대했다. 아마 쉬주하오를 내세워 프로그램의 송출권을 중국에 팔려는 계산도 바닥에 깔려 있을 것이다.
‘혹시 이 친구가 다크호스인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지명 참가자들은 누구나 다 잠재적인 우승 후보라고 할 수 있었다. 존 카론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암시했던 인물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럼 도대체 누구지?
* * *
‘트루쓰 앤 밸류’의 참가자들은 숙소에 머무르는 동안 컴퓨터나 휴대폰을 비롯한 일체의 전자기기를 잠정적으로 압수당한다. 방송 전에 경연 결과를 외부에 알리거나, 감정해야 할 작품과 관련된 정보를 밖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식사 역시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참가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물론 요리를 하는데 필요한 식료품들은 방송국 측에서 제공해준다. 다행히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모리타를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은 모두 한두 가지 정도의 요리를 할 줄 알았다.
“나는 집에 있을 때는 늘 어머니가 해주는 밥만 먹어서…….”
미안한 표정을 짓는 모리타에게 기꺼이 저녁을 만들어 준 것은 도윤과 쉬주하오였다. 두 사람 모두 오랜 객지 생활 덕분에 요리에는 어느 정도 능숙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촬영하는 것 외에는 INB에서도 특별한 스케줄을 요구하지 않았다. 전자 기기를 모두 빼앗긴 참가자들은 식사와 설거지가 끝나자 하나둘 일층의 거실에 모였다. 누군가 차를 끓여서 나눠주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각자 미술품 감정을 하면서 겪었던 일이나 고향에 얽힌 추억을 가볍게 털어놓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캐나다 출신의 벨라가 문득 ‘오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발터 벤야민의 ‘오러(Aura)’에 대해서는 아시죠? 원본에서만 흘러나온다는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말이에요. 그런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오라 말인가요? 그건 소드 익스퍼트의 칼에서 흘러나오는…….”
모리타가 시도한 농담은 독일에서 온 지명 참가자인 할리나 도비치에 의해서 끊겼다.
“아니, 아우라라고 해야죠. 벤야민은 독일 사람이니까 아우라라고 하는 게 맞아요. 라틴어 발음으로도 그렇게 읽어야 하고.”
모리타가 무안한 표정을 짓자 쉬주하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발음하든 저는 안 믿어요. 유물론자거든요. 그런 신비주의적인 주장은 예술품을 감상하는데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생각해요.”
파비앵 말레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예선을 뚫고 올라온 프랑스인이었다.
“이봐. 벤야민도 유물론자였다고. 그 사람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니까. 설마 벤야민이 아우라가 진짜로 눈에 보인다는 주장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었을 뿐이야.”
“나도 그 의견에 동의. 벤야민은 코끼리를 처음 본 유럽 사람들처럼 사진의 등장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화가들보다 더 정교하게 자연을 복제하는 기술을 보고 걱정이 됐겠지. 이러다간 미술이라는 예술 자체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래서 사진으로는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절대로 재현할 수 없을 거라고 우기고 싶었던 거야.”
시카고에서 작은 화랑을 운영한다는 자크 모리슨의 말이었다. 그러자 처음 얘기를 꺼냈던 벨라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자크 모리슨의 말을 반박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옐로나이프에 간 적이 몇 번 있어요. 캐나다에서 거의 일 년 내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죠. 그곳에서 밤하늘에 펼쳐지는 장관을 보고 있으면 벤야민이 말한 오러라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자연현상 아닙니까? 누구나 볼 수 있는.”
모리슨의 말에 벨라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장을 꺾지는 않았다.
“저는 예술품에서도 오로라와 같은 오러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다만 특별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신비한 에너지라서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지.”
어찌 보면 예술품 감정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 후에 나눌 수 있는 잡담으로 딱 알맞은 소재라고 할 수 있었다. 감정가들은 예술가들에 비해 비교적 이성적이지만, 그들 역시 한쪽 발을 신비의 영역 안에 걸쳐둔 채 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모나리자의 미소에 넋을 잃을 수 있겠는가?
무료한 저녁 시간이 예상되던 거실이 갑작스러운 토론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기꺼이 웃통을 벗고 열기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처음부터 결론이 날 수 없는 대화였다.
도윤은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내내 침묵을 지켰다. 그게 아우라인지 오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예술품에서 나오는 신비한 빛을 진짜로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벨라가 말한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보는 게 혹시 아우라일까?
그때, 도윤처럼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리치오 폴리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로마에서 미술품 감정을 하는 참가자였다.
“다들 아우라에 대해 궁금한 모양이군. 내가 진실을 말해줄까? 아우라는 정말 있어. 벨라의 말처럼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만 볼 수 있다는 것도 맞고. 벤야민이 뭘 알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사람도 특별한 눈을 가졌을지도 몰라.”
파비앵 말레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태리 사람들이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낭만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는데? 진실을 말해주겠다고? 선택받은 사람들만 아우라를 볼 수 있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러자 폴리니 역시 가소롭다는 듯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태리인의 거짓말은 낭만적이지만, 프랑스인의 낭만은 그 자체가 거짓이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당연히 나도 그걸 볼 수 있으니까 알지. 난 아우라가 눈에 보여.”
뭐? 도윤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